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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더 많은 환자가 피를 흘려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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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더 많은 환자가 피를 흘려야 하나"

이형기의 학이사(學而思) 의ㆍ과학 <1> 연재를 시작하며

황우석 사태 동안 <프레시안>에 기고한 것이 인연이 돼 연재 형태로 지면을 맡아 볼 의향이 없느냐는 제의를 몇 차례 받았다. 사실 이런 제의는 내게 과분했기 때문에 번번이 거절했다. '황우석 사태로 반짝하더니 이제 아예 작심하고 이름을 낼 요량이냐'는 비난에도 신경이 쓰인다고 이유를 댔다.

이유는 또 있었다. 내 정치적 지향이 <프레시안>의 논조와 꼭 일치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그 대신 시장의 기능을 중시해야 한다고 믿는 내게 <프레시안>의 진보 개혁 성향은 잘 맞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황우석 사태 같은 응급 상황이라면 몰라도, 정기 연재처럼 일상적 영역으로 넘어가면 서로의 입장이나 관점 차이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염려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황우석 사태가 정리되면서 나는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이후 1년이 넘도록 침묵했다. 그런데, 요 며칠 전 다시 '쓴 소리'를 한 마디 했다.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세계 최초'라며 허가를 내 준 항암세포치료제의 근거가 부실함을 지적한 기고문이 <프레시안>에 게재된 것이다.

결국 나는 다시 제의를 받았고, 이번에는 그냥 넘길 수 없어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돌아온 답변은, "<프레시안>이 이념적으로는 진보 성향을 띠지만 현존하는 정파 구도 속에서는 '독립적'이며, 무엇보다 '열린 광장'으로서 논의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번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기적으로 의·약학을 포함한 (생명)과학의 주요 쟁점들을 소개하고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연재물을 맡기로 한 것이다.

연재물의 이름을 놓고도 고민했다. 뭔가 그럴 듯하면서도 기억하기 쉬워야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논어의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이 눈에 들어왔다. '배우되 생각함이 없으면 얻지 못한다'는 뜻이리라. 신영복 교수는 '사(思)'를 경험적, 실천적 지식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요컨대, 구체적 현장으로 적용될 때 배움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학이사(學而思) 의·과학', 즉 '배움'과 성찰적 '적용'을 두루 갖춘 의학 및 과학 이해하기를 연재물의 제목으로 정한 것은 그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학이사'를 소리 나는 대로 쓰면 '하기사'가 되는데, 이는 '실상을 말하자면'이라는 뜻의 부사다. 의학 및 과학 분야의 쟁점에 분석적으로 접근해 '실상을 드러낸다'는 이 연재물의 목적과도 제법 맞아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꿈과 의도는 이렇게 거창하지만, 얼마나 해 낼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욕심도 부리지 않는다. 한계가 뻔한 것을 내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심히 해 보고는 싶다. 독자 제위의 격려와 기다림, 부드러운 질책도 부탁드린다. 하기사, 세상에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필자>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지 수년 후인 1786년, 높은 세금과 악화된 경제 상황에 불만을 품은 셰이스 등의 주도로 매사추세츠 서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토마스 제퍼슨(미국 3대 대통령)은 '셰이스의 반란'으로 불리는 이 유혈 사태가 결국 사람들의 자유를 신장시켜 줄 것으로 예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유라는 나무는 가끔씩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로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

제퍼슨의 이 말은 자주 '민주주의의 나무는 (인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로 변형돼 인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지켜내기 위해 피(희생)를 흘려야 하는 것에 민주주의나 자유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요 며칠 동안, 중국, 미국, 우리나라에서 식품과 의약품의 안전성을 위협했던 몇 가지 사건을 지켜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전 세계 강타한 중국發 'DEG 충격'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초대 중국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한 정샤오위(郑筱萸)는 뇌물 수수와 업무 태만 등의 이유로 지난 5월 29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제약회사의 의약품을 허가해 준 대가로 그가 챙겼던 검은 돈은 약 8억 원 정도였다. 죄질이 나쁘기는 해도, 이 정도의 뇌물에 '사형'이라는 극형이 선고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하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작년에만 중국에서 독성 물질에 오염된 주사를 맞고 11명이 사망했다. 이 밖에도 문제가 있는 항생제 때문에 6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심각한 질병을 앓게 된 약화(藥禍) 사고가 잇달아 발생하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중국산 수출품이었다. 최근 멜라닌에 오염된 동물 사료의 원료가 미국으로 수출돼, 미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제품회수(리콜) 조치가 취해졌다. 중남미로 수출된 중국산 치약과 기침감기약의 원료에서는 치명적 독성을 일으키는 '다이에틸렌글라이콜(diethylene glycol, DEG)'이 발견되기도 했다. 작년에 파나마에서는 중국산 DEG 시럽을 원료로 사용한 기침감기약을 먹고 100명 이상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발생한 것은 DEG를 안전한 '글리세린'으로 잘못 표기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다른 나라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중국 정부의 엄정한 사전 품질관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 갔다. 여차하면 중국산 물건에 대한 불매운동이라도 벌어질 판이었다. '전세계의 생산공장'을 경제 동력으로 삼아 온 중국의 입장에서는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정샤오위 전 청장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는, 위기를 타개하려는 중국 정부가 내·외부에 타전한 '강력한' 경고 또는 자정 의지의 메시지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중국에 꼭 유리해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FDA)은 지난 6월 1일자로 긴급 공고를 내, 모든 중국산 치약의 사용을 중단하도록 권고했다. FDA의 실제 표현은 더 과격했다. 아예 "내던져 버려라(throw away)"라는 말이 등장하기도 했다. 할인점 등에서 팔리는 저가의 중국산 브랜드 치약에서 DEG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사실, FDA는 DEG에 얽힌 뼈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지만, 1938년 이전에는 안전성을 입증하지 않아도 의약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 일례로, 1937년 테네시 주의 '마센길'이라는 제약회사는 설파 항생제를 물약으로 만들기 위해 DEG를 용매로 사용했다. 사전에 동물실험이라도 한 번 했으면 DEG의 독성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겠지만, 허술한 법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결국, 이 약을 복용한 환자 107명이 사망했다. 약을 만든 화학자도 자살했다. 이 약화 사고로 미국 의회는 부랴부랴 1938년에 '식품의약품화장품법(Food, Drug, and Cosmetic Act of 1938)'을 제정해, 어떤 의약품이라도 사전에 '안전성'을 입증해야만 판매될 수 있도록 강제했다. 요컨대, DEG 때문에 근대적인 의약품 안전관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DEG가 들어 있는 중국산 치약을 FDA가 묵과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환자 없는 식약청, '안궁우황환의 비극' 배태

이제 무대는 우리나라다. 지난 5월 30일, 한국방송(KBS) '추적 60분'에는 한 약사와 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어떤 환자 엄마의 눈물겨운 이야기가 소개됐다. 약사가 불법으로 조제 또는 밀반입한 중국산 '안궁우황환'을 장기간 유아에게 투여해 치명적인 수은 및 비소 중독이 발생했다. 식약청은 소홀한 사후 처리로 일관했다. 이 방송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며 분노한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으리라.
▲ 최근 한국방송(KBS) '추적60분'에서는 안궁우황환의 치명적 위험을 폭로해 큰 풍격을 줬다. ⓒKBS

우선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에 그저 장탄식만 터진다. 예를 들어,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아이의 엄마가 수집해 준 자료를 갖고 해당 약사를 고발하는 데 그쳤다. 밀반입을 주도한 것으로 의심되는 모 한방 약국 체인에 대한 약사 감시는 시늉만 냈다. 광물성의약품의 허용치 기준 마련은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도대체,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이런 정부도 정부 축에 드는지 물어 보고 싶다.

식약청은 자신들의 사명이라며 버젓이 내세운 '국민건강의 보호와 증진'이 과연 무슨 의미인지 알기나 할까? 1937년 DEG 약화사고가 발생했을 때, FDA는 이 약을 회수하기 위해 239명의 전체 현장 직원을 투입했다. 각 주 정부의 보건직 공무원들도 가세했다. 신문과 라디오 방송은 반복적으로 이 약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다. 그 결과, 생산·판매된 240갤론(약 908ℓ)의 약 중 234갤론(885ℓ) 이상을 회수할 수 있었다. 최근 일이 아니다. 무려 70년 전 이야기다.

문제의 근원은 보다 깊은 데 있다. 약학은 보건의료의 여러 분야 중 유일하게 환자가 아닌 '제품' 중심적 학문이다. 안궁우황환을 조제한 약사가 '황화수은(주사, 朱砂)은 물에 녹지 않기 때문에 절대로 흡수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때, 그는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 제품 중심적 사고의 일단을 내비친 것이다. 제품, 즉 물성에만 집중하니까 불용성의 황화수은이 흡수될 리 만무하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헌검색을 해 보면 녹지 않는다는 황화수은이 소량이지만 위장관에서 흡수되고, 콩팥 같은 장기에 축적돼 심각한 독성을 일으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분유를 먹는 영유아에게는 수은이 더 잘 흡수된다. '추적 60분'에 방영된 유아가 바로 이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요컨대, 환자에게 미칠 영향을 총체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약(제품)에만 초점을 맞추어 치료 방법을 결정하는 제품 중심적 사고로는 절대로 환자를 보호할 수 없다.

요컨대, 약의 진정한 존재 이유는 '제품이 아니라 환자'라는 평범한 진리를 잊지 않는 것이 환자 중심적 사고의 요체다. 다시 말해, 약의 함의(含意)는 제품으로서의 물성이 아니라 환자에게 미칠 효과-긍정적(유효성)이든 부정적(독성)이든-다. 따라서, 환자 중심적 사고를 한다면 아무리 신비의 묘약이라도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았을 때 일단 투여를 미루어야 정상이다.

환자 중심으로 사고하는 훈련이 절실하다. 규격화와 표준화가 부실한 한약 분야는 더욱 그러하다. 이 문제가 제도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됐지만, 제이 제삼의 안궁우황환은 이곳저곳에서 또 나타날 것이다.

얼마나 더 희생돼야 하는가?

DEG 약화사고로 아이를 잃은 한 엄마는 당시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 죽은 아이에 대한 기억은 슬픔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여전히 그 아이가 작은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고통으로 신음하는 것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제 요청은, 이러한 약이 더 이상 팔리지 않도록, 그래서 어린 생명을 앗아가지 않도록, 그리고 이런 고통을 남기지 않도록, 오늘 밤 제가 그런 것처럼 이토록 미래가 암울하지 않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는 것입니다."

위 편지가 발송된 지 7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의약품의 안전성 관리도 민주주의의 나무처럼 '피를 먹고 자란다'며 짐짓 스스로를 위로하고 앉아 있을 텐가? 조치를 취하기 위해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이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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