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세계화가 촉진되어 자본의 해외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청계천 일대 의류산업도 한동안 침체되었으나, 초대형 의류 상가빌딩들이 세워지면서 오히려 세계적인 의류단지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도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청계천 의류시장을 가본 사람이라면 근래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여행객들이 한국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으로 동대문 의류시장을 뽑는다는 통계에 그리 놀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 인간을 감동시키는 것은 물질문명의 발달사가 아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뒷이야기가 진정한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경제는 흥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지만 정신문화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남미에서 만난 영웅…청계천의 영웅은?
무더웠던 올 여름, 남미로 장기 여행을 다녀왔다. 일제강점기에만 해도 수많은 조선인들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찾아갔던 머나 먼 대륙,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보다 잘 살았던 남미 국가들의 현실은 별로 밝지 못했다. 어디 가나 버려진 빌딩이며 지저분한 낙서들, 매연을 뿌리는 낡은 차들, 유령처럼 출몰하는 소매치기와 도둑들은 풍요롭고 안정된 나라에서 온 동양인들을 겁주기에 충분했다.
남미를 보고 감동한 것은 그들이 한 때 잘살았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현재의 어려운 삶을 보면서 한국의 부귀영화도 지난 이십 년 정도의 호황일 뿐, 언제든지 저렇게 몰락할 수 있겠다는 걱정이 들뿐이었다. 남미에 살아가는 사람들, 또는 그곳을 찾는 외국인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경제의 흥망사가 아니었다. 그 속에서 어떤 인간들이 어떻게 올바르게 살아가려 애썼는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이 지나간 페루, 칠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브라질을 막론하고 사람의 형상을 본 따 만든 기념품은 하나같이 혁명가들을 소재로 하고 있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남미 민중을 위해 생애를 바친 사람들만이 초상으로 살아남았고, 관광객들 역시 그런 사람들을 찾는다 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였다.
어느 도시에서나 남미 해방의 선구자이던 산 마르틴이며 볼리바르 같은 영웅들의 동상이 가장 중심지에 서있었다. 흉상이나 동판, 열쇠고리 등에 새겨진 인물들은 하나같이 체 게바라, 아옌데, 페론과 에바 부부, 파블로 네루다 등 가난한 민중을 위해 싸운 이들이었다. 아르헨티나 탱고의 상징인 카를로스 가르델이나 존 레논 같은 민중적인 가수들의 초상 역시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청계천을 찾는 내국인 또는 외국인들에게 진정 감동을 주고 또 교훈이 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일제강점기만 해도 청계천에 흐르는 물이 야채를 씻어 먹을 정도로 깨끗했는데 의류공장들이 들어서면서 똥물천지가 되자 박정희가 이를 시멘트로 덮었다가 이명박이 이를 뜯어내고 국적도 역사도 알 수 없는 인공하천을 만들어 놓고 지하수를 뽑아 올려 기형적인 실개천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도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어렵게 살면서도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다가 끝내 생명까지 바친, 한 아름다운 청년의 이야기일까?
소설보다 이타적이었던 전태일
때로 현실은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다. 수년 전 청계피복노동조합의 역사를 소설처럼 그린 <청계 내 청춘>을 썼다. 전태일을 직접 알았던 분들을 포함해 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증언으로 이뤄진 긴 보고문이었다. 그만큼 여러 사람에게 먼저 읽혀본 다음 최종수정을 했다. 그런데 초고를 읽어 본 한 젊은 소설가의 반응이 내게 충격을 주었다.
'전태일의 모습이 비사실적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동물이다. 어떻게 이렇게 이타적인 인간이 있을 수 있는가? 너무 영웅화시키는 것 같다.'
놀래서 다시 읽어보았다. 그가 지적한 부분들은 분명 믿을 수 있는 증언을 토대로 한 글들이었다.
어린 전태일이 배를 쫄쫄 굶은 채 동생들과 세검정에 놀러갔다 오는 길에 당시로선 큰 돈인 10원을 주었는데 동생들은 당연히 맛있는 걸 사먹자고 칭얼댔으나 전태일은 그대로 파출소에 갖다 준다. 겨울에 거지를 만나 자기 옷을 벗어주고 속옷 바람으로 달려 왔다던가, 함께 일하는 시다들에게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고 먼 길을 걸어왔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중에는 전태일이 일없는 저녁이면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자기가 창작한 동화를 들려주거나 스스로 바보 역할을 하는 연극을 보여주어 사람들을 웃고 울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세상에는 분명 전태일 같은 사람이 존재한다. 천 명 중에 하나, 만 명 중에 한 명일지라도 자기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고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나아가 십만 명 중 하나, 백만 명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의 생명까지 바쳐 타인의 행복과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한다. 이런 이타적인 사람들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세상의 빛이요 희망이다.
모든 사람이 그들처럼 살아갈 수도 없고 강요할 수도 없지만, 대다수의 양심적인 사람들은 그런 이타적인 영혼들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살아간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그런 인간에 대한 존경심을 갖는 것만도 소중한 일이 된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기 때문에 그런 걸 표현해야 현실감 있는 글이 된다고 믿는 후배작가의 말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완전히 옳지는 않다.
▲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 청계천 버들다리 위에서 열린 전태일다리 이름짓기 범국민 캠페인 '808행동' 선포식에서 영화배우 박철민이 릴레이 캠페인을 하고 있다. ⓒ뉴시스 |
평화시장 앞 다리를 '전태일 다리'로
전태일이 청계천 일대 2만7000여 의류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스스로를 불사른 지 40년, 시대의 불꽃이 밝혀진 자리에 만들어진 다리에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붙이자는 것은 결코 무리한 요구도, 비현실적인 요구도 아니다.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삶의 등불이 되어주고,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에게 세계적인 감동을 줄 수 있는 매우 현실적인 방안이다.
우리나라에는 큰일을 한 왕이나 고위 관리로서 중요한 일을 해낸 선조들의 동상이나 거리명은 널려있다. 그 중에도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들이 없지 않아 나름대로 감동을 준다. 하지만 이미 손에 쥔 권력을 잘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다른 권력자들이 무능하고 부패하다보니 두드러져 보이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하라는 것은 한도가 있다. 설사 내국인은 존경할지 몰라도 외국인의 관심을 끌 수는 없다.
한국에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 깊은 곳으로 꼽히고 있는 동대문거리에 세계의 누구라도 감동받을 수밖에 없는 전태일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은 뜻 깊은 일일 뿐 아니라 매우 실용적인 이익도 적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줄 알았더니 꽤 잘 살더라하는 따위의 빈정댐이 아닌, 진실로 이 나라에는 이런 훌륭한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감동을 주는 나라가 되어보지 않겠는가? 청계천 평화시장 앞의 다리를 전태일 다리로 명명하기를 촉구한다.
끝으로, 이 일은 서울시 또는 정부당국의 시혜로만 이뤄질 일이 아니다. 인간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동참해 이뤄나가야 할 일이다. 전태일 다리 명명을 위한 일인시위와 서명운동에 더 많은 동참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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