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이 21일 밤 마침내 본인이 직접 나서 대국민 사과를 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저녁 당초 예고했던 시간보다 10여분 늦은 저녁 7시40분께 TV에 나와 침통한 어조로 3분여동안 직접 본인이 작성해온 사과문을 읽어내려갔다.
보기에 안쓰러웠다. 군사독재와 목숨을 걸고 싸워온 민주투사의 상징이자, IMF위기 극복의 선장이었으며, 남북정상회담 개최의 주역이었고, 한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김 대통령의 지금같은 모습이란 결코 보기 좋은 장면이 못됐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도 "지금 고개를 들 수 없는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 앞에 섰다"고 자신의 '참담한 심정'을 밝혔다. 김 대통령은 또한 "저의 처신에 대해서도 심사숙고했었다"고 밝혔다. '대통령직 하야'까지 생각했었음을 시사하는 말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심적 고통이 심했었는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김 대통령의 사과 성명은 국민들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오지 못했다는 게 중론이다. 만시지탄이라는 '시간적 과오'는 제쳐놓더라도, 국민 일반이 기대했던 사과의 '구체적 실천 방안'이 결여돼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김 대통령의 이날 대국민 사과는 이를 결정하기까지의 본인의 참담한 심정에도 불구하고 '등돌린 민의'를 끌어안는 데 성공하지 못한 셈이다.
***노무현후보와 민주당의 대탄식**
이같은 사과성명의 미진함은 이날 대통령 성명을 접한 뒤, 김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던 민주당에서 나온 반응만 보아도 잘 읽을 수 있다.
노무현 민주당대통령후보의 유종필 공보특보는 김 대통령 사과 방송을 들은 뒤 당시 당내 중진의원들과 저녁식사중이던 노후보에게 그 내용을 보고했다. 유 특보는 직후 기자들과 만나 사견임을 전제로 "노무현 후보가 무엇인가 미흡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예컨대 사과문에 아태재단 처리 문제나 김홍일 의원 처리 문제 같은 후속조치가 없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현재 민주당의 분란 요인이 되고 있고 김홍일 의원 탈당문제나 비리의 온상으로 각인된 아태재단 해체 및 사회환원 같은 구체적 알맹이가 빠졌다는 비판이었다.
민주당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의 김현미 부대변인은 사과 성명직후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사과하게 된데 대해 참으로 착잡함을 금할 수 없다"고 논평했다. 부대변인이 이날 성명을 발표한 것은 대변인이던 정범구 의원이 당내 반개혁 세력의 강한 반발로 당의 개혁 노력이 미진한 데 반발해 이날 오전 전격적으로 대변인직을 사퇴한 데 따른 것이었다. 현재 민주당이 얼마나 심각한 자기분열에 빠져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풍경이었다.
김 부대변인은 이날 논평 말미에 "가시적인 인적, 제도적 부패청산 조치가 나와야 하며 우리당도 이를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청와대에 대해 "가시적인 인적, 제도적 부패청산 조치를 내놓으라"고 주문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시적인 인적,제도적 부패청산 조치'란 그동안 당내 쇄신파가 요구해온 김홍일 의원 탈당, 아태재단 해체, 더 나아가 대통령을 잘못 보필한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 교체 등을 내포한 것으로 해석된다.
***청와대, "더이상 물러설 수 없다"**
그러나 청와대측 대응은 이와 다르다.
박선숙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 사과 방송 직후에 기자들과 만나 이같은 민주당의 요구와 관련, "아태재단은 사실상 폐쇄돼 있고 부채가 많아 앞으로 그 처리에 대해서는 심사숙고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태재단의 경우 필요하다면 해체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다른 요구들에 대해선 단호한 반대입장을 밝혔다. 박 대변인은 '거국내각 구성' 가능성에 대해선 "덧붙일 것이 없다"고 강하게 부정했다. 박지원 비서실장 등 정권 보좌세력들에게 대통령의 상황인식을 무디게 한 책임이 있는 게 아니냐는 민주당내 비판에 대한 정면반박이다. 청와대는 김홍일 의원의 거취 문제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인식을 보이고 있다.
이같은 청와대와 민주당간의 커다란 '인식차'는 앞으로 민주당 및 노무현후보의 행보가 결코 순탄하지 못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97년 YS의 전철'을 되밟기 시작했다**
청와대 일각에서는 여기서 더 양보(?)할 경우 지난 97년 한보 사태에 따른 김현철 구속이후에 TV청문회가 열리며 YS가 완전한 레임덕에 함몰됐듯, 앞으로 야당의 거센 요구에 따라 열릴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3홍 비리 국회 청문회' 등에서 김대통령 친인척 및 측근인사들이 무차별적 십자포화를 맞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여론이 빗발치더라도 더이상 밀려선 안된다는 대응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이같은 판단을 하고 있다면 이는 역사의 한면만을 보는 단견에 불과하다.
97년 상황이 이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97년 1월 한보사태가 터지면서 김현철 비리의혹이 표면화하자 청와대는 맨처음에는 검찰 조사 형식을 통해 김현철씨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그러나 여론의 분노가 더욱 증폭되자 YS는 김현철 구속을 지시했다. 그후 야당은 국회 TV청문회를 주장, 여야간의 오랜 논란끝에 이를 관철시켰다.
이같은 과정에 비리의혹이 더욱 증폭되자, 3월15일 YS는 10명의 각료를 경질하는 내각개편을 단행했으나 이 또한 별무성과였다. 개각이 있었던 날 치러진 수원,인천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여당은 야당연합에게 참패했다. 그후 YS는 퇴임때까지 산송장처럼 지내야 했고, 이 와중에 IMF위기가 터졌다.
지금의 상황도 본질적으론 97년과 동일한 궤도를 달리는 느낌이다. 청와대는 아직 머뭇거리고 있다. 민의를 정확히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채 50일도 안 지나 8.8 재보선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태로 계속가다가는 민주당은 또한차례 참패할 가능성이 높다. 8.8에서도 참패한다면 민주당은 극심한 내분상태로 빠져들게 분명하며 연말 대선은 하나마나다.
민주당 개혁파 일각에서는 "이미 때를 놓친 것 같다"는 체념어린 소리도 나온다. 김대통령이 결자해지의 자세로 작금에 민주당이 직면한 위기의 해법을 제시해주기를 기다렸으나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는 탄식이다. 김대통령과 민주당의 앞날이 걱정될 따름이다.
***김대중 대통령 사과성명 전문(2002.6.21)**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저는 지금 고개를 들 수 없는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성원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저는 자식들이나 주변의 일로 걱정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여러 차례 국민 여러분 앞에 약속드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는 국민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지난 몇달 동안 저는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통절하게 느껴왔으며, 저를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마음의 상처를 드린 데 대해 부끄럽고 죄송한 심정으로 살아왔습니다.
제 평생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처럼 참담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이는 모두가 저의 부족함과 불찰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거듭 죄송한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제자식들은 법의 규정에 따라 엄정한 처벌을 받게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저의 처신에 대해서도 심사숙고했습니다. 널리 국민의 여론도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자식들의 문제는 법에 맡기고 저는 국정에 전념하여 모든 소임을 완수하는 것이 국가와 국민 여러분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저의 생각에 대해서 국민 여러분의 큰 아량과 이해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끝으로, 국민 여러분의 건승과 내일의 경기에서 우리 한국팀의 4강진출을 축원해 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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