어젯밤 엄마의 심장이 갑자기 멈추었다. 찌는 더위에도 이리저리 찾아온 이들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엄마가, 밤중에 갑자기. 대학병원으로 옮겼고, 멈췄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깨어나지 않고 잠만 주무시고 있다. 오늘 아침 따사로운 햇살을 뚫고 몰려드는 시원한 바람에 넋을 놓고 있는데, 엄마의 소식이 전화기 너머 들린다.
7월 9일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를 찾아가는 '2차 희망의 버스'를 앞두고 이소선을 만났다. 가야 하는데 가지 못한다는 이소선의 시름을 달래드리려고 찾아갔다.
"야! 반년 넘게 김진숙이 고공에 매달려 있는데, 내가 가지 않고서 어디 노동자 어머니라고 할 수 있냐?"
"그럼 가면 되지."
"그런데 이 몰골로 우찌 가냐. 혼자 걷지도 못하고 사람들 치렁치렁 달고 가야 하는데…."
"그럼 다음에 가면 되지."
"지금 니가 나랑 장난치냐. 배웠다는 놈이 우찌 좋은 방법을 얘기해줘야지."
버럭, 이소선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사람들 갈 때(희망의 버스) 꼭 같이 가지 않아도 된다. 어머니 갈 수 있을 때 조용하게 가도 된다. 언제고 어머니 가겠다면 언제든 차 몰고 오겠다며 어머니의 안타까운 마음을 달랬다.
"내가 가서 나도 크레인에 니(김진숙)랑 같이 있겠다. 이리 말하고 올라갈 거다."
그때만 해도 이소선의 열정은 청춘보다 더 뜨거웠는데.
▲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 ⓒ프레시안(김봉규) |
이소선에게 '이달 말에 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나서는 내 팔을 잡는다. "지난번에는 내 이야기를 가지고 책(<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오도엽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을 썼으니까, 이번에는 니가 생각하는 데로 나를 책으로 써봐라" 한다. 못 쓴다고 했다. 한 권 쓰기도 힘들었는데 어떻게 또 쓰냐며 계단을 내려서는데, 다시 책 이야기를 했다. "싫다고 했잖아. 안 쓴다고 했잖아." 매몰차게, 이소선이 내게 붙여준 '건달'처럼 쏘아붙이고 돌아섰다.
지난해 전태일 40주기를 마치고 전태일재단을 그만두었다. 옆방 이웃이었던 이소선과의 집과도 멀어졌다. 자주 찾아뵌다고 했건만 자주 찾아가지 않았다. 전화도 늘 어머니가 먼저 했다. 서운한 마음에 전화하셨건만 내 목소리만 들으면, 잘살고 있으면 됐다고, 밥 잘 먹었는지를 챙겨준다.
이소선을 만나러 가야 한다. 중환자실로. 엄마가 자고 있는 곳으로. 가서 이소선의 팔목을 쥐고 깨워야 한다.
"어머니 잘 때가 아니라고. 걷는 연습 해서 영도 크레인 위에 매달린 김진숙 만나러 가야 한다고. 민주노총 위원장 단식하는 데도 가고, 밤에 잠 좀 자겠다고 외치다 공장 밖으로 쫓겨난 유성기업 노동자도 만나야 하잖아요. 노동자의 어머니잖아요."
하지만 갈 수 없다.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설 수도 없다. 아니 주무시고만 있을 어머니를 볼 용기가 없다. 아니 볼 수가 없다. 잠든 시대를 깨운 어머니가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엄마, 일어나란 말이야. 엄마 일어나면 머리도 단정히 깎고 옷도 예쁘게 입고, 건들건들 돌아다니지도 않고, '건달이'처럼 살지 않을게. 엄마 깨어나지 않으면 안 볼 거야. 엄마 일어나! 깨어나! 엄마 말처럼 독재 시절보다 지독한 이 세상 깨우려면 엄마가 눈 번쩍 떠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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