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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양심선언? "부자로 죽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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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양심선언? "부자로 죽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

[프레시안 books] <슈퍼 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

가끔 공상을 한다. 시간을 마음대로 되돌릴 수 있다면? 지능지수(IQ)가 200쯤 된다면? 내게만 하루가 48시간이라면?

어릴 때는 이런 공상을 나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다들 이런 공상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정답도 이미 마련돼 있다. 학생에겐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해!', 직장인에겐 '엉뚱한 생각 말고, 일해!'.

하지만 이런 정답이 별 효과가 없다는 것 역시 누구나 안다. 인간은 늘 실수하기 마련이고, 후회는 나이와 비례해서 쌓인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시간은, 하고 싶은 일만 하기에도 부족하다. 그런데 하물며 해야 하는 일까지 챙기려면, 결국 방법은 공상뿐이다. 상상 속에서 별의 별 짓을 다 해보며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다. 상상할 권리는 모두에게 평등하다.

"세상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여기, 기발한 공상이 있다. 팔순에 가까운 노인의 공상이다. 경력도 비범하다. 소비자 운동의 씨앗을 뿌렸고, 네 차례나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다시 대중 앞에서 열변을 토하기엔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버렸다. 결국 방법은 공상이다. 벌여놓은 일이 많으면, 회한도 짙은 법. 그래서 공상 역시 진하다.

청년 변호사 시절, 거대 자동차 업체 제너럴모터스(GM)와 맞장을 떴고, 그래서 GM 사장의 공개 사과를 받아냈던 랠프 네이더의 이야기다. 네이더가 혼자 삭이고 삭인 묵직한 공상을 책으로 펴냈다. <슈퍼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강경미 옮김, 꾸리에 펴냄)라는 제목이다.

▲ <슈퍼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랠프 네이더 지음, 강경미 옮김, 꾸리에 펴냄). ⓒ꾸리에
미국에선 순자산이 280억 원 이상인 사람을 '슈퍼리치(Superrich)'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슈퍼리치'들은 그보다 몇 단계 위다.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 테드 터너 등이 주인공이다. 경제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도 익숙한 이름들이다. 전 세계 부자들의 서열을 매길 때면, 늘 맨 앞에 나오는 이름들이니까.

팔순 노인 네이더의 공상은, 시간을 뒤로 되감는 것으로 시작한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를 휩쓸었던 지난 2005년 9월이다. 멕시코의 재벌 카를로스 슬림,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에 이어 세계 3위의 부자인 워런 버핏은 텔레비전에 중계된 뉴올리언스의 참극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물 위에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끔찍한 모습이 그저 자연재해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는 더 큰 충격을 받는다. 평소엔 재난을 예방하고, 실제로 재난이 닥쳤을 때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는 계속 뒷짐만 지고 있었던 게다.

"세상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가난한 나라도 사망자들을 신속히 매장하는데, 미국 한복판 도시 하수에 며칠째 시신이 떠다니고 시체가 썩도록 방치하다니…"

워런 버핏은 텔레비전을 끄고 재해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당시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자신과 비슷한 '슈퍼리치'들을 불러 모은다. (혹시 헷갈릴 수 있는 독자들을 위해 다시 확인. 2005년 9월, 워런 버핏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기 나온 내용은, 오로지 네이더의 공상일 뿐이다.)

착한 부자들의 유쾌한 반란?

2006년 1월, 버핏은 하와이 마우이 섬의 한 호텔을 통째로 빌린다. 그리고 미디어 재벌인 테드 터너, 빌 게이츠의 아버지인 윌리엄 게이츠 시니어, '역사상 최고의 펀드 매니저'로 꼽히는 조지 소로스 등 17명의 '슈퍼리치'들을 초대한다.

버핏은 그곳에 모인 '슈퍼리치'들에게 빈곤과 부패, 지구 온난화 등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해 힘을 합치자고 호소한다. '슈퍼리치'들은 여기에 동의하고, 미국을 송두리째 바꾸기 위한 '대전환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불평등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금권 정치를 타파하고, 경제의 하부 구조를 강화하기 위한 프로젝트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 책의 도입부에선 사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받는다. 워런 버핏이나, 테드 터너, 조지 소로스가 그토록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들은 애초 '슈퍼리치'가 될 수 없었을 게다. 더구나 책 속 주인공들이 성토하듯, 미국이 그토록 불합리하고 부패한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여린 마음을 지닌 이들은, 합리적이고 투명한 사회에서도 '슈퍼리치'는 되기 힘들다. 하물며 금권 정치가 판치는 사회에서라면, 꿈도 못 꾼다.

하지만, 이 책은 어차피 팔순 노인의 공상. 일단 그러려니 하고 책장을 넘기다 보면, 중반쯤에서 탄력이 붙는다. 미국 보험 업계의 어두운 이면을 고발하는, 책의 중반부에 이르면, 책장이 휙휙 넘어간다. GM 사장의 공개 사과를 받아냈던 네이더의 근성과 통찰력은 녹슬지 않았다.

이 책은 해피엔딩이다. 착한 부자들은 뜻을 이룬다. 최저임금을 보장하고, 모든 시민을 위한 국민건강보험 법안을 도입하며,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리는 세제 개혁안을 통과시킨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갖고 있는 부(富)가 유감없이 힘을 발휘한다. 예컨대 이들의 입장을 공정하게 알리기 위해 방송국을 인수하는 식이다. "우리는 부자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부자를 계속 배출할 수 있는 견고한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려는 것"이라는 윌리엄 게이츠 시니어(책 속 주인공 중 한 명, 빌 게이츠의 아버지)의 꿈은 이뤄진다.

워런 버핏 "부자로 죽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

이 책은 온전히 공상이지만, 사이사이에 팩트(사실)가 곁들여져 있다. 그래서 실감이 난다. 주인공인 워런 버핏은 현실에서도 부시 행정부의 감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부자로 죽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 부시 정부의 감세 정책 때문에 내 사무실의 전화 받는 직원과 청소부들의 과세율이 나보다 높아졌다. 이 역시 수치스러운 일 아닌가. 나 같은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가난한 자들에게는 감세를, 이것이 부자인 내가 미국 정부에 보내는 긴급한 요청이다."

워런 버핏이 '실제로' 한 말이다. 그는 또 빌 게이츠와 함께 '기부 서약(Giving Pledge)' 캠페인을 주도했다. 죽기 전에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서약이다. 40명에 가까운 '수퍼리치'들이 이런 서약에 동참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워런 버핏은 좌파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망하지 않는다'라는 믿음이 그의 투자 성공 비결이었다. 좌파들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위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저평가 우량주에 투자했다. 한마디로, 그의 생각은 '부자가 될 기회'를 독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씨암탉을 잡아먹으면 혼자서 잠깐 배부른 것으로 끝나지만, 적당히 모이를 줘서 살려두면 여러 사람이 오래 배를 불릴 수 있다. 워런 버핏의 실천은, 비유하자면 씨암탉이 계속 달걀을 낳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워런 버핏의 이런 면모를 떠올려보면, 네이더의 공상이 아주 터무니없게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전쟁 영웅 아이젠하워가 국방 예산을 깎고 '군산 복합체'의 위험을 경고했던 일을 떠올려 보면, 더욱 그렇다. 피도 눈물도 없던 자본가가 말년에 착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엉뚱한 생각 말고, 투표 해!"

그러나 이 책은 결국 공상이다. 또 남의 나라 이야기다. 한국 최고 부자인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는 워런 버핏이 아니다. 몹시 내성적인 그가 오랜만에 기자들 앞에 섰을 때 한 이야기는, '대기업이 협력 업체와 이익을 나눠야 한다는 주장은 공산주의적 발상'이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부자들도 별로 다르지 않다. 이 책에 나온 '슈퍼리치'들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공상은 그저 공상으로 즐기는 게 옳다. 계속 공상 속에만 머무르려 한다면, 결국 이 글 도입부의 '정답'을 다시 꺼낼 수 밖에 없다. '엉뚱한 생각 말고, 투표 해!'.

그렇다. 적어도 이 땅에는 아직 착한 '슈퍼리치'가 없다. 씨암탉이라도 잡아먹겠다는, 게걸스런 재벌들이 판칠 따름이다.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세상을 조금 더 살맛나게 만들어 줄 '슈퍼리치'가 없다면, 보통 사람들이 할 일은 분명하다. '비판의 안경'을 끼고 신문을 꼼꼼히 읽는 것, 그리고 가족과 함께 투표소로 향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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