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8강전에서 우리나라가 이탈리아를 격파한 반면, 일본이 터키에게 패해 희비가 엇갈렸을 때 일이다. 한 일본 언론은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한국은 역사를 만들고 있고, 일본은 이미 역사가 됐다."
그렇다. 우리 태극전사들은 지금 역사를 만들고 있다. 그것도 장장 72년의 월드컵 축구사상 가장 극적이고 위대한 역사다.
지난 72년 동안의 월드컵 축구사에는 크고 작은 파란이 잇따랐다. 그러나 '첫 승',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16강'을 지상목표로 출현한 약체팀이 내로라 하는 우승후보들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4강에 진입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우리는 지금 사상 초유의 역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니, 앞으로도 이 기록은 쉽게 깨질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은 '신화'이다.
***세계를 모두 벌떡 일어서게 만든 '빛고을 대혈전'**
22일 스페인과의 '빛고을 전쟁'은 유감없는 대혈전이었다. 모든 선수가 몸안에 남아있는 마지막 땀방울까지 모두 뽑아낸 전쟁이었다.
스페인은 과연 '무적함대'라는 별명이 부끄럽지 않은 강팀이었다. 빼어난 개인기로 쉬지 않고 우리 골대를 위협했다. 태극전사들은 불리했다. 이탈리아와 연장전까지는 혈전을 치른 뒤 불과 사흘밖에 못 쉬고 나오다 보니 몸이 마음을 따라가 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태극전사들은 필사적으로 골문을 지켰다. 그리고 연장전. 스페인 선수들도 초죽음 상태가 됐다. 연장전은 체력이 아닌 근성의 싸움이었다. 불굴의 투지로 연장전도 무승부로 끝냈다. 마침내 1백20분 혈전이 끝난 것이다.
그리고 전사들의 고독한 1대1 전쟁이 시작됐다. 우리 팀의 월드컵 진출 사상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승부차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하지 않았다. 도리어 마음 속에는 '이길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8강전에 오르기까지 이을용, 안정환 두 선수가 페널티킥을 실축한 쓰라린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우리 태극전사들에 대한 '강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운재 선수가 믿음에 보답했다. 이날 몇차례 결정적 실점 위기를 극적으로 막아낸 이운재였다. 그는 세번 골문을 내줬다. 그리고 네번째 마침내 그는 날카로운 독수리의 눈으로 골의 진로를 읽어냈고 순식간에 몸읅 날려 멋지게 쳐냈다.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우리팀 키커로 나선 홍명보 선수가 가볍게 골을 성공시키며 승리를 확인했다.
이로써 빛고을 대혈전은 대한민국의 승리로 끝났고, 마침내 '4강 신화'가 탄생했다.
이 순간, 한반도는 대폭발했다. 그리고 지구촌 전체가 경악했다. 축구황제 펠레는 한국-스페인전에 앞서 "한국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나라"라며 한국의 승리를 예언했었다. 펠레의 말처럼 도대체 한국은 어디까지 질주를 계속할 것인가. 누가 한국의 질주에 제동을 걸 것인가. 정말 요코하마 결승전까지 가려는 것인가.
***지금 우리는 '한국의 신화' 이상의 '아시아의 신화'를 만들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라틴 킬러'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미안하게도 우리나라에게 침몰한 월드컵 우승후보들은 한결같이 라틴계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이 그랬고, 이탈리아가 그랬고, 스페인이 그랬다.
라틴계는 백인종 가운데 가장 우리와 기질이 유사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화끈하고 다혈질이고 예술적이다.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축구를 엄청 좋아해 이들 국가에서 펼쳐지고 있는 프로 리그는 지금 전세계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선수들이 펼치는 세계 최고의 리그들로 꼽히고 있다. 그런 만큼 이 믿기지 않은 연전연패에 지금 라틴계 유럽은 쇼크 상태에 빠져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이란 쳐다보지도 않았던 축구후진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번 한국의 라틴계 국가 연전연파는 이들 라틴계 국가뿐 아니라 세계축구계에 미증유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며칠 전 독일의 명선수, 명감독이었던 베켄바우어는 "세네갈이 8강이 올라왔으나 아프리카의 시대는 끝나가고 한국으로 대표되는 아시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세계 명장다운 빼어난 통찰력이었다.
그렇다. 지금 한국은 한국의 신화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니라, '아시아의 신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더이상 세계의 변방이 아니다. 이제는 중심이 될 때다**
지난 몇년간 세계무대에서 아시아는 얼마나 비참한 이름이었나.
97년 외환·금융위기로 한때 '세계의 성장엔진'이라 불리던 아시아는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우리나라는 더이상 '아시아의 용'이 아닌 '아시아의 지렁이'라 불렸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해, 거의 나라 취급조차 못받을 정도로 철저히 묵살됐다. 그러나 이제 한국이 아시아의 자존심을 되살렸다. 아시아국가들이 한국의 승리에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동안 일본에게 치이고 중국의 위협에 쫓겨온 한국은 이제 '아시아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아시아 국가가 월드컵 4강전에 오른 것은 우리가 최초다. 그리고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결승전까지 노리는, 어이없을 정도로 '겁없는 나라'는 앞으로도 당분간 목격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축구 한가지만 갖고 중심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기적을 만들어낸 강인한 돌파력과 근성'이 있다. 실제로 지금 아시아 국가들은 외환위기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4강 신화'를 이룩해낸 한국을 경이와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돌파력과 근성을 앞세운다면 한국은 모든 분야에서 아시아의 중심,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승리로 우리는 더이상 지구촌의 변방이 아닌 지구촌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강한 자신감을 얻어낸 것이다. 돈으로 계량불가능한 승리의 전리품이다.
젊은 태극전사들에게 무한한 찬사를 보내도 지나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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