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O 기본협약 비준을 둘러싸고 대통령의 비준이 먼저냐, 국회의 동의가 먼저냐 논쟁이 뜨겁다. '노사 단체에 대한 결사의 자유와 노동자의 단결권 보장'을 내용으로 하는 ILO 협약 87호와 '노동자 단체교섭권의 실질적인 보장을 위해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 금지'를 명시한 ILO 협약 98호에 대한 대통령의 비준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헌법, "대통령은 조약을 비준하고"
우리 헌법은 국제조약에 대한 비준권이 대통령에 있고, 그 조약이 재정과 입법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 한하여 대통령이 비준한 조약에 대한 동의권을 국회에 주고 있다.
국회의 동의권에 대한 해석은 헌법을 문자 그대로 읽고 이해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대통령은 조약을 비준하고(73조), 국회는 재정 또는 입법 사항에 관한 조약의 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60조)." 다시 말해, 국회의 동의권은 대통령의 비준 행위에 뒤따르는 사후적 정치 행위다.
국회가 동의를 거부해 대통령이 비준한 조약을 거부할 수 있지만, 이를 두고 비준권을 국회가 갖는 것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우리나라는 의회제가 아니라 3권 분립에 기반한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대통령과 국회의 의견이 충돌하는 것은 이례적인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대통령이 올린 입법안을 국회가 거부하듯, 대통령이 비준한 조약을 국회가 거부할 수 있다. 대통령 비준권과 국회 동의권의 자연스러운 갈등과 충돌을 두고 '위헌' 운운하는 것은 대통령제와 3권 분립을 전제하는 헌정 체제로 볼 때 억지 주장에 가깝다.
국제법과 국내법의 충돌 조정은 사법부 역할
대통령이 비준한 조약에 대한 동의를 국회가 거부하여 국제법과 국내법의 충돌이 일어나는 상황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다.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거쳐 ILO 협약을 비준한 다음, 이에 대한 동의를 국회에 요청했는데, 국회가 거부했다고 가정해보자. 관계 부처 장관은 국무회의 의결 다음날 '비준 의향서'를 ILO에 보낼 것이고, 1년이 지나면 ILO는 관련 협약이 한국에서 효력을 발생한다고 볼 것이다.
그리하여 대통령이 비준한 국제법과 국회가 고집하는 국내법 사이의 충돌이 발생하는데, 이것은 3권 분립을 보장한 우리 헌정 체제에서 큰 문제가 되지 못한다. 국제법과 국내법, 신법과 구법이 해석과 효력의 문제로 충돌할 때, 이를 조정하고 판단하는 일은 사법부의 몫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비준'을 '대통령의 재가'로 비트는 고용노동부
정부에서 ILO협약 정책을 총괄하는 김대환 고용노동부 국제협력담당관은 "국회 동의는 대통령이 조약을 비준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므로,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의 경우 '대통령 재가'만으로 비준이 가능한 것이 아님"이라고 헌법에도 없는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우리 헌법에는 "대통령의 재가"라는 이상한 용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김대환 고용노동부 국제협력 담당관의 잘못된 주장과 달리, 대통령이 비준권 행사를 위해 심의를 거쳐야 하는 헌법기관은 국회가 아니라 국무회의다. 우리 헌법은 고용노동부 장관도 정식 멤버인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 사안으로 '조약안'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89조 3항).
고용노동부가 소개한 비준절차 관련 헌법 조항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김대환 담당관의 주장처럼 "최종적으로는 국회 동의가 있어야 비준이 가능하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
국회는 '사전 동의권' 아닌 '동의권'만 보유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 헌법은 국회의 '사전 동의'가 아니라, 국회의 '동의'를 규정할 뿐이다. 국회의 동의 여부는 조약을 비준하려는 대통령의 의지와 행위를 구속하지 못한다. 그리고 대통령이 비준했지만 국회가 동의하지 않는 조약의 효력 문제는 사법부가 판단하면 된다.
사정이 이렇기에 국책연구기관의 노동법 학자는 "ILO 협약과 관련하여 '국회의 동의'를 받는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지 여부가 규범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체결한 조약 중 국회의 동의를 받은 조약은 30%이내"라고 썼다.
또한 자칭 타칭 ILO 전문가로 인정받으며 지난 10년 동안 ILO 협약에 관련된 정부의 연구용역을 사실상 독점하면서 고용부 관료들의 '선(先) 입법' 주장을 앞장서 설파했던 어느 법대 교수도 최근 "플랜B로 선 비준을 고민"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노동 문제 이해가 빈약한 국회 환노위원장
노동 문제는 잘 모르면서 노동권을 부정하려는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갖고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을 맡은 김학용 자유한국당 의원은 ILO 기본협약은 유럽적 기준이라는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다.
187개 ILO 회원국 중에 ILO 87호 '결사의 자유' 협약을 비준한 나라는 155개로 비율로 따지면 82.8%에 달한다. 비준국을 살펴보니 앙골라,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콩고, 가나, 마다가스카르, 페루, 필리핀,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토고, 짐바브웨 등이 눈에 띤다. 김학용 의원에게는 이들 나라가 유럽 국가로 보이는 모양이다.
아프리카 나라들 대부분 ILO 기본협약 비준
ILO 98호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 금지' 협약을 비준한 나라는 166개로 비율로 따지면 88.8%에 달한다. 카메룬, 코스타리카, 쿠바, 엘살바도르, 피지, 온두라스, 케냐, 쿠웨이트, 몽골, 네팔 등이 눈에 띤다. 이 나라들 역시 김학용 의원의 눈에는 유럽국가로 보이는 모양이다.
혹시나 싶어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김학용 의원의 노동 관련 연구나 경력이라고는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노동정책 수료'와 '중앙노동정책학회장'뿐이다. 사반세기 넘게 노동 문제를 천착해온 필자지만,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에서 노동정책을 가르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역시 들어본 적 없는 '중앙노동정책학회'라는 모임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시간을 내어 관련 대학원과 학회의 논문 검색해야겠다.
"조약 체결에서 의회의 관여는 제한적"
고용노동부가 주장하는 '선 입법-후 비준’ 주장의 법률적 근거는 없다. "관행에 따르면"이라거나 "논문에 따르면"이라는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주장만 나열할 뿐이다. 필자가 본 논문엔 이렇게 돼 있다.
"미국을 포함한 22개국의 입법례를 분석한 결과 조약의 체결 권한은 대체로 대통령 또는 대통령을 포함하는 집행부에 부여돼 있다. (중략) 조약 체결이라는 국가작용의 중점은 역시 집행부에 있고, 의회의 관여는 조약 체결이라는 외교 행위의 성질상 제한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점은 공통적인 것으로 확인됐다. 결국 비교 헌법적 고찰로 우리의 헌법 해석('비준권은 결론적으로 대통령이 행사한다'로 읽자. 필자)을 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대통령의 비준과 국회의 동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정치적 행위다. 이를 뒤섞어 고용노동부 김대환 담당관이 말하듯 국회가 사실상의 비준권인 '사전 동의권'을 갖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대통령의 비준권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는 우리 헌법에 대한 모독이자 부정이다.
(위 글은 4월 15일 자 <매일노동뉴스>의 저자 칼럼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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