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난 2005년 5월 김 씨가 생명을 잃은 뒤, 다행히 '한국인 원폭 피해자 진상 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그러나 이 특별법은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국가인권위원회 등의 무관심으로 방치돼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을 김형율 씨와 연대했던 강주성 건강세상네트워크 대표가 고발해왔다. <편집자>
1945년, 학교를 가면서 담 밑을 지나던 아이들이 학교 담장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그저 선 채로 녹아버렸고, 히로시마 도심으로 흐르는 강물엔 폐수가 흘러 물 위로 떠오른 죽은 고기만큼이나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쳐 박혀 죽었다.
그나마 산 사람들은 전차와 선로가 녹아내릴 정도로 강력한 고열에 피부가 죽죽 녹아내려서 죽음의 도시에서 떠도는 좀비들처럼 도시를 걸어 다녔다. 살려 달라고 살려 달라고 울부짖으며 그렇게 죽어갔다. 폭탄 단 한방으로 도시의 거의 모든 건물이 녹아내리거나 날아가 버렸다. 62년 전 8월 6일 아침 8시 15분 히로시마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그 날을 잊어버린 건 일본이 아니라 우리들이었다. 조선인 피폭자 약 7만 명 중 이제 2500여 명인 단 3% 정도만이 살아남아 있는 이 현실이 그나마 조선인 원폭 피해의 역사를 증언할 수 있는 생존자들이다. 이들은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거나 단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피폭 이후, 다시 돌아온 해방 조국에서도 끝없는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원인도 모르는 질병으로 신음했고, 결혼과 취업도 쉽지 않았다. 배우지 못한 것이 자손들에게도 이어졌고, 어누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던 그들은 일본에게도, 자신의 조국에게도, 살아가는 터전에서도 버림 받고 죽어갔다.
그러나 이게 피폭을 당한 그들의 끝이 아니었다. 그들의 2세와 3세, 아니 급기야는 4세에서도 원폭의 방사능이 여전히 삶을 뒤덮고 있었다. 1세들조차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에 그 후손들은 이름도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을지언정 아예 입도 뻥끗 못했다. 다행히 후유증을 앓지 않는 다른 가족의 결혼, 취업을 위해 자신의 인권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아프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것도 원폭의 피해가 대물림되어 아프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면서…. 아주 왜소한 키에 폐 기능이 30% 밖에 안 돼 계단도 못 오르고 헉헉거리는 그가 역사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 대고 원폭의 문제를 인권과 평화의 문제로 알렸다.
그는 이 문제를 단지 원폭 피해자 1세의 문제만이 아니라 2세, 3세로 이어지는 대물림의 고통으로 역사에 기록했다. 그는 원폭 피해자 문제를 인권의 문제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제기했다. 또 이 문제의 사회적 해결을 위해 2005년 '원폭 피해자 진상 규명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을 국회를 통해 발의시켰다.
고 김형율. 그가 죽은 지 2년이 넘었다. 그리고 8월 6일은 매년 어김없이 다시 찾아왔다.
원폭 피해자 외면하는 '참여정부'
지금은 어떤가? 원폭 피해자를 위한 권고안을 내겠다던 국가인권위원회의 담당 사무관은 내년, 다음 달, 다음 주, 며칠 후를 연발하더니 급기야 내일 모레를 말하다가 이제는 입을 닫아버렸다. 그동안 1세 피폭자들은 수백 명이 죽어갔고, 김형율을 위시한 아픈 2세와 3세들도 죽어갔다.
보건복지부 역시 마찬가지다. 원폭의 영향이 후손으로 이어진다는 '의학적 근거'가 아직 없다는 이유를 들이대며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 의학적 근거 타령은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고자 일본이 되뇌던 말이다. 복지부가 정부기관이라면 왜 원폭 피해자 2세의 유병률이 일반 사람보다 무려 100배 가까이 높은지 일본에게 물어볼 일이다.
복지부는 원폭의 대물림이 아니라면 그 현상의 의학적 근거를 대보라는 식의 얘기를 우리 피폭자에게 하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다시 물어보자. 원폭 피해자 2세의 유병률이 왜 일반 사람들보다 100배나 높은가? 그게 원폭의 문제가 아니란 것을 의학적으로 증명해보라.
증명하지 못하면 인권위원회는 정책 권고안을 즉각 내고, 복지부는 그들을 살릴 수 있는 대안을 내놓아라. 이도저도 못하겠다면 '참여정부' 간판을 뗄 일이고, 국가인권위원회는 간판에서 '인권'을 당장 뗄 일이다. 국민을 속이는 그따위 간판보다 사지에서 매일 죽음의 고통 속에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물겨운 생명이 더 소중하다.
故 김형율 씨 지난 2005년 5월 29일 세상을 등진 고 김형율 씨는 1995년 자신이 '선천성 면역글로블린 결핍증'이라는 희귀 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는다. 그는 이것이 히로시마에서 원폭 방사능에 노출돼 평생 후유증을 앓아온 어머니로부터 유전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된 후, 2002년 3월 국내 최초로 자신이 원폭 피해자 2세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관련 기사 : "원폭 피해자 2세 '대변자' 김형율 씨 타계", "원폭 피해자들, '한국 국적이 원망스럽다'") 김형율 씨는 수년간 일본, 한국 정부를 상대로 대책을 촉구해 결국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에 나서고, 국회에서는 '원폭 피해자 진상 규명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안)'이 발의된다. 그러나 김 씨가 갑작스럽게 숨을 거둔 후 현재까지 이 법은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관련 기사 : "61년 전의 원폭 피해는 현재 진행형") 지난 5월 27일 부산민주공원 소극장에서는 김 씨의 2주기 기념식이 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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