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이나 김대중 대통령이 지명한 국무총리 후보가 낙마했다. 김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두 아들의 구속 못지않게 참담한 일일 것이다.
이를 단지 여야 정쟁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총리서리 지명후 검증과정 및 인사청문회때 표출된 '무서운 민의'가 연이은 인준 부결의 결정적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28일 오전까지 장대환 인준 여부를 결정짓지 못했던 한나라당이 부결로 방향을 급선회하게 만든 것도 광범위한 인준반대 여론이었다.
***박지원 실장의 호언장담, "장대환 지명자는 모든 문제에서 하자가 없다"**
상황이 이 정도가 되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민의를 잘못 읽는 것처럼 큰 과오도 따로 없기 때문이다.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 1차적 책임자는 대통령에게 부적격자를 천거한 인물이다. 보다 정확히 적시하면 박지원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박 비서실장은 지난 9일 장대환 지명자 발표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여러 기관에서 검증을 완료했으며, 경력이나 모든 문제에서 하자가 없는 것으로 확인했다"고 호언했다. "이번에는 자신 있다"는 장담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20일 뒤인 28일 장대환 지명자에 대한 인준은 부결됐다.
대통령 보좌인사중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인식이 청와대내에서도 읽히고 있다. 금명간 청와대 비서실 관계자들이 대통령에게 일괄 사표를 제출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상황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대통령의 신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미묘한 기류도 읽히고 있다. 작금의 사태의 책임자로 민정수석을 꼽는 시각이 그런 대표적 예이다. 각료 인선작업은 보통 민정수석실이 보유중인 존안자료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장대환 지명자를 추전한 박 실장의 계산법**
하지만 이런 식의 접근은 책임 떠넘기기라는 게 지배적 시각이다. 책임을 진다면 박지원 비서실장이 질 일이지,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겨선 안된다는 지적이다.
장상 지명자가 부결된 후 장대환 지명자를 고르는 과정 자체에 박지원 실장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매일경제신문 사장이던 장대환씨가 총리서리가 되기까지에는 몇가지 요소가 중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첫번째는, 그가 언론계 사장으로 현정부와 관계가 불편한 조선, 중앙일보 등의 오너들과 친분이 두텁다는 점이었다. '동업자 의식'에 따라 언론이 대충 넘어가 줄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셈이다.
두번째는, 장 지명자가 성공한 젊은 CEO(최고경영자)라는 대목이다. 그를 총리로 내세울 경우 정부가 임기말에 '경제'에 전념한다는 이미지외에 연말대선에 세대교체 바람이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정치적 고려도 작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세번째는, 인사권자인 대통령의 호감도이다.
네번째는, 장상 지명자때도 읽혔듯 의외의 인물을 내세우는 데 따른 '깜짝 쇼' 효과다.
이같은 제반 요소를 고려해 장대환 지명자가 낙점됐고, 그동안 언론과의 공개대면을 기피해온 박 실장은 이에 기자들 앞에 나서 "여러 기관에서 검증을 완료했으며, 경력이나 모든 문제에서 하자가 없는 것으로 확인했다"고 호언장담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모든 문제에서 하자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던 장대환 지명자는 장상씨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많은 하자를 노출했고, 결국 민의에 밀려 낙마했다. 박지원 비서실장으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는 상황 전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실장은 지금 이 순간까지 침묵하고 있다.
***"공은 내게로, 책임은 밑으로 떠넘기는 식은 곤란"**
얼마 전까지 청와대 비서실에 재직했던 한 인사는 "박지원 실장은 수석비서 시절에도 청와대의 대통령 다음 가는 2인자였다"며 "지금은 명실상부한 비서실장인 마당에 아랫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해선 안될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 청와대에는 본인이 트러블 메이커(사고 제조기)이면서도 정작 사고가 터지면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마치 자신만이 사고수습을 위해 동분서주한 것처럼 행동해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며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을 통해 일깨워주었듯 책임은 자신이 지고 공은 아랫사람에게 돌리는 지도자의 미덕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장대환 지명자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청와대 비서실이 지난주말 '국가신인도 위기론'을 제기했던 대목에 대해서도 청와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국내 굴지 대기업인 S그룹의 임원은 "총리 인준안이 다시 부결되면 국가신인도가 떨어지고 주가도 폭락할 것이라는 청와대 주장을 접하고 너무 어이가 없었다"고 개탄했다.
그는 "아무리 정정이 불안하더라도 경제는 끄덕없다고 외국투자가들을 안심시켜야 할 청와대가 앞장서 주가 폭락 운운하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반문하며 "경제위기론을 증폭시켜 총리 인준안을 통과시키려 한 청와대 관계자도 문책대상"이라고 말했다.
이 또한 비서실 최고 책임자인 박지원 실장이 책임져야 할 대목이라는 지적이다.
***박 실장의 귀추를 주목할 때**
레임덕이 심각한 현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크게 의지하는 박지원 비서실장을 교체하라는 주문은 지나친 요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지원 실장은 3홍 비리로 시작됐고 2명의 총리 지명자 인준부결로 극대화된 일련의 레임덕에 대해 대통령의 최지근거리에 있었던 보좌역으로 누구보다 책임이 크다.
그런 만큼 박 실장은 최소한 대통령에게 재신임을 묻고, 국민앞에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것도 레토릭이 아니라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통절한 모습으로.
박지원 실장의 처신을 주목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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