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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과부'는 어찌 하라고…

[이봉수의 미디어 동서횡단] 축구에 끼어든 것들

"월드컵 광풍 피난처는 사모아, 알래스카, 스위스, 북한"

온통 월드컵 열기로 달궈지고 있는 지구촌에서, 축구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한 달도 넘게 지속되는 월드컵 기간을 버티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는 광적인 월드컵 분위기에 휩싸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갈 만한 여행지 4곳을 소개했다. 미국령 사모아, 알래스카, 스위스, 그리고 북한이 바로 그곳인데, 선정이유가 재미있다.

미국령 사모아는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꼴찌(205위)로 축구에 대한 관심은 작지만 열대우림, 산호초, 희디흰 모래톱이 어우러진 남태평양의 파라다이스다. 6만 명 인구는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의 월드컵 결승전에 운집할 관중보다도 적다. 알래스카는 미국이 월드컵에 출전하지만 아이스하키에 관심이 더 높고, 독일과 딱 12시간 시차가 있어 매일 잠자고 나면 월드컵 경기가 끝나게 된다. 스위스는 월드컵 출전국이면서도 관광청 주도로 '축구과부'들을 겨냥한 각종 관광상품들을 홍보하고 있어서, 그곳에 가면 '대접'을 받을 거란 얘기다.

북한은 마지막 공산주의 국가 중 하나로 월드컵 마케팅은 물론이고 월드컵에 관한 보도조차 거의 없다고 소개됐다. 남한에서 2002년 월드컵이 열렸을 때도 북한 사람들은 축구를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는데, 남한이 비무장지대를 따라 4강 진출을 자랑하는 입간판들을 세웠다는 얘기도 전했다. 그러나 북한은 조용히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며, 월드컵 개막일에 출발하는 9일짜리 관광상품을 소개했다.
▲ <더 타임스>는 26일치 부록(Times2)에서 알래스카, 미국령 사모아, 북한 등을 월드컵 열풍을 피할 수 있는 '자유구역'으로 추천했다.

독일의 대외방송인 <도이체벨레>는 영국 항공사인 BA와 이지젯(Easyjet) 등이 월드컵 기간에 독일 아닌 다른 나라로 여행하는 승객들에게 항공료 할인 혜택까지 주고 있다고 보도했다. 항공사들로서는 판촉활동의 하나이겠지만, 유럽에 존재하는 '안티 월드컵' 분위기가 상당함을 반영한다. 이 방송은 한 여행사의 예약실태를 예로 들어 월드컵 기간에 홀로 여행을 떠나려고 예약한 여성들의 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주어 이미 15%나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안티 월드컵' 분위기를 대표하는 것은 막상 개최국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축구 없는 구역' (Fussballfreie Zone; Football Free Zone) 운동이라 할 만하다. '축구 없는 구역'이라는 스티커나 현수막이 붙은 카페나 식당들이 늘어가고 있는데, 그곳에선 축구를 시청할 수 있는 TV마저 치워버린다. 같은 문구를 집어넣은 티셔츠도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신명마저 규격화하는 상혼
▲ 독일 맥주집의 '축구없는 구역' 스티커.

전세계에서 월드컵 열풍이 가장 세차게 불고 있는 곳은, 아마 개최국 독일도 아닌 '대한민국'이지 싶다. 남북한의 월드컵 분위기 차이만큼이나 극과 극을 달리는 게 우리네 기질이 되고만 걸까? 이달 중순께 한국에 잠깐 들어갔다가 그 뜨거운 월드컵 열기를 체감했다. 10일에는 '개막 D-30일'이라는 명분 아래 방송3사 뉴스가 월드컵 관련 보도로 뒤덮였고, 다음날에는 대표팀 명단이 발표되면서 월드컵에 '올인'하는 양상이 되풀이됐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에 따르면, 10일에는 메인뉴스에서만도 <MBC> 20건, <SBS> 17건, <KBS> 10건의 월드컵 보도를 쏟아냈다. 채널을 돌리는 곳마다 꼭짓점 댄스가 나왔고, 11명의 가수 또는 그룹이 내놓았다는 월드컵 응원곡들이 울려 퍼졌다.

댄스에 어둔하면 '왕따'가 되고, 한국팀의 승리를 말하지 않으면 애국심도 없는 사람쯤으로 여겨지는 풍조마저 있는 듯하다. 자발적이어야 할 박수와 구호와 율동이 전체주의 사회의 군중집회나 매스게임처럼 규격화하고, 마음 속으로부터 솟아나와야 할 신명마저 획일주의 틀 안에 갇히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기업들의 상혼이 스포츠 제전에 너무 깊숙이 끼어든 탓이다. '붉은 악마'의 공식 후원업체인 KTF와 그에 맞서려는 SKT컨소시엄이 거리응원은 물론이고 로고송과 광고, 독일 현지 응원에 이르기까지 주도권 다툼을 벌인다. 인터넷 포털 <다음>은 배우 김수로를 광고모델로 내세워 꼭짓점 댄스 보급에 열중하고 있고, 삼성은 '풋볼 프리 존'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독일 현지에 '풋볼 존'을 만들어 월드컵 마케팅을 펼칠 것이라고 한다.

SKT컨소시엄에는 <조선>, <동아>, <SBS>, 그리고 공영인 <KBS>와 <서울신문>까지 끼어들어 축제의 상업화에 골몰한다. 이 컨소시엄은 월드컵 기간 내내 하루 521만 원씩 주고 서울시청 앞 광장 사용권을 독점했다. 시민이 모여드는 광장을 사고파는, 동서고금에 보도 듣도 못했던 일이 21세기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것이다. 공공재인 대동강물을 독점한 봉이 김선달처럼, 광장을 독점한 컨소시엄에겐 시민도 '봉'으로 보였나? 구역과 펜스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자리를 정해주고 화장실 갔다 오는 것까지 통제했다고 한다. 안전 문제를 내세우지만, 좋은 화면을 연출하려는 욕심도 있었으리라. 자유로이 드나들 수도 없고, 연출자의 지휘로 박수 치고 구호 외치는 광장은 더 이상 민주주의와 축제의 마당인 아고라가 아니다.

광장의 '연출'은 민주주의를 해친다

그것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해치는 이벤트가 되기 십상이다. 유신 때의 '체육관 선거'만 반민주적인 것이 아니다. 대선주자인 이명박 시장이 팔아넘긴 광장에 오세훈 후보도 얼굴을 내밀었고, 강금실 후보는 상암축구장에서 꼭짓점 댄스를 췄다. 선거를 하루 앞둔 날까지도 정당의 정책과 후보들의 공약보다는 붉은 셔츠 차림에 뿔 달고 춤추는 후보들의 이미지가 유권자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혔으리라.

제대로 된 나라치고 우리처럼 정치인이 스포츠 단체장을 많이 맡는 나라도 없다.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는 데 스포츠만한 이벤트가 없고, 그 중에서도 내셔널리즘과 쉽게 결합되는 축구가 으뜸일 것이다. 이탈리아 최대 재벌 베를루스코니가 부정부패 사건에 숱하게 연루됐는데도 2001년에 재집권한 것은 그가 소유한 축구단 AC밀란의 인기와 계열 방송사들의 '이미지 가꾸기' 덕분이 컸다.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이 축구협회장 자리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도 '대통령 꿈'을 이어가려는 계산일 수 있다. 이번 월드컵 성적에 따라서는 올림픽 유치 뒤 대통령에 출마했던 아버지를 포함해 정씨 가문의 세 번째 도전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응원열기에 비해 축구 자체의 저변이 허약한 것도 축구협회의 책임이 크다. 선수 출신이 아니라 정치인이 이끄는 경기단체는 아무래도 엘리트 체육과 단기성과에 급급하게 된다.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한국의 응원열기에 주목한 <BBC 뉴스>의 찰스 스캔런은 서울발 기사에서 "국가대표팀으로 시작해서 국가대표팀으로 끝나는" 한국축구의 내막을 제대로 집어냈다. 마을마다 잔디구장이 있고 주말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축구를 즐기는 선진국 출신 기자의 물정 모르는 소리로 치부할 게 아니다. 월드컵 축구장 유치하는 데 사활을 걸었던 지방자치단체장들이 호화청사 짓는 데 쓸 돈은 여전히 있어도, 하천둔덕이나 야산을 밀어 축구장 만드는 데는 인색하다. 잔디축구장 몇 개가 동시에 들어설 수 있는 곳에 골프장 허가만 계속 내준다.
▲ 영국 케임브리지주 조그만 마을, 거튼의 놀이터와 동네 축구장. 잔디구장이 3개면이나 돼 청소년과 주민들은 언제든지 축구를 즐길 수 있다.

▲ 영국 케임브리지주의 히스턴 풋볼클럽. 면소재지 정도 되는 마을이지만 프로구단이 있다.멀리 경기장 주변에 줄지어 있는 광고판들은 동네 슈퍼마켓, 복덕방, 빵집 등의 후원금으로 세워졌다.

진정한 축구 실력과 응원문화

필자도 우리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기를 고대하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실력'으로 따낸 것이어야 한다. 외국 언론들이 월드컵의 심판 판정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가디언> 5월 4일, <BBC> 24일 등) '2002년 한국의 4강 진출'을 예로 꺼내는 것은 우리로선 기분 나쁘지만, 이것이 세계 축구계의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 언론들은 '가거라 싸워라 이겨라'(<조선> 27일)는 식으로 일제히 진격나팔을 불지만, 영국의 지각 있는 일부 언론은 이기는 것만 목적이 아니라며 '축구를 다시 아름답게 만들자'고 제의한다(<가디언> 4일). 그러나 관중의 수준에 대해서는, 스스로 훌리건의 원조라는 점이 켕겼나? 연속극에 악덕 프로구단주로 나오는 유명 탤런트를 내세워 국수주의적 관전 태도를 버리자는 응원문화 캠페인을 벌이기도 한다.

순전히 비전문가인 필자의 전망이니 빗나갈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시차 부담이 없는 세 팀과 벌이는 초반 경기들조차 국민들의 기대수준을 만족시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 우리에게 무너졌던 유럽팀들이 이번에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홈이나 다름없는 구장에서 우리와 맞선다. 걱정되는 것은 그 다음에 쏟아질 비난과 원망, 그리고 축구열기의 급속냉각이다. 이는 집단주의의 속성들이기도 하다. 대표팀의 실력은 월드컵 기간의 열광적 응원으로 양성되는 게 아니다.

골드만삭스의 한 보고서는 나라별 축구실력의 차이가 얼마나 먼 곳에서부터 비롯되는지를 말해준다. 우선 경제력이다. 서방선진 7개국 가운데 캐나다를 뺀 6개국이 피파 랭킹 20위 안에 들어 있다. 경제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구다. 월드컵 우승컵을 들어올린 유럽연합 국가는 인구가 가장 많은 네 나라, 즉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뿐이고, 경제력은 뒤지지만 역시 인구대국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월드컵을 여러 번 가져갔다. 그렇다면 세계 최저 출산율을 보이고 있는 한국의 장래는 축구에서도 어둡다. 당장은 무엇보다 축구에 끼어든 상혼과 정치와 집단주의의 거품을 걷어내는 일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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