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한 지 2년 만에 백혈병에 걸려 23살에 숨진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 등 5명은 "삼성 반도체를 만들다가 발암물질에 노출돼 백혈병에 걸렸다"며 2007~2008년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 등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이에 불복한 원고 측은 지난해 1월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이 제기된 지 1년 반 만인 23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재판장 진창수)는 "명백하게 백혈병 유발 요인을 입증하지 못하더라도 유해한 화학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백혈병이 발병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황상기 씨 등 2명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故 황유미 씨와 故 이숙영 씨에 대해 "반도체 공장에서 세척작업을 해서 유해 화학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도금 공정 등에서 일했던 나머지 원고 3명에 대해서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봤다.
▲ 23일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받은 직후 삼성 반도체 노동자 및 유가족들이 서울행정법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프레시안(김다솜) |
"노동자가 명백한 입증 책임지기란 불가능"
반도체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시민단체 반올림은 "업무관련성을 의학적이고 자연과학적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정황상 추정해 판단할 수 있다면 직업병으로 인정하는 기존 판례의 취지를 보더라도 3명의 삼성백혈병 노동자들에게 기각 판정을 한 것은 산재보험제도의 취지를 벗어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이번 판결을 계기로 산업재해를 인정하는 방식을 '노동자 입증 책임'에서 '회사 입증 책임'으로 바꿔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종란 노무사는 "회사 측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화학물질 정보 등 관련 증거를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 노동자가 어떤 물질에 얼마만큼 노출돼 암에 걸렸는지 입증하라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기준"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러한 잘못된 기준 때문에 현재 한국의 직업성 암에 대한 산재 인정률이 1%에도 못 미친다"고 지적했다.
이 노무사는 "아픈 노동자에게 입증책임을 부여할 것이 아니라, 기업과 정부가 해당 질병이 개인 질병이라는 입증을 하지 못하면 산재로 인정하고 보상하는 방식으로 산재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고 측은 공정한 조사 방식을 촉구하기도 했다. 황상기 씨는 "삼성은 역학조사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공장의 라인을 고치고, 삼성이 들어오라는 날짜에 삼성과 공단 사람만 들여보내 조사했다"며 "피해자 측 조사단을 배제한 역학조사는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는 어떤 유해 물질은 조사조차 하지 않았고, 다른 유해 물질은 영업비밀이라고 발표도 안 했다"며 "역학조사는 무효다. 제대로 다시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원고 3명 기각…"끝까지 싸울 것"
기각 판정을 받은 원고 측은 즉각 항소할 예정이다. 故 황민웅 씨의 아내 정애정 씨는 "(승소한) 황유미 씨는 3라인에서 일했고, 남편은 1, 5라인 설비엔지니어였다"며 "반도체 생산 현장의 섭리를 안다면 라인이 다르다고 작업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걸 알 것"이라고 말했다. 정 씨는 "1심에서 황유미 씨가 승소한 것에 대해 같은 환경에서 일했던 설비엔지니어 남편의 사례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봤다"며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싸우며 2심을 준비하겠다"고 덧붙였다.
황상기 씨는 "우리가 백혈병 환자 5명을 지목하자 삼성은 맞는다고 인정했지만, 유해한 화학물질과 방사능은 안 썼다고 주장했다"며 "그런데 삼성은 환자가 늘어나면 늘어난 환자 수는 인정하면서 산재는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삼성에서 일했다가) 암이나 희귀병에 걸린 사람만 지금 130여 명이 있고, 그 중 47명이 사망했다"며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 故 황유미 씨와 아버지 황상기 씨. ⓒ반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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