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한 '권력의 초상'이 또다시 실체를 드러냈다.검찰이 10일 발표한 김홍업 기소장을 보면, 우리나라의 이른바 '주류'라는 권력집단이 얼마나 한심스러운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단지 대통령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김홍업 주변에 내로라하는 재벌등 우리나라 각계 권력층이 불나방처럼 모여들었고, 김홍업은 이 장면을 즐기며 국정원, 청와대, 국세청, 예금보험공사, 신용보증기금 등 권부를 쥐락펴락하며 배를 불려온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가 IMF위기로 98년의 경우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많은 숫자의 국민이 자살을 했고 1백만 가장의 실업으로 숱한 가정이 파괴되는 극한고통기였다는 대목을 고려하면, 오고간 뇌물액수의 많고적음을 떠나 역사상 가장 죄질이 나쁜 범죄중 하나라 아니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국민들을 분노케 한 대목은 현대,삼성그룹이 또다시 정경유착의 고리에 깊숙이 관련됐음이 드러난 대목이다. 말로만 '투명경영' 운운할뿐, 변한 게 없음을 다시 한번 드러냈기 때문이다.
***"대가성 없는 활동비였다고?"**
검찰은 98년 3월부터 2000년 2월까지 DJ정부 집권초기 2년동안에 김홍업이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부터 16억원, 삼성그룹으로부터 5억원 등 도합 21억원을 '활동비' 명목으로 받아 사용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 대목에 대해 대가성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단순 증여세 포탈혐의로 김홍업을 기소했다.
우선 이같은 사실을 공개한 검찰의 노고를 치하할 일이다. 삼성, 현대는 아직도 우리사회에서 감히 무시할 수 없는 거대권력이다. 따라서 이같은 권력의 비리를 밝혀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검찰의 달라진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대가성을 입증 못했다는 이유로 재벌들은 빼고 김홍업만을 기소한 대목은 검찰의 또다른 한계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공짜 치즈는 쥐덫 위에만 있다"는 러시아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 아무리 재벌이라 할지라도 대통령 아들에게 공짜로 거액의 용돈을 건네줄 이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정주영 명예회장의 경우 계열사를 동원해 이미 몇차례 유통된 까닭에 자금추적이 어려운 10만원권 헌수표를 무더기로 마련해 전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단순한 용돈 제공으로 보기란 애당초 무리다. 주는 쪽도 받는 쪽도 자신들의 행위가 금융실명제 위법행위임을 잘 알고 돈세탁을 했었기 때문이다.
***현대, 뇌물제공후 반도체,자동차,투신사 무더기 인수**
더욱이 뇌물이 건네진 김대중정부 초기였던 당시는 재벌들이 감히 숨도 크게 못쉬던 살벌한 시절이었다. 김대중정부는 IMF위기 발발의 주요 책임자가 과잉,과오 중복투자를 일삼은 재벌로 판단, 재벌들에게 부실자회사 정리, 빅딜(사업맞교환) 등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압박했다. 재벌들은 정부 눈치보기에 급급했고, 권력심층부에 줄을 대기 위해 부심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맨처음 10억원의 뇌물을 건넨 시기는 98년 7월로 밝혀졌다. 이 시기는 98년 6월18일 현대, 삼성, 대우, LG, SK 등 5대재벌이 정부의 부실계열사 퇴출압력이 밀려 20개 계열사를 퇴출시킨 직후였다. 그러나 당시 퇴출된 계열사는 대부분이 구멍가게 수준의 계열사들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형식적 구조조정에 대한 나라 안팎의 비난여론이 대단하던 시기였다. 재벌들은 이같은 비난여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요로와 접촉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더욱이 당시는 이른바 정부의 '빅딜' 압박이 대단하던 시기였다. 중복과잉투자의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동일투자부문을 한 재벌이 맡도록 한다는 정부의 이 구상이 밝혀지자, 재벌들은 서로 주요산업부문을 배정받기 위해 치열한 막후로비를 펼쳤다. 이같은 빅딜 전쟁은 현대그룹이 LG반도체, 기아자동차, 한남투신 등을 잇따라 따냄으로써 외형상 승리한 것처럼 비쳤다(역설적으로 이같은 빅딜이 훗날 현대의 몰락을 자초했지만).
현대그룹의 최고총수인 정주영 명예회장이 김홍업에게 돈을 준 시점은 이처럼 현대가 사활을 걸고 치열한 대정부 로비를 전개하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과연 김홍업에게 건네진 돈에 대가성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
***삼성, 뇌물제공후 삼성생명 상장 추진**
삼성그룹의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이 김홍업에게 5억원을 건넸다는 99년 12월도 삼성으로서는 대단히 예민한 시기였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자동차 사업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신이 보유중이던 삼성생명 주식 4백만주를 내놓겠다고 선언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회장이 이 선언을 하기 직전에 장남 이재용씨를 위시한 세 자녀를 편법적 증여방식으로 에버랜드 최대주주로 만들었고, 이 에버랜드를 다시금 삼성생명을 지배하는 최대주주그룹으로 만드는 이른바 '지주회사 이전' 작업을 완료했으며, 이 과정에 거액의 증여세 탈루 혐의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이건희 회장 선언의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게 됐다.
더욱이 문제가 된 대목은 이회장이 자신의 삼성생명 보유 주식을 삼성차 채무 변제수단으로 내놓으면서 삼성생명 주식을 주당 70만원으로 산정한 대목이었다. 이같은 계산방식에 따르면 이 회장은 2조8천억원의 개인자산을 과오투자의 대가로 흔쾌히 내놓은 게 되나, 이재용씨등은 도리어 10조원대의 천문학적 반대급부를 챙기게 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당연히 세간에서는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정부의 대응도 미심쩍었다. 정부는 이건희 회장의 사재 헌납 소식이 나오자마자, 즉각 삼성그룹의 오랜 숙원이던 삼성생명을 2000년 3월까지 상장시키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채권단이 삼성차 채무를 없애기 위해선 이회장이 내놓은 삼성생명 주식을 상장시켜야 한다는 논리에서였다. 결국 이같은 상장 구상은 삼성생명 상장시 수익금 배분 문제등을 둘러싼 여론의 거센 반발로 무산됐으나, 이런 일련의 과정은 한 판의 짜고 치는 고스톱 같다는 냄새를 물씬 풍겼다.
이렇게 예민한 시기에 이건희 회장의 오른팔 격인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이 김홍업에게 5억원을 건넨 것이다. 이를 단순한 '활동비' 또는 '보험료'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현대,삼성뿐이랴"**
재계 일각에서는 "현대, 삼성이 재수가 없어 걸렸을뿐"이라고 말한다. 뇌물이 건네준 당시의 삼엄한 분위기를 고려할 때 어디 현대, 삼성만 돈을 건넸겠느냐는 반문이다.
한 재계 고위관계자는 "다른 재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단한곳 대우만 예로 들어보자"며 "당시 사정이 가장 다급했던 곳은 다름아닌 대우그룹의 김우중회장이었고, 이에 김우중회장은 97년말 대선직전에 김대중후보에게 승부수를 던짐으로써 김대중정부 출범후 초창기에 전경련회장을 맡고 빅딜 아이디어를 내 이를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등 가히 '김우중 전성시대'를 열었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 최규선이가 공개한 김대통령과의 대화록에서 김대통령이 김우중에게는 신세를 많이 졌으니 봐주라고 말한 대목이 나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 현정부 초기에 가장 많은 특혜를 본 그룹은 다름아닌 대우였다"며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번에 검찰이 현대, 삼성의 거래내역만 밝힌 대목을 보며 미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월가에 이어 한국에서 터져나온 '신뢰의 위기'**
더 큰 문제는 이같은 싸늘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현대나 삼성 등 재벌들은 '보험료' 운운하며 근원적 반성없이 이번 사태를 희석시키려 하고 있다는 대목이다.
재계는 얼마 전 전경련 등 대변단체를 통해 "음성적 정치자금 지원을 안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번 김홍업 스캔들을 보면서, 또한 이번 스캔들에 대한 해당 재벌들의 반응을 보면서 국민들은 "과연 안할까"라는 강한 의구심을 느끼고 있다. 국민뿐 아니라, 이들 기업에 투자하고 있는 국내외투자가들도 마찬가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지금 미국이 각종 분식회계로 '신뢰 붕괴의 위기'에 빠지면서 공황까지 우려되는 심각한 국면에 빠져들고 있다. 이 때 우리나라에서 또하나의 '신뢰 붕괴의 위기'가 발생했다. 과연 해당 경제주체들이 이번 위기를 위기로나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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