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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대 위에 선 의사들…평가의 칼은 누구 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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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시험대 위에 선 의사들…평가의 칼은 누구 손에?

이형기의 학이사(學而思) 의ㆍ과학 <5> 진료 평가

"개선을 원한다면,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측정하라." 국내 제약회사의 의학부 임원으로 재직할 당시, 어떤 경영 세미나에서 들었던 경구다.
  
  배웠으면 실천을 해야 내 것이 되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담당하고 있는 업무에 이 경구를 적용해 보기로 했다. 제약회사의 의학부에서 하는 일이 여럿 있지만, 임상시험을 모니터링하는 것은 그 중에서도 비중이 큰 업무에 속한다. 모니터링은 연구자(의사)가 임상시험계획서를 위반하지 않았고, 임상시험이 계획한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모니터링이 끝나면 그 결과를 기록으로 남겨야 임상시험의 '품질'을 보증할 수 있다. 품질은 임상시험에서 얻어진 자료의 신뢰성을 의미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어떤 일의 결과를 문서로 정리하는 일에 게으르다. 따라서 모니터링을 실시한 날로부터 실제 보고서가 작성된 날까지 걸린 기간은 임상시험의 품질을 반영하는 한 지표가 될 수 있다.
  
  나는 이 기간을 측정해 보기로 했다. 직원들에게 모니터링 이후 실제 보고서가 작성되기까지 걸린 기간을 측정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우선, 보고서 작성에 소요된 기간이 대폭 줄었다. 더 생생한 기억이 남아 있을 때 기록으로 남기니까 당연히 보고서의 수준도 올라갔다. "측정하면 개선된다"는 말은 과연 사실이었다.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온다
  
  앞에서 든 예처럼, 측정은 언제나 '평가'를 염두에 둔다. 측정이 객관적이고, 그 대상이 타당하며, 무엇보다 과정이 투명할 때, 측정 결과에 근거한 평가를 수용할 수 있다. 보고서 작성에 걸린 일수는 누가 측정하더라도 항상 같게 나온다(객관성). 또 모니터링이 끝난 다음에 빨리 보고서를 작성할수록 업무의 충실도가 높아진다는 것에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타당성). 더욱이 무엇을 측정할 것인지 직원들에게 사전에 분명히 알려 주고 동의를 구함으로써 오해의 여지를 제거했다(투명성). 따라서 이러한 측정 결과에 근거해 업무의 완결성을 평가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 직원은 없었다.
  
  하지만, 객관성, 타당성, 투명성 중 어느 하나라도 문제가 있으면, 측정 및 평가 결과를 수용하기 힘들다. <워싱턴포스트> 7월 25일자에는 이처럼 문제가 많은 측정 방법에 근거해 평가를 받았던 미국 의사들이 반발한 이야기가 실렸다(Doctors Rated but Can't Get a Second Opinion).
  
  요약하자면 이렇다. 어떤 의사가 갑자기 1등급에서 2등급으로 강등됐다는 통보를 의료보험회사로부터 받았다. 앞으로 이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환자들이 내야 하는 자기부담금(co-payment)이 두 배로 올랐고, 환자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당연히, 의사의 명성은 손상을 입었다. 아울러, 다른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들이 늘어 날 것이므로 경제적 손실도 뒤따를 것이다.
  
  그런데, 이 의사가 1등급에서 2등급으로 강등된 이유가 황당하다. 자신이 처방을 내린 유방암 또는 자궁암 검사를 환자들이 받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억지로 물까지 먹이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러니, 아무리 환자에게 필요한 예방 검사를 처방한들 환자가 따라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남의 실수가 내 잘못으로 귀결된다면, 측정이 아무리 객관적이고 투명하더라도 평가의 타당성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처럼 황당한 사례가 위에서 예로 든 의사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을 전망이다. 점점 더 많은 의료보험회사들이 비슷한 평가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국의 의료보험은 민간영리기업에게 개방돼 있고, 각 의료보험회사마다 별도의 평가 시스템을 운영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의료보험회사에게는 1등급이라고 평가를 받은 의사가 다른 의료보험회사에서는 2등급으로 강등될 수도 있다. 심한 경우에는, 아예 해당 회사의 의료보험 가입자에게 진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는 무능한 의사로 평가돼 쫓겨나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러한 평가 시스템의 등장은, 진료 자료들이 전산화됨으로써 '데이터마이닝(data mining)'이라고 불리는 정보 추출 기술을 적용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하지만, 모든 컴퓨터 분석 결과가 그렇듯, 데이터마이닝에는 항상 '잡입잡출(雜入雜出, garbage-in garbage-out)'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온다'는 말 뜻 그대로, 입력 자료의 신뢰성이 의심되면 그 분석 결과의 타당성을 보장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실제로 <워싱턴포스트>에는 자궁을 들어낸 환자에게 자궁암 예방 검사를 처방하지 않아서 순위가 내려간 의사, 자궁이 없는데 무슨 자궁암 검사(?), 양측 유방전(全) 절제술을 받은 환자에게 유방암 검사를 권고하지 않아서 점수가 깎인 의사의 예들이 추가로 소개됐다. 모두 잡입잡출의 위험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우스꽝스러운 사례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데이터마이닝에 의존하는 평가 시스템에서 일일이 개개 환자의 특수성을 고려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진료 지침처럼 일반적 대원칙에 그쳐야 할 권고 사항이라든가, 의료비처럼 진료의 질과는 본질적으로 연관성이 없는 지표에 기대 진료의 적정성을 평가한다는 것이 이들 시스템의 한계다.
  
  예를 들어, 중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는 의료비가 적게 드는 경증의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보다 낮은 등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평가를 받으면 어느 의사라도 치료하기 쉬운 환자만을 상대하려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말기 암 환자를 방문해 진료 이외에도 정신적ㆍ정서적 도움을 제공한 의사의 행위에는 환자에 대한 소중한 배려와 서비스가 담겨 있지만, 이것은 전산화된 진료 자료에 포함될 수 없기 때문에 평가 결과에 반영되지 않는다.
  
  자신의 업무 수행 능력 평가에 도움이 안 되는 의료 서비스를 선뜻 환자에게 제공하려 할 의사는 많지 않다. 지침만을 준수하도록 요구받는 의사에게 따뜻한 인간미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결국 한계가 있는 평가 시스템의 폐해는 고스란히 환자가 떠안아야 할 몫이다.
  
  진료 평가, 피할 일 아니지만 제대로 해야
  
  또 다른 쟁점은 평가의 '주체'에 관한 것이다. 과연 의료보험회사가 의사의 진료 행위에 등급을 매길 만한 자격이 있는가? 아니, 자격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누가 이들에게 평가 권한을 부여했는가? 나중에 알려졌지만, 의료보험회사들은 사전에 의사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이렇게 측정과 평가의 투명성이 결여됐기 때문에 몇몇 의료보험회사들은 피소됐고, 어떤 주에서는 불공정 행위로 행정부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평가 주체가 쟁점으로 부각되는 이유는, 다른 영리기업과 마찬가지로 의료보험회사의 일차적 관심이 '이윤'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요컨대, 아무리 겉으로는 환자의 '건강'을 내세우더라도 이들의 속셈은 결국 의료비 지출을 줄여 더 많은 이윤을 남기겠다는 것이다. 물론, 영리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목적 달성을 위해 한계가 뻔한 평가 시스템으로 의료계와 환자 사이를 이간질하고, 결국 상호불신을 조장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거간꾼(middle man)에 불과한 의료보험회사들의 배만 채워 주고, 이들이 의료계와 환자 위에 군림하는 기형적 구조를 조성하는 주범이 바로 평가 시스템'이라는 비판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선 의사들은 더 이상 '감히 누가 내 진료를 평가하느냐'는 식의 아집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다못해 싼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꼼꼼히 가격 비교하고, 인터넷으로 사용자들의 평가를 일일이 검토하는 세상이다. 진료 서비스라고 예외일 수 없다.
  
  피하지 못할 바에야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의학적으로 근거가 없거나 영리 위주의 진료를 일삼는 의사, 병원을 평가해 스스로 솎아 내는 것은 대한의사협회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가 돼야 한다. 조금 규모가 되는 병원이라면 얼마든지 자체적으로 진료 평가를 실시할 수도 있다. 이 일을 차일피일 미루면 결국 남의 손에 평가의 칼이 쥐어진다.
  
  안타깝게도 이 과정은 이미 시작됐다. 최근 몇 년 동안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의 행보는 모두 한 가지 목적 즉 진료 평가에 맞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심평원은 지난 7월 1일 700여 개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예방적 항생제 사용 실태'와 '수술 건수'를 조사해 문제가 있는 병원의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늦었다고 일이 잘못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진료 평가는 필요하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공단이나 심평원이 아닌 의료계와 환자들의 몫이다. 왜냐 하면, 국민건강보험공단이나 심평원 모두 자신들의 의제와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는다는 면에서 다른 영리기업과 하등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보험재정의 감시 체제 강화'를 자신들의 비전 중 하나로 버젓이 내세우고 있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의료기관을 옥죄어 의료비 지출을 줄이는 도구로 심평원의 평가 시스템을 악용할 개연성이 충분하다. 이 과정에서, 특수성이 존중돼야 할 의사-환자 관계가 잡입잡출의 한계를 갖고 있는 평가 시스템의 눈치를 보게 될 것이다. 결국, 앞에서 소개한 예처럼 냉소적인 의료인은 늘어날 테고, 그 피해는 환자들의 몫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하다.
  
  이런 식의 측정과 평가는 객관적일지는 몰라도, 타당성이 떨어지며, 무엇보다 피평가자인 의료기관, 나아가 평가 결과에 직접 영향을 받게 될 환자의 동의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투명하지 못하다. 환자의 피해를 담보로 했다면, 공단이 지출을 절약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진료 평가, 피할 일은 아니지만 제대로 해야 한다. 정책 집행자의 과욕으로 의료계, 환자, 국민 모두를 골병들게 만드는 일은 이제 그만 멈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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