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조그만 자물쇠가 달린 일명 '비밀 일기장'을 사서 쓴 적이 있었다. 일반 노트보다 서너 배 비싸게 팔았지만, 친구들도 모두 그런 일기장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실핀으로도 금방 뚫을 수 있을 만한 조악한 자물쇠였다. 그래도 그때는 그 자물쇠가 나의 비밀을 지켜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당시 나는 내 방을 갖고 있었지만, 방문을 잠그는 것은 금지됐다. 내 물건들, 특히 나의 속내가 담긴 기록들 중 부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들을 어디에 어떻게 숨겨야 할지가 늘 고민거리였다. 어느 날, 엄마가 내 일기장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연히 화가 나고 창피했다. 초등학생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생활과 비밀이 있다.
시간이 흐르고 아동·청소년기에 내가 부모와 맺었던 관계를 보다 한 발 떨어져서 회상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종종 아쉬웠다. 나는 부모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숨길지를 궁리하는데 골몰했지, 어떻게 부모에게 나의 일상과 생각을 전달하고 공유할지 고민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겪은 어려움이나 폭력 피해의 경험, 성(性)에 관련된 고민 등은 '당연하게도' 부모에게 말하지 못했다. 친구나 지인들과의 관계에서는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나에 대해 말하고 너에 대해 듣고자 하는 자발적인 의지'는 왜 당시의 부모와의 관계에서는 작동하지 못했을까? 부모와 떨어져 살게 되고 성인이 된 나중에서야, 그러니까 사생활이 생기고 내 삶의 독립성이 어느 정도 확보되고 난 뒤에서야, 나는 부모와의 대화가 편해지고 자연스러워질 수 있었다.
'부모의 자녀 감시'를 정책화하는 국가
우리 부모님은 평범하고 좋은 부모였다. 나는 충분히 사랑받았고 지원받았다. 청소년기의 내가 사생활을 누릴 수 없었던 건 우리 부모가 문제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회가 부모의 자녀 감시를 용인하고 조장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는, 부모는 자녀에 대해, 특히 미성년 자녀에 대해서는 모든 정보를 알 권리가 있다는 인식이 있다. 인식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정책화되는 사례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정부가 운영하는 'NEIS 학부모서비스'는 부모가 자녀의 학생생활기록부, 성적표, 시험별 정·오답표, 개인별맞춤학습 내역 등을 홈페이지 접속을 통해 볼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한다. 학생이 상점이나 벌점을 받을 때마다 그 세세한 내역을 부모에게 문자로 전송해주는 학교들도 있다. 서울학생인권조례에는 학생의 성적지향 등 성정체성에 관한 사생활 보호 조항이 있는데, 부모만은 예외로 규정해 두었다. 학교 측에서 만약 학생이 성소수자인 것을 알게 되었다면, 당사자의 동의 없이도 부모에게 알려도 된다는 의미다.
아마 청소년 자녀의 입장에서 최악의 정책 사례는 최근 실시된 '청소년 유해물 차단 어플 설치 강제화'일 것이다. 2015년부터 전국의 모든 청소년들은 '청소년 유해물 차단 어플'을 휴대폰 개통 시점부터 설치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설치 대상이 되는 어플들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중에는 부모가 자녀의 인터넷 접속 내역을 그대로 볼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하고, 자녀 휴대폰을 '원격 조종' 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 어플도 있다. 참고로 방송통신위원회가 만든 '스마트보안관'이라는 어플은 청소년 이용자의 정보를 대거 집적하면서도 제대로 된 보안 체계를 갖추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은 후 서비스를 중단했다.
위의 사례들과 같이 국가적 정책 차원에서 '자녀 감시'가 용인되고 권장되는 경우도 있지만, 기업에 의해 상품화되거나 장려되는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어 자녀의 손목 등 신체에 채울 수 있는 '위치추적기' 상품들을 별다른 절차 없이도 온라인에서도 쉽게 구매할 수 있다. 통신사에서는 자녀의 휴대폰 GPS를 통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서비스를 부모에게 제공한다. 집 내부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할 수 있는 서비스인 '홈 CCTV'를 설치하면, 자녀가 집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부모는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학원이나 독서실 등에서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등원, 하원하거나 외출할 때마다 부모에게 알림 문자를 보내주기도 한다. 한국의 부모는 돈만 쓴다면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감시상품들이 무분별하게 판매되는 상황에 국가는 아무런 규제를 하지 않는다.
부모에게 알려질까 두려워하는 청소년들
부모에 의한 미성년 자녀 감시는,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정당화되곤 한다. 하지만 감시받는 그 당사자의 입장에서도 과연 그렇게 생각될까. 부모의 권한이 성역 없이 보장되는 문화와 실제로 미성년 자녀를 감시하고 관리하도록 장려하는 정책들 때문에, 청소년들은 자신의 모든 것들이 동의 없이 알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겪는다.
청소년의 성(性)을 금기시하고 경시하는 문화 속에서, 대다수 청소년들은 자신의 연애나 성적 경험 등을 부모에게 숨기고 싶어 한다. 실제로 연애나 성적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부모가 알게 될 경우 폭력을 당하거나 관계를 끝낼 것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특히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성정체성이나 연애 상대에 대해 부모가 알게 될 가능성에 공포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부모의 지지와 지원보다는 거부와 비난을 먼저 예측하게 되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알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청소년의 성(性)적 위기 상황을 초래하기도 한다. 카드 내역을 부모가 조회할까 봐 콘돔 구매를 망설이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성병이나 기타 사유로 산부인과를 방문해야 할 때 부모가 카드 내역이나 의료보험 기록을 볼까 봐 가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청소년들이 있다. 성폭력 피해를 입었는데 이 사실을 부모에게 알릴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신고를 단념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 사실 법적으로 범죄를 신고하는 것은 미성년자도 단독으로 가능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고, 경찰이나 해바라기센터 등에서 부모의 동행을 요구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부모의 감시와 관리가 촘촘해질수록 청소년이 안전할 것이라고 여기는 인식이 있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있다. 부모에게 알려지는 것이 부모의 폭력 가해와 연결되기도 한다. 시험성적을 알게 된 부모가 신체적·언어적 폭력을 가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부모가 성정체성을 알고 난 후 폭력을 당하거나 집에서 쫓겨난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너무 많아서, 몇 해 전부터는 청소년 성소수자 전용 쉼터가 이들을 지원하고 있다(☞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바로가기). 성 경험이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폭력을 가하거나 집에서 나갈 것을 명령하는 경우 등, 차라리 부모가 몰랐다면 자녀가 더 안전했을지도 모르는 사례들이 결코 없지 않다.
청소년이 누릴 수 있는 사회 안전망, 사회가 책임져야
미성년 자녀에 대한 부모의 감시를 용인하고 허용하는 정책과 사회적 인식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그만큼 청소년을 위한 사회 안전망이 부족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부족한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대신, 개별 부모들에게 청소년에 대한 관리와 통제의 책임과 권한을 과도하게 부과하는 손쉬운 해결책을 택한 것 아닐까. 2001년부터 프랑스에서는 청소년도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임신중절(낙태) 시술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임신중절을 하고자 하는 청소년은 자신이 신뢰할 만하다고 선택한 성인과 동행하면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시술을 받을 수 있다. 사회보장보험을 통해 비용도 면제받을 수 있다.
현재 일부 지역에서는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됨에 따라 학생의 소지품을 뒤지거나 검사하는 행위가 금지(안전상 긴급한 사유는 제외)되어 있다. 교사에 의한 일기장 검사 등도 사생활 침해 우려가 제기되며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학교에서의 학생 사생활 보호도 확대되어야 하지만, 가정에서 구성원들의 사생활을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에 관한 논의도 시작돼야 한다. 개별 부모에게 전적인 권한과 책임이 주어지고 청소년이 개인이자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이 없는 사회는,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위험으로 내모는 한편 보호를 명목으로 부모에 의한 인권 침해를 용인하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에게도 청소년의 존엄과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 안전망이 갖추어지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감시가 아닌 자발적인 소통과 신뢰에 기반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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