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가수 사이먼과 가펑클이 부른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란 노래를 좋아한다.
가사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당신이 지치고,
초라해지고,
눈물이 고일 때,
눈물을 닦아드릴 게요
난 당신 편입니다."
기똥차다.
확실하게 편을 드니까
이 노래에 '편이 되어준다'란 말이 두 번 나온다.
1. 난 당신 편이다 (I'm on your side)
2. 당신 편이 되어주겠다 (I'll take your part)
왜 편을 들까?
한국에서는 '편을 든다'는 말이 상당히 안 좋은 의미로 쓰일 때가 많은데, 서양 사람들은 어찌 이렇게 당당하게 쓸까?
서양 인본주의에 스며든 예수의 가르침 때문이다.
예수는 약자의 편이 아니었나?
다시, 한국의 현실로 돌아와서,
노동자센터에 근무하면서 노동자 편을 들지 않고, 사장님과 노동자 사이의 중재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있다.
이게 바른 태도일까?
예를 들어 노동자가 체불임금 2백만 원을 못 받았다고 하자.
노동자는
"내가 일한 대가는 다 받아야 해요."
호소하고, 사장님은
"회사 사정이 어려워 줄 수 없으니 맘대로 해."
하고 버티면, 이런 중재자는
"자, 자, 한 발씩 양보해요. 노동자도 조금 양보하고, 사장님도 조금 양보하고, 딱 중간선 백만 원으로 합시다. 됐죠?"
하고는 큰일이나 한 듯 흡족해한다.
2백만 원을 받아주어야지, 왜 백만 원만 받아주나? 최저임금인데!
이건 노동자센터 직원으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다.
노동자센터 직원은 노동자 편을 들어야 한다.
전경련이나 경영자총협회나 중소기업중앙회 사람들이 사업주 편을 들 듯이.
의외로 NGO에 이런 어정쩡한 중재자가 많다.
그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은 한 마디다.
"약자 편을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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