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나 단체의 중요서류를 직원들이 무단으로 가져갔다면 절도죄에 해당한다. 노조원들이 회사의 부당한 행위에 항의하며 기업의 기밀 서류를 빼갔다가 구속되는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학생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3월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이기준 전 총장 퇴진 등을 요구하며 총장실 점거 농성을 주도하며 학교 기밀 서류 및 컴퓨터 파일 등을 탈취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학사제명되는 등 중징계를 받기도 했다. 당시 학생들은 압류한 자료 중에서 이기준 총장의 연간 수억원대에 달하는 과도한 판공비 사용 내역등을 발견해 이 총장 퇴진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었다. 이처럼 적잖은 논란의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대는 탈취 행위의 '불법성'을 문제삼아 학생들을 징계했다. 원칙은 지켜야 한다는 게 서울대측 논거였다.
***통념을 깨트린 조흥은행 사태**
그런데 이같은 일반 통념을 뒤엎는 사태가 발생했다. 지난 28일 정부 지분 매각작업이 진행중인 조흥은행에서 이에 항의하는 노동조합이 '1백대 기업 대출자료 원본(대출건철·Loan File)' 등 은행 실사에 필요한 핵심자료를 기습적으로 탈취하는 사태가 일어났는데도 이에 대해 뭐라는 사람이 없다. 은행 경영진을 물론이고 금융감독당국이나 사법당국 등도 '침묵'으로 일관하기란 마찬가지다.
조흥은행 노조는 이날 합병저지를 명분으로 실사담당 부서인 은행 본점 자본관리실을 급습, 정부지분 매각을 위한 실사자료 인쇄물과 담당 부서 전직원의 컴퓨터, 디스켓, 채권서류 등 일체의 자료를 '압수'했다. 지난 23일 정부지분 입찰 결과, 신한금융지주회사가 정부 지분 전량을 매입하겠다는 의향서를 제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흥은행내 위기감이 확산된 데 따른 노조측 대응전략의 일환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자본관리실 직원들의 대응이다. 노조측은 현장에 있던 서류는 물론 부서 직원 모두의 컴퓨터와 디스켓을 빼돌리는 과정에 자본관리실 직원들과 충돌이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염화시중의 미소' 또는 '물밑 교감'이 교류됐음을 감지케 하는 대목이다.
***조흥은행의 '역사의 저력'**
이같은 조흥은행내 분위기는 일면 충분히 납득 간다. 조흥은행은 그렇게 간단한 은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IMF사태때 여타 6대 시중은행들과 마찬가지로 조흥은행은 기업대출 부실로 존립이 위태로울 정도로 크게 휘청거렸다. 그 결과 정부 공적자금 투입으로 위기의 터널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조흥은행이 조기에 위기의 터널을 벗어날 수 있었던 데에는 조흥은행 임직원 자체의 노력과 저력도 큰 역할을 했다.
조흥은행은 국내 은행중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1백여년 된 은행이다. '역사의 저력'은 간단치 않은 법이다. 한 시중은행장은 금주초 금융단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조흥의 저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많은 전체 인구의 1% 가운데 절반가량이 어떤 형태로든 조흥은행과 거래하고 있다. 첫번째 주거래은행으로 삼든가, 아니면 두번째 거래은행으로 삼든가 하는 식이다. 특히 강북의 돈 많은 부자들은 압도적으로 조흥은행 고객이 많다."
조흥은행은 이처럼 남이 갖고 있지 못한 엄청난 저력을 갖고 있다. 특히 은행들의 주수익원이 기업금융에서 소비자금융, 그것도 돈많은 고객을 타깃으로 한 '프라이빗 뱅킹(PB)'으로 전환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조흥의 저력이 특히 빛을 발하고 있다.
신한지주나, 심지어는 제일은행까지도 조흥은행 인수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도 조흥의 이같은 막강한 잠재력 때문이다. 조흥 임직원들이 다른 은행들이 인수 시도에 강력반발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조흥 임원과 금융당국의 '강건너 불구경하기'**
그러나 아무리 명분이 정당하고 울분이 터진다 해도 수단은 절제의 미덕을 갖춰야 한다. 자칫 수단이 금도를 넘어서면 명분까지 훼손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번 노조의 행위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조흥은행 노조는 "자본관리실이 정부지분 매각과 관련 각종 실사자료를 작성하고 제출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부서로 이번에 압수한 자료는 실사에 필요한 은행의 각종 현황이 담겨 있어 이를 다시 작성하는 데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노조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공개된 IR 자료뿐 아니라 은행경영에 대한 중요 정보들은 대부분 확보한 것으로 본다"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매각을 저지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더욱 유감스러운 대목은 이번 사태에 대응하는 경영책임자나 금융당국의 태도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조흥은행 경영진이나 정부는 애써 못본 체하고 있다.
우선 홍석주 조흥은행장을 비롯한 임원들의 태도가 대단히 미온적이다. 은행의 핵심자산이자, 거래기업들의 모든 경영비밀이 담겨진 자료가 절취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기껏 흘러나오는 얘기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겠다는 정도다. 조흥은행의 대부격인 위성복 이사회 회장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조흥은행 임원들이 보여준 태도는 '방조' 차원을 넘어선 '적극 동조'에 가깝다.
금융당국의 대응은 더욱 한심하다. 입찰에 참여한 4개 회사는 내달 11일까지 실사를 벌인 뒤 인수가격 등 최종 매입조건을 11월 19일까지 제시해야 한다. 특히 이들은 조흥은행의 소비금융 저력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쌍용.아남 등 기존 대기업대출의 잠재부실에 대해서는 의혹의 눈길을 던지고 있어 노조가 가져간 1백대 기업 대출자료는 반드시 검토해 보아야 할 필수자료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시일이 촉박함에도 정작 금융당국 관계자는 "노조가 가져간 자료 중 1백대 기업에 대한 대출자료 원본은 인수희망자가 자산건전성 파악을 위해 반드시 요구하는 핵심적인 자료"라며"노조가 끝까지 내놓지 않으면 매도자(정부)에게 불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고 우려하는 게 고작이다. 한마디로 말해 강건너 불구경 하는 식이다. 이 정도가 되면 정부는 더이상 정부가 아니다. 말 그대로 '무정부'다.
***임기말 보신주의의 극치**
현재 노조가 내세운 명분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조흥은행의 민영화 방향과 원칙이 투명하게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구속력없는 투자의향서만을 제출한 기관들에게 실사 기회를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정부한테 분명한 입장을 밝히라는 것이다.
정부 입장은 이에 대해 조흥은행 지분의 80%가 정부 것이니, 직원들은 지분매각 협상에 개입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노조의 집단행동을 우려, 지분매각 협상에 필수불가결한 실사자료 절취에 대해선 꿀 먹은 벙어리 신세다. 임기말 보신주의의 극치다.
현정부가 이룩한 그나마의 위업중 하나가 금융개혁이라는 게 국내외의 대체적 평가다. 국제금융계에선 한국금융이 일본을 앞질렀다는 평가도 흔히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정부는 스스로 쌓은 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DJ정부의 또하나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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