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앞바다에는 맥아더를 기리는 동상과 건립문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장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역전시킨 맥아더를 추앙하는 의미에서다. 맥아더는 '전쟁영웅'에 만족하지 않고 대권까지 노리다 침몰했다. 맥아더가 끝내 미워싱턴 정가를 장악할 정도로 끝까지 승승장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맥아더는 '전쟁영웅'이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책이 나왔다.
***"맥아더, 미국 대권까진 노린 '위험한 정치군인'"**
애리조나 주립대 역사교수인 마이클 샬러가 쓴 <더글러스 맥아더>(이매진 간)는 화려한 이미지에 감싸인 맥아더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친 책이다. 사실 맥아더 장군(1880∼1964)만큼 20세기 미군사에서 보기 드문 영광을 누린 군인도 없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최고의 영예로 여겨지는 은성무공훈장을 일곱 차례나 받았으며 미 육군역사상 4명에 불과한 5성 장군에 올랐다.
그러나 저자는 서문에서 "군 지휘권에 만족하지 못했던 맥아더는 단지 국가정책을 실행하는 게 아니라 그런 정책을 형성하는 권력을 열망했다"면서 '정치군인'의 '위험한 야망'에 초점을 맞추었다. 저자는 맥아더가 실상 '지독히 운이 좋은 군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군사 전략가'로서도 실패했으며 오직 '실패도 성공으로 포장하는' 놀라운 대중 선전술로 미국의 대권까지 노린 '위험한 정치군인'으로 혹평한다.
저자에 따르면 더글러스는 아버지 아서 맥아더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의 후보까지 올랐지만 워싱턴 정가와의 견해 차이로 좌절하는 것을 지켜보며 군인 이상의 지위를 갈망했다. 그는 여러 차례 백악관행을 꿈꿨지만 결국 4성 장군 시절 그의 참모로 소령에 불과했던 아이젠하워가 트루먼의 뒤를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됐다. 1951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연합군 총사령관에서 해임된 그가 미국으로 귀환했을 때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던 것에 비춰보면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워싱턴 정가에서는 맥아더를 이미 불신하고 있었다. 맥아더가 필리핀의 군사고문으로 파견되며 아시아와 인연을 맺게 된 것 자체가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미국 본토와 유럽에서 빗겨난 아시아 지역으로 맥아더를 '유배'시킨 것이다.
하지만 필리핀은 예상과 달리 맥아더에게 기회가 됐다. 필리핀 군 양성 계획을 두고 본국과 마찰을 빚으며 좌절했던 맥아더는 일본의 전쟁 도발로 기사회생한다. 1941년 진주만 폭격에 이어 필리핀의 클라크 기지가 공격받자 맥아더는 ‘신비의 땅’ 동양을 잘 아는 장군,위기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고국을 위해 싸우는 장군. 여기에 독특한 모자와 옥수수 파이프,선글라스로 포장되며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끌어들였다.
마닐라를 거쳐 전후 일본 점령군 사령관으로 도쿄에 간 맥아더는 이곳에서 ‘일본 민주주의의 창건자’라는 새 명예를 얻는다. 하지만 저자는 일본의 전후 복구는 철저하게 워싱턴의 계획과 준비에 의해 주도됐고 맥아더가 한 일이라고는 이를 지연하거나 방해하는 데 집중돼 있었음을 폭로한다.
전후 일본 군정의 역할이 줄어들면서 퇴역의 날만 기다리는 70세의 노장군에게 1950년 6월25일 "전쟁의 신 마르스가 옛 전사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라고 표현한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또다시 전쟁영웅으로 떠오른 그는 1948년 위스콘신의 공화단 예비선거에서 예상 외의 패배 이후 접어두었던 대통령의 꿈을 되살렸다.
***"중공군 개입에 핵무기 공격 주장하기도"**
그러나 저자는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그의 군사적 성공은 대부분 적군을 압도하는 군사적 우위 속에 이뤄진 것이었다. 군사전략가로서 그는 실패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의 진주만 침공 소식을 듣고도 판단착오로 일본 공습 타이밍을 놓쳐 미국 본토를 제외하고 최대의 공군력을 자랑하던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애치슨라인이 발표되기도 전에 한국을 미국 방위선에서 제외한 것도 그였다. 또한 북한의 남침소식을 듣고 “한손을 뒤로 묶고서도 처리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다 전쟁 초기 미군의 패배를 자초한 것도 그였다. 중공군이 참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다가 중공군이 개입하자 이번에는 핵무기로 공격해도 세계대전은 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허튼 주장을 했다.
정부와는 달리, 맥아더는 타협이 아니라 확전의 측면에서 생각했다. '소련이나 중공이 한국에 대한 개입을 확대시킬 경우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합동참모본부의 질문에 대해 맥아더는 1950년 12월24일 ‘26개의 원자폭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저지목표물 목록’을 제출했다.
이같은 맥아더의 주장에 대해 동맹국인 영국조차도 우려와 불신을 나타내자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맥아더의 인기를 이용해온 정부로서도 한계에 도달했다는 판단에서다.
결국 맥아더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다. 퇴장하는 순간까지도 그는 노련한 정치가적 기질을 발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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