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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익치, 왜 상가에 얼굴도 못내미나

<끝없는 배신의 연속> 현대家 몰락의 '1등공신'?

고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의장의 아산병원 빈소에는 그가 사망한지 나흘째인 7일 오전까지 각계에서 1만명에 육박하는 조문객이 다녀갔다. 그가 한때 한국경제를 쥐락펴락하던 대기업의 총수였기 때문이기도 하나, 그의 죽음에 함축된 '시대적 아픔'이 많은이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단 한사람 얼굴을 비추지 않고 있는 이가 있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회장이 그다.

***빈소에 얼굴을 못내미는 이익치**

이익치씨는 지난 2001년 3월 정주영 명예회장 빈소에 들렀다가 가족들로부터 "당신, 여기 왜 왔어?"라고 사실상의 축객령을 받은 바 있다. '현대가(家)의 분열과 쇠락의 주범이 다름아닌 이익치'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2년5개월이 지난 지금, 그는 정몽헌 의장 빈소에 얼굴조차 내밀지 못하고 있다.

지난 6월 대북송금 특검수사 막판에 "정몽헌 의장 지시로 박지원 전 비서실장에게 1백50억원의 CD(양도성예금증서)를 건넸다"는 이른바 '1백50억 비자금설'을 폭로하면서, 정 의장이 자살하기 직전까지 검찰수사에 시달리게 만든 당사자가 다름아닌 이익치 전회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그후 공개한 특검 수사기록을 통해 모든 책임을 정몽헌 의장에게 떠넘기는 전형적 '오리발 진술'을 한 사실도 드러나 세간의 빈축을 사기도 했었다.

그는 "대북 2차 예비접촉후 정몽헌 회장이 북쪽으로부터 돈을 요구받았다는 말을 한 적은 있으나, 송금은 워낙 중요한 기밀로 완벽한 보안이 필요했기 때문에 더이상 상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몽헌 의장은 "이익치씨가 회담을 할 당시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대북송금 등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제가 출국하면서 (자금조달에 어려움이 있으면) 박지원 장관을 통해 해결하라는 지시까지 했기 때문에 전혀 몰랐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상반된 진술을 했다.

이같이 어긋난 진술을 접한 검찰은 정 의장에게 "이익치를 믿지 말라"는 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사를 진행했던 공안당국으로부터까지 말 그대로 '배신자'로 치부됐던 것이다.

***IMF스타 이익치**

이익치 전 회장은 그러나 2,3년 전만 해도 현대때문에 한국최고의 '스타'자리까지 올랐던 인물이었고, 정몽헌 의장의 총애가 절대적이었던 인물이다.

1999년 연초부터 한국증시는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세계금융공황을 막기 위해 미연준이 98년 10월 초저금리 정책으로 선회하자, 당시 우리나라 경제정책을 총괄하던 IMF 또한 종전의 살인적 초고금리정책에서 초저금리 정책으로 급선회했다. 그러자 초고금리 시절 짭짤한 재미를 보았던 돈이 은행을 빠져나와 이번에는 증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99년 8월 대우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무려 투신사에만 2백45조원이 몰려들 정도로 당시 자금이동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같은 전례없는 자금이동의 한 중심에 이익치 당시 현대증권 회장이 서 있었다. '바이 코리아' 펀드를 앞세워 현대증권에만 11조원을 끌어들인 이익치 회장은 "곧 주가가 3천선을 넘고 몇년 뒤에는 6천선까지 오를 것"이라고 바람잡으며 시중자금을 투신권으로 끌어들이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당시 이익치 회장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 회장이 나서는 투자설명회마다 수천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고, 각 언론사들은 부대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던 투자설명회에 이 회장을 모셔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뿐이 아니었다. 2000년 4월 총선을 앞둔 여야 정당은 그를 자기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끌어들이기 위해 물밑로비를 벌였다. 또한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의 주류급 인사들은 이익치회장에게 '돈 버는 법'을 도움받기도 했다.

이처럼 시중의 돈줄을 움켜쥐면서 이익치 회장의 그룹내 위상은 급상승했다. 그는 바이 코리아 펀드의 자금력을 앞세워 당시 자금난이 시달리던 현대그룹 계열사들의 증자를 잇따라 성사시켰고, 이들의 주가도 음양으로 크게 끌어올렸다. 또한 당시 DJ정권의 큰 골치거리로 부도가 나면서 인출사태가 벌어졌던 광주의 한남투신을 군말없이 현대투신이 인수토록 하는가 하면, 금강산 사업 등 대북사업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정부와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말 그대로 '이익치 전성시대'였다.

그러나 99년 8월 대우사태가 터지면서 상황이 일변했다. 투신사에서 돈이 빠져나가면서 현대그룹이 휘청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그룹은 IMF사태후 다른 기업들처럼 부실기업 정리나 우량기업 매각을 통해 재무구조를 건전화하는 대신에 '바이 코리아' 붐에 편승해 자본금을 늘림으로써 부채비율을 줄인 대표적 기업이었다. 이러던 중 '제2의 IMF사태'에 비견되는 대우사태가 터지자, 대우그룹과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왕자의 난'의 주범**

2000년 3월14일 이른바 '왕자의 난'이 발생했다. 왕자의 난의 도화선이 된 것은 이익치 현대증권회장 인사 문제였다.

이날 정몽구 당시 현대그룹 공동회장은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보내고, 그대신 자신의 측근인 노정익 현대캐피털 부사장을 현대증권 사장으로 임명하는 인사발령을 냈다. 그러자 이 회장의 보스였던 정몽헌 현대그룹 공동회장이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그룹 구조조정본부 명의로 정몽구를 그룹 공동회장에서 짜르고 이익치를 원대복귀시키는 인사조치로 역공을 하고 나오면서 이전투구가 시작됐다.

이 싸움은 3월27일 아침 정주영이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87세의 몸을 이끌고 나와 정몽헌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정몽헌 라인의 승리로 끝났고, 결국 이익치는 현대증권회장 자리를 고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시장의 신뢰를 상실함으로써 현대그룹이 몰락케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그해 5월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를 신호로 그해말 현대는 사실상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현대건설 사태가 악화되자 채권단은 왕자의 난을 이면에서 불붙인 이익치 회장 등 이른바 '가신'그룹의 정리를 강력히 요청했고, 이에 저항하던 이회장은 결국 그해 9월 현대증권 회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익치 회장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필사적 저항을 했다. 하지만 금융당국과 채권단은 가신그룹의 정리 없이는 현대사태를 정상적으로 풀 수 없다는 판단아래 동원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들을 압박했다. 이 때 터져나온 것이 이른바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이었다.

이익치가 현대증권 사장으로 재직하던 지난 98년 5~11월에 현대중공업과 현대상선자금 2천1백34억원을 끌어들여 현대증권 박철재 상무에게 지시, 시세조종을 통해 현대전자 주가를 주당 1만4천8백원에서 최고 3만4천원선까지 끌어올리는 수법을 통해 모든 1천5백여억원의 시세차익을 챙겼다는 의혹이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이익치는 현대증권 회장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그 다음해인 2001년 1월17일 항소심에서 그는 증권거래법 위반죄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기에 이르렀다.

당시 이익치 회장은 정치권 고위층을 비롯해 여러 요로를 통해 구명운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이익치 사법처리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올리자 여러 명이 '나라를 구한 이익치를 다치게 해서야 되겠냐'고 방어하고 나섰었다"며 "이익치 커넥션이 얼마나 넓게 뻗쳐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익치가 외국으로 도피한 이유**

자리가 위태롭던 이익치 회장은 2000년 7월28일 또하나의 치명적 소송에 휘말렸다.

소송을 낸 곳은 다름아닌 정몽준 의원이 최대주주로 있던 현대중공업이었다. 이익치 회장을 비롯해 현대증권, 현대전자에게 2억2천만달러를 돌려달라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이었다.

소송의 발단은 지난 97년 현대전자가 캐나다 금융기관인 CIBC에 현대투신 주식을 1억7천5백만달러에 넘기는 과정에 현대중공업이 현대전자와 현대증권으로부터 손해보전 각서를 받고 CIBC와 풋옵션(일정기간후 주식을 정해진 가격에 되사주는 계약)을 맺으면서 비롯됐다. 그러던 중 풋옵션 만기일이 돼 2000년 3월 CIBC가 각서를 근거로 현대증권과 현대전자에 재매수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두 회사가 자금난을 이유로 거절하자, 현대중공업에 이를 대신 요구해 현대중공업이 고스란히 2천4백78억원을 물어주게 됐다.

이에 현대중공업은 현대증권과 현대전자, 그리고 "현대중에 재산상 아무런 손실을 끼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준 이익치 회장을 상대로 2천4백78억원을 물어달라는 소송을 내기에 이르른 것이다.

이 소송이 걸린 뒤 얼마 안지나 현대증권 회장직에서 밀려난 이익치는 곧바로 가족을 데리고 미국행을 택했다. 소송 패소가 확실했고, 그럴 경우 온 재산을 환수당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지난 1월25일 1심 판결에서 법원은 이익치 당시 회장과 현대증권, 현대전자에 대해 현대중공업에게 손해배상 청구액의 70%에 달하는 1천7백18억원을 돌려주라는 판결을 내렸다. 현재 항소심이 진행중이나 1심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은 거의 없어, 이익치 전회장은 전재산을 환수당할 위기에 몰려있는 것이다. 이 전회장이 지난해 대선막판에 정몽준 후보의 주가조작을 폭로하며 귀국하기까지 오랜 기간 국내에 들어오지 않고 외국을 떠돌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두 아들, 뇌물 주고 카투사 등으로 빼돌려**

이익치는 이밖에 개인적으로도 치명적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논란에 휘말렸다. 자신의 두 아들이 보다 좋은 군대에서 근무토록 하기 위해 수천만원을 뿌린 혐의다.

박노항 원사 병역비리 사건을 수사중이던 검찰은 2001년 6월28일 "지난 97년 병무청 직원을 통해 박노항에게 8백만원을 전달, 부대배치 실무자들로 하여금 이익치 당시 현대증권 사장의 셋째 아들을 카투사에 선발되도록 한 현대전자 양모 이사를 제3자 뇌물교부 혐의로 불구속기소한다"고 밝혔다. 검찰은 "96년에도 이익치씨의 둘째아들 또한 박노항 원사를 통해 8백만원을 주고 특수부대에 입대시킨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당시 법적 처분을 받은 이는 현대전자 양모 이사였으나, 실제로는 이익치 회장이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따가운 시선이었다.

***"당신, 왜 왔어?"**

현대사태후 이익치 전 회장은 그룹내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다. 2000년초 왕자의 난 당시 그가 그렇게 현대그룹의 후계자로 만들려 했던 정몽헌 회장이 이제 존재가치마저 희미한 존재로 전락했고, 그가 숙정하려던 정몽구 회장이 사실상의 현대그룹 후계자로 우뚝 선 까닭이다.

이익치 전 회장의 비참한 위상은 지난해 3월 정주영 명예회장 사망후 극명히 드러났다.

당시 미국에 있던 그는 정 명예회장의 사망소식을 듣고 3월25일 빈소가 차려진 정 명예회장의 청운동 자택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정몽구 회장 등 유족측의 반응은 싸늘했다. 한 유족은 "왜 왔느냐"고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문상을 마친 뒤 기자들에게 "내가 몽헌 회장편에서 몽구 회장의 자동차 소그룹을 빼앗는 음모를 꾸며 경영권 분쟁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억울하다"며 "장자에게 자동차를 떼주어야 한다고 맨먼저 말을 끄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당시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도 내게 섭섭해 하는 것으로 아는데, 모두 명예회장의 뜻에 따라 움직였을뿐"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같은 해명에 대한 정몽구, 정몽준 측의 반응은 "돌아가신 명예회장의 이름을 팔지 말라"는 냉랭한 것이었다.

***'더티 네고'**

이익치는 지난해 대선과정에는 정몽준 후보를 겨냥한 폭로로 또한차례 배신자의 낙인이 찍혔다.

지난해 11월 초 '현대상선의 4억달러 대북송금설' 의혹이 한창이던 얼마 전 일이다.

한나라당 이성헌 의원은 국회 정무위의 금감위 국감에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5월 이익치 현대회장이 현대건설 김재수 부사장에게 대북송금을 지시했다"며 "현대건설은 보유하고 있던 1억5천만달러를 홍콩과 싱가폴에 있는 국제은행에 송금했고 송금된 돈은 6개 계좌로 나뉘어 북한으로 송금됐다"고 이익치 연루설을 주장했다.

한나라당 김문수의원은 이어 며칠 뒤인 10월4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현대그룹의 4억달러 대북 비밀지원 의혹에 관련된 주요인물은 모두 6명"이라며 이익치 당시 회장을 '6인방'중 하나로 지목했다. 그러나 어이된 일인지, 그후 이익치라는 이름은 한나라당의 의혹설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러던 중 지난해 11월27일 "몽준 후보가 현대 주가 조작을 주도했다" 이익치의 '도쿄 발언'이 나오자 그의 발언을 계기로 집중적으로 대정몽준 공세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가는 이익치가 '이런 사람에게 나라를 맡겨서는 안된다'는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에서 이번 발언을 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귀국시 전재산을 몰수 당하고 경우에 따라선 사법처리까지 받아야 할 위치에 있는 그가 '더티 네고(더러운 거래)'를 국내 정치권에 제안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익치의 행보는 끝없는 '감탄고토'의 연속이었다. 그가 감히 정몽헌 의장 빈소에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어지러운 행보의 결과라 하겠다. 필연적 인과응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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