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백제의 도읍이 아니어도 서울은 삼국의 격전지로서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구리시가 '고구려의 도시'를 내걸고, 하남시와 송파구가 '백제의 도시'를 내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고대사의 흔적은 아직도 발굴 중에 있으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더 발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료들을 이용해서 고대사를 다시 정리하는 것은 더욱 더 오랜 시간과 큰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지금의 서울은 고대의 서울과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의 서울이 그것이다. 조선은 백악, 낙산, 남산, 인왕의 4개 산에 18km 길이의 도성을 쌓아서 서울을 만들었다. 도성 안의 전체 면적은 60㎢ 정도이지만 실제 도심 면적은 16㎢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의 서울은 606㎢로 넓어졌으니 도성과 도심은 아주 작은 곳이다. 그러나 도성과 도심이야말로 서울의 본질이다. 따라서 우리는 도성과 도심을 잘 지켜야 한다.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은 여러 가지 때문에 실망하고 놀란다고 한다. 택시 요금을 비롯한 각종 바가지 요금뿐만이 아니다. 외국인들을 더욱 더 놀라게 하는 것은 서울의 척박한 공간문화이다. 곳곳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수많은 간판들에 질리고, 밤하늘에 둥둥 떠 있는 수많은 붉은 십자가들에 놀라고, 그리고 600년 역사를 자랑하지만 도무지 그 역사를 실감할 수 없는 데 실망한다.
서울은 무려 500년 동안이나 그 모습을 지켜왔다. 태조의 뒤를 이어 세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석벽으로 완성된 도성은 그 물리적 경계였으며, 세계적으로 드문 성곽 도시 서울은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울려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공간 문화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울의 모습은 일제의 침략과 함께 마구 파괴되기 시작했다. 일제는 문화 침략의 차원에서 서울을 엉망으로 망가뜨렸다.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시작된 근대 서울 100년의 역사는 서울 파괴 100년의 역사였다. 조선처럼 높은 문화를 가진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한 예는 없다고 한다. 서울처럼 500년 역사를 간직한 왕도가 100년 동안 줄곧 파괴된 예도 아마 없을 것이다. 서울의 도심은 600년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서 정말 소중히 다뤄져야 한다. 이제라도 서울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서울의 도심에는 조선 500년, 일제 36년, 해방과 독재 44년 등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세 가지 역사의 층은 모두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서울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세 가지 역사의 층을 모두 잘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서 이러한 서울의 역사가 모두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이 바로 서울시라는 점에 더욱 더 큰 문제가 있다.
이명박 전 시장의 '청계천 복원 사업'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청계천은 태조에서 영조에 걸쳐 준설과 건설을 반복한 조선의 대표적 토목구조물이었다. 차도를 뜯어내자 그 아래서 영조 때에 건설된 수백 미터 길이의 호안석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서울시는 이 귀하디 귀한 유적을 모두 없애 버렸다. 이 때문에 '청계천 복원 사업'은 사실상 '청계천 개발 사업'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런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이명박 전 시장은 서울의 도심을 '역사 문화 도시'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렇게 해서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겠다는 계획도 들려왔다. 그러자면 서울의 도심이 간직하고 있는 세 가지 역사의 층을 모두 잘 보존하고 복원해야 한다. 그런데 서울시의 정책은 이명박 전 시장 때처럼 여전히 신개발주의에 휘둘리고 있다. 동대문 운동장을 없애겠다더니 이제는 서울시 청사마저 없애겠다고 한다.
동대문 운동장은 한국의 근대 운동사를 간직하고 있는 역사유적이다. 이곳을 없애고 희한한 현대 건축물을 짓겠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또 다른 모독이다. 더욱이 이를 위해 구의 정수장을 없애겠다는 것은 역사의 파괴를 거듭하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 와중에 무모한 초고층 신청사 계획을 추진하던 서울시가 아예 현 청사를 전면부만 남기고 완전히 없애겠다고 나섰다.
일제 36년의 역사도 우리의 귀중한 역사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역사는 반드시 복수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처참한 복수를 당하지 않겠는가? 1993년에 정치적 이유로 정부는 식민지 총독부 청사를 파괴해 없앴고, 1998년에 경제적 이유로 삼성재벌은 화신백화점을 파괴해 없앴다. 일제 36년의 역사를 상징하는 국보급 건물이 두 채나 1990년대에 사라진 것이다. 이제는 일제 36년의 역사를 상징하는 건물로 남은 것은 서울시 현 청사밖에 없다.
오세훈 시장은 환경운동연합의 운영위원으로 환경운동에 참여했던 것을 널리 자랑했다. 오 시장의 시장직 인수위원장을 최열 환경재단 대표가 맡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 시장의 시정은 '한양주택' 철거에서 잘 드러났듯이 환경운동과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제 여기에 동대문 운동장, 구의정수장, 그리고 서울시 현 청사 등 근대의 유적과 유물을 없애는 '역사 파괴 시장'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판이다.
서울시의 시정 방향은 '불도저 시장'으로 악명을 떨친 박정희 시대의 김현옥 시장 때에 비해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최근에 들어와 자연, 역사, 문화를 내세우게 된 것을 큰 발전이 이루어진 것처럼 선전하고 있지만, 이명박 전 시장의 시정에서 잘 드러났듯이 그것은 사실 자연, 역사, 문화를 내세운 신개발주의에 가깝다. 서울시의 시정방향은 여전히 '역사 지키기'가 아니라 '역사 없애기'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저 일제와 독재 시대처럼.
우리의 역사는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우리만의 문화 자산이다. 일찍이 시인 김수영이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에 맞서서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거대한 뿌리'라고 일갈했듯이, 우리의 역사를 소중히 지키고 다듬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공간 정책이요 문화 정책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서울시도 제대로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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