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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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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노동자들

[한윤수의 '오랑캐꽃']<264>

돈 떼이고 얻어맞는 외국인 노동자.
사실은 남의 얘기가 아니다.
30여 년 전 우리 모습이니까.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인 1978년 당시 나는 <청년사>라는 출판사 사장이었다. 3년 남짓 출판사를 꾸려오는 동안 베스트셀러도 내고 경영은 순조로운 편이었다.

하지만 대학생 몇이 10대 노동자들의 글을 모아온 게 내 운명을 바꿀 줄이야. 당시 전국에 500여 군데의 노동야학이 있었는데 그중 활발하게 움직이던 100여 군데에서 모은 글이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20시간씩 타이밍 먹어가며 잔업 하는 이야기, 화장실 자주 갈까봐 식사 때 국을 주지 않는 회사식당 이야기, 전기료 많이 나온다고 기숙사 불을 일찍 꺼서 가로등 밑에서 공부하는 이야기 등.

나는 글을 쓴 33명의 노동자들과 일일이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고 1년 여 동안 내용을 보충했다. 대부분 순진하고 희생적이며 가족에 헌신하는 어린 가장들이었다.

하지만 책으로 내려고 하자 무척 고민이 되었다. 당시는 노동의 노 짜도 꺼내기 힘든 시절, 바야흐로 12. 12에서 5. 18로 넘어가는 살벌한 계엄령 하였으니까. 책을 내면 잡혀가는 것은 물론 출판사도 망할 게 뻔했다. 그렇다고 안 낼 수도 없지. 이건 우리 역사의 중요한 기록인데 묻히면 어쩌나?

안 내면 평생 후회하고 살까봐 결단을 내렸다. *책을 2만부 찍어 200여 교회 청년회를 통해 확 뿌리고 나는 잠적했다.
80년 가을, 세상이 잠잠해졌을 때 다시 노동자들과 만나 북한산으로 등산을 갔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마련해간 인세를 지불했다.
그날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노동자들은 제각기 공장으로 흩어지고 나는 시골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니까.

나이 60에 목사가 되어 외국인 노동자를 돕는 일을 하는 것도 다 그런 인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를 보면 당시 글을 썼던 어린 노동자들의 얼굴이 떠오르니까.
3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참으로 보고 싶었다! 어느덧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쯤 되었을 그리운 얼굴들! 하지만 뿔뿔이 흩어졌을 텐데 어디 가서 만나나?

그런데 지난 4월 중순 뜻밖의 전화가 왔다.
"형님, 저 신림동 야학에서 강학(講學, 야학의 교사)을 하던 000입니다."
귀가 번쩍 뜨였다.
그는 기막힌 소식을 들려주었다. 당시 글을 썼던 노동자들이 30년 동안 연락을 끊지 않고 계속 만나 왔으며 그들이 모여서 발안에 오고 싶어 한다고.
궁금해서 물었다.
"어떻게 내가 발안에 있는 줄 알았지?"
"*한겨레신문 인터뷰를 보았거든요."

5월 초 일요일. 당시 대학생 2명에 노동자 6명 모두 8명이 발안에 왔다.
너무나 감격스러워 얼싸안았다. 특히 흐뭇했던 것은 그들 모두가 *열심히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대학생이던 K군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고등학교 교사인 나보다 다 잘 산다니까요"

하여간 그 날은 먹고 마시고 흘러간 노래도 부르고 그야말로 회포를 풀고 헤어졌는데 그 이후가 진짜다.

그들이 하나 둘씩 후원금을 보내오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숫자가 제법 늘어서 벌써 열 명이 넘었다. 신기한 것은 그때 글을 썼던 필자들 외에 내가 이름을 전혀 모르는 친구들까지 후원금을 보내오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써달라고!

어린 노동자들이 커서 외국인 노동자를 돕다니!
감개무량하다.

*충격적 : 여성 노동자가 사장님에게 성폭행당한 기록도 있었다. 하지만 내 손에까지 그 원고가 들어오지는 않았다. 너무 충격적이라 대학생들이 나 모르게 빼버렸기 때문이다.

*책 :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1979/ 한윤수 엮음/ 청년사 간). 초판은 곧 절판되어서 한 동안 복사본이 나돌았다. 2000년 11월 다른 출판사에서 재판을 발행했다.

*한겨레신문 인터뷰 : 2010년 3월 19일자 <한겨레가 만난 사람>

*열심히 다 잘 살고 : 다양한 직업(전업주부, 식료품상, 보험설계사, 시인, 수련원장, 심지어는 보석상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에 진출하여 다 열심히 살고 있어서 흐뭇했다. 하지만 시위 도중 죽은 사람도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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