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대한민국 불평등 문제는 기승전-부동산이야!' 약 3년 전에 이 생각 하나에 꽂혀서 무턱대고 '부동산 중개 사무소(이하 사무소)'를 차렸습니다. 어릴 때 따 놓은 공인중개사 자격증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일은 적성에 맞았습니다. 남의 집 구경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사람들 집은 각각이 하나의 우주였습니다. 같은 면적, 같은 구조의 아파트라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일하며 배운 걸 토대로 부동산 관련 책을 3권 썼습니다. 마음 맞는 동료들을 만나 국내 최초의 '젠트리피케이션 예방∙대응 매뉴얼'도 개발했습니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개정 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원 없이 신나게 즐겨서 그런 걸까요? 근래에 관심사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결국 사무소 문을 닫았습니다. 이 글은 제 지난 경험 일부를 여러분과 공유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혼부부가 부모와 함께 부동산 중개소를 왔다면…
제 사무소는 아파트 단지와 다세대∙다가구주택 밀집 지역 사이에 위치했습니다. 주 고객은 신혼부부였습니다. 신혼부부 고객 유형은 크게 다음 둘로 나뉘었습니다.
첫째, 부모와 함께 방문하는 신혼부부
둘째, 그렇지 않은 신혼부부
전자는 대개 '아파트를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물건지'에 가면, 자녀보다는 부모가 훨씬 더 많은 말을 했습니다. 많은 경우에는 계약도 부모 마음에 드는 곳으로 했습니다. 자녀에게는 주도권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는 건 자녀인데, 돈을 치르는 건 부모이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었습니다.
후자는 주로 '아파트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하여 다세대∙다가구주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과 움직이면 제가 가장 많은 말을 했습니다. 괜찮지 않은 것도 괜찮다고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체리색 몰딩도 "괜찮습니다". 꽃무늬 벽지도 "괜찮습니다". 옥색 싱크대도 "괜찮습니다". 하루 중 단 1분도 볕이 들지 않지만, "괜찮습니다". 사무소를 운영하며 왜 어른들이 말 많은 사람을 일컬어 '사기꾼 같다'고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증여 수단으로써의 아파트
사무소 운영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엄빠(엄마·아빠)'와 함께 방문한 20대 신혼부부가 5억 원 정도 하는 아파트를 사고 싶다고 했습니다. 순진한 마음에 물었습니다. "증여세가 상당할 텐데요?" 그러자 일행 중 한 분이 '자녀의 담보대출을 부모가 대신 갚아주는 방법'이 있다며 '증여세 탈세 비법'을 일러주었습니다.
저는 이 일이 있은 즈음하여 소위 청년 담론(세대론)에서 완전히 등을 돌렸습니다. 일부 청년들은 주장합니다. "청년 세대는 가난하다!" 이는 '구라(거짓말)'입니다. 가난한 건 청년 세대가 아닙니다. '어떤 청년'입니다. 어떤 청년이 가난한 이유는 그 청년의 부모가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부자 부모를 둔 청년은 가난할 수 없습니다.
청년 담론은 불평등 문제를 (세로축의) 가족이 아닌 (가로축의) 세대로 접근합니다. 그 때문에 부모가 자녀에게 아파트를 사주는(위 세대에서 아래 세대로 자산이 증여되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저는 그런 담론에는 관심 없습니다.
어쨌든 이건 확실합니다. 부모 세대에서 자녀 세대로 부가 이전되는 큰 이벤트 중 하나는 자녀의 결혼입니다. 보편적 도구는 아파트입니다. 방식은 매매입니다. 확신합니다. 아파트를 소유한 신혼부부의 자금 출처를 전수 조사하면 볼만한 결과가 나올 겁니다.
다세대·다주택의 '신혼테리어'
저는 기분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사람입니다. 그 탓에 신혼부부 고객이 주어진 예산에 맞추어서 '형편없는 환경의 다세대∙다가구주택'을 계약하는 날에는, 절대로 그들의 눈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감히 표정으로라도 남의 신혼집을 모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여기에서 시작하실 거예요?' '여긴 너무 침침하고 눅눅해요.' '바퀴벌레도 많을 거 같아요.' 누추한 집과 신혼부부의 조합은 임대인마저도 '이건 좀 아닌데?'라는 마음을 품게 합니다. '여기서 돈 많이 벌어서 좋은 곳으로 이사하라'는 말은 임대인식 유감의 표현입니다.
신혼집은 예뻐야 합니다. 왜 그런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건 그냥 공리(公理)입니다. 낡은 다세대∙다가구주택을 얻은 신혼부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신혼테리어'를 합니다. 페인트칠이 기본입니다. 체리색 몰딩은 흰색으로, 나무색 방문은 짙은 파란색으로 칠합니다. 방문에 달린 황색 동그란 손잡이는 검고 길쭉한 것으로 바꿉니다. 녹슨 현관문 안쪽에는 회색 시트지를 바릅니다.
저는 인테리어가 끝날 때 즈음하여 그들 집에 화장지를 사 들고 가 인사합니다. "이사 축하합니다." "집이 새것 같네요." "북유럽 느낌이 물씬 나는데요?" "인테리어 센스가 보통이 아니신 거 같아요." 거짓말입니다. 큰맘 먹고 샀을 게 분명한 최신형 냉장고는 바로 옆에 놓인 구형 싱크대와 호응하지 않습니다. 커튼 틈 사이로는 초록색 창호가 보입니다. 자주색 변기는 말 그대로 '시선 강탈'입니다.
제 거짓말은 이내 표정이 읽혀 들통납니다. 그들은 제가 굳이 명시적으로 묻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이 왜 싱크대와 창호, 욕실 등을 바꾸지 않았는지를 말해줍니다. 요는 단순합니다. 2년만 살고 이사할 집의 '부착물'을 큰돈 들여 교체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대신 전자제품 등은 이사할 때 가지고 갈 수 있으니, '10년 쓸 생각'으로 좋은 걸 산다고 했습니다.
한 곳에 10년은 살아야
주거 세입자는 왜 2년마다 이사하는 걸까요?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주거 세입자를 2년만 보호해 주기 때문입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을 개정해 주거 세입자 보호기간을 늘리면, 더 많은 신혼부부가 더 예쁜 신혼집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몇 년으로 늘리는 게 좋을까요? 저는 10년을 희망합니다.
10년은 상가 세입자가 적용받는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과의 비교에서 도출된 숫자입니다. 대한민국 그 어떤 상가 세입자도 2년마다 가게를 옮기며 장사하지 않습니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이 상가 세입자를 10년간 보호해 주고 있어서 가능한 일입니다. 상가 세입자를 주거 세입자보다 특별히 더 보호해 주어야 할 마땅한 이유는 없습니다. 상가 세입자를 10년 보호해주는 것이 타당하다면, 주거 세입자를 10년 보호해주는 것 역시 타당합니다.
상상해 봅시다. 때는 2020년 가을입니다. 새 국회에서 주거 세입자 보호기간을 기존 2년에서 10년으로 확대하는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신혼부부들은 제일 먼저 무얼 할까요? '이케아'에 갑니다. 거기서 가장 세련된 싱크대를 삽니다. 비싸도 괜찮습니다. 10년을 쓸 거니까요. 화장실 공사는 필수입니다. 낡은 변기와 세면대를 교체합니다. 바닥과 벽 타일도 새로 합니다. 시간이 흐릅니다. 2022년 가을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이사 철을 맞아 전세가가 오르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옵니다. 콧방귀가 절로 나옵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에 의하자면 임대인은 임대차 계약 10년 내에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임대료 인상을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저는 사무소에서 거의 매일 이런 상상을 했습니다. 제 머릿속 한구석에는 조금 더 깊은 다른 상상도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인테리어를 멋지게 한 어떤 집에 권리금이 붙어서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오늘은 그런 상상을 저 혼자가 아닌 여러분과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어떤가요? 불가능한 몽상처럼 느껴지시나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주어진 분량을 다 썼습니다. 이제 글을 마쳐야겠습니다. 소망합니다. 꼭 10년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부디 올해에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이 개정되어 주거 세입자 보호 기간이 확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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