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미국 주재 한국대사가 30일 이라크 추가 파병은 어떤 대가를 약속받고 하기보다는 조건을 내걸지 않고 파병해야 한다는 '무조건 파병론'을 펼쳐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무조건 파병해야, 파병 안하면 신용등급 위험"**
한승주 대사는 이날 워싱턴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열린 국회 통외통위 국감에서 이같은 '무조건 파병론'을 펼쳤다.
한대사는 "미국이 우리에게 요구한 파병 규모의 실체와 이에 대한 정부 대응, 또 그에 대한 대사의 소신이 무엇이냐"는 한나라당 하순봉 의원의 질문에 대해 "지난번 이라크에 공병대와 의료부대를 파견했을 때 한-미관계에 미친 영향이나 외교적 입지 등에 준 긍정적 효과, 경제 효과를 볼 때 이번 이라크 추가 파병은 몇배의 효과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대사는 이어 "이라크 파병은 한미관계, 경제적, 국제적 입지, 미국과 협상 역량 등에 효과가 크지만 처음부터 조건부로 연계 추진하는 것이 좋으냐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면서 "개인적으로는 처음부터 협상에서 약속받고 주고받는 형식의 태도를 취하는 편이 유리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가 이라크전에 병력을 파견했을 때 조건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그 효과는 조건을 내세웠을 때보다 더 컸다"면서 "우리가 조건없이 이라크에 파병한다해도 음으로 양으로 도움이 있을 것"이라고 재차 '무조건 파병론'을 주장했다.
한대사는 또 "우리가 파병 안했을 때의 결과와 파병했을 때의 혜택은 무엇이냐"는 한나라당 박원홍 의원의 질문에 대해 "혜택은 첫째 대테러전쟁과 대량파괴무기 문제에서 미국과 협력해서 민주주의와 지역 평화를 정착시킨다는 명분을 갖는 것이고, 실질적으로 봐서도 한-미관계가 좋아지면 제일 큰 것은 한-미동맹관계에 획기적인 결과가 온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대사는 이어 "요즘 많은 미국의 신용평가기관들이 우리 경제의 신용평가에 있어서 한-미 동맹관계를 척도로 사용한다"고 덧붙여, 이라크 파병을 안할 경우 신용등급이 낮춰질지도 모른다는 다분히 위압적인 주장을 펴기까지 했다.
한대사는 미국의 구체적 파병 요청 내용과 관련해선 "이라크 안정을 위해 군대를 증파해달라는 것이고 그 규모는 숫자라기보다는 한국군뿐 아니라 다른 나라 군대도 지휘할 수 있는 사단 본부를 포함하는 군대를 말한다"면서 "예컨대 폴란드도 3천명 이내의 병력으로 사단본부가 들어가 있다"고 말해, 최근 미국과의 물밑 협상을 통해 파병규모를 3천명 선에서 절충한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기도 했다.
***'한-미 이너서클'의 핵심 멤버**
한승주 대사는 이홍구 전 총리 등과 함께 미국 고위층과 깊숙한 얘기를 나눠온 '한-미 이너서클' 멤버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지난 94년 1차 북핵위기때 미국이 북폭 일보직전의 단계까지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외무장관으로서 이같은 사태를 저지하지 못함으로써 '외교력의 한계'를 드러냈던 인물이기도 하다.
한승주 대사는 전임 외무장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4월19일 외무장관보다 급이 낮은 주미대사로 발탁되고, 본인도 이를 수용함으로써 그 배경에 비상한 관심을 모았었다.
한승주 대사의 발탁 이유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었다.
노 대통령은 한 대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지난번에 외무장관을 하면서 북핵 문제를 다뤘고 이번엔 미국이 제일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 주미대사를 맡은 만큼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많이 수고 해달라"며 "길잡이를 잘 해달라"고 당부했었다. 이는 북핵 문제를 비롯한 대미접촉의 전권을 한 대사에게 일임하겠다는 의사로 풀이됐다.
이와 관련, 한승주 대사는 이에 앞서 지난 3월26일 노대통령으로부터 주미대사직을 제안받은 자리에서 "어떤 사람이 주미대사가 되든 대통령이 힘을 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과거정부에서 주미 대사를 통하지 않고 비선을 통해 외교 업무를 추진하던 관행이 없어져야 한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미외교의 전권을 자신에게 달라는 주문이었다.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은 "그런 일이 없을 테니 맡아달라"며 한 대사에게 최대한 전권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한 대사는 이에 대사직을 수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한승주 대사 임명 다음날인 지난 4월20일 '한국 외교 새로운 시대 진입'이라는 기사를 통해 한 대사 임명과 관련, "노대통령이 복잡하고 민감한 외교 사안을 다룰 줄 아는 인물을 택했다"며, 이는 "한국 정부가 한승주 전외무장관을 주미대사로 임명한 것은 미국과 외교적 정면충돌을 회피하기 의한 의도"라고 분석했다. 이 신문은 노무현정부의 초대 외통장관인 윤영관 장관과 미국간 관계가 불편했었음을 지적하며, 앞으로 대미외교는 한대사가 주도할 것임을 시사하기도 했다.
***한승주, 한국대사인가 미국대사인가**
이처럼 사실상의 대미외교 총사령관 역할을 맡아왔던 인물인 만큼 이번 한승주 대사의 '무조건 파병론'은 국내외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 대사의 발언을 일개 '개인의 발언'으로 치부하기에는 그가 지닌 정치적 배경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국내 외교전문가들 일각에서는 미국과 워낙 깊숙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한대사의 이번 발언은 사실상 노무현정부에 대한 '미국측의 주문'이 아니냐는 해석을 하고 있다.
파병의 전제조건으로 북핵문제나 주한미군 문제 등을 연계시키거나, 미국측에 대한 파병비용 부담 등의 그 어떤 조건을 달지 말라는 미국측 메시지가 아니냐는 분석이다.
아울러 한 대사가 미국이 장악하고 있는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의 '신용등급'을 언급한 것은 한국이 파병을 거부할 경우 지난번 1차 파병때와 마찬가지로 '신용등급 하향'이라는 무기를 동원할 수도 있음을 시사한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낳고 있다.
외교가에서는 파병문제를 놓고 부심하고 있는 노대통령이 최근 '보은론' 등을 말하며 파병쪽으로 경사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 이면에는 한승주 대사 등의 영향이 적지않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승주 대사의 발언을 접한 한 외교전문가는 "과연 한승주 대사는 한국대사인지, 미국대사인지 모르겠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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