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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사유하기 시작한 조선족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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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사유하기 시작한 조선족 문화

[창비주간논평] 중국문화의 구심력에 저항하는 그들의 영화

얼마 전 어느 조선족 학자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근간의 조선족 문학을 개관한다는 강연 요지에 내심 기대했는데, 정작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디아스포라라는 용어가 내포하는 실존적 긴장은 간 데 없고 그저 조선족 문학을 상품화하는 유행어로 남발되고 있다는 느낌에 듣는 내내 불편했던 것이다.

디아스포라가 중요하게 떠오르는 이유는, 그 종족 정체성과 국민 정체성 사이에 발생하는 분열과 간극이 20세기 이래 견고해진 국민국가 시스템의 불안한 내면을 문제화한다는 데 있다. 식민과 냉전이라는 간고(艱苦)한 역사적 조건 아래, 중국 55개 소수민족의 하나로 편제된 조선족은 광의의 의미에서 디아스포라다. 그러나 '다민족 복합국가'로서 소수민족의 국민 정체성을 강조하는 중국의 입장에서 이 말은 불온하게 들릴지 모른다. 게다가 조선족을 제외한 다른 소수민족을 디아스포라로 보는 시각도 좀처럼 없다.

'다민족 복합국가' 정체성에 깃든 불협화음

티베트나 우르무치 등에서 최근 불거진 유혈사태에서도 보이듯 소수민족 문제는 중국의 뜨거운 감자이거니와, 한편 중국의 국가 정체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보가 제한적인지라 그 실상에 접근하기가 어렵다. 서구 논리에 편승하여 소수민족을 중국의 압제에 신음하는 피압박자로 일괄 간주하는 것도 섣부르지만, 통합과 화해를 과대 선전하는 중국 측의 논리 또한 귀에 순순히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민족의 문학 및 예술작품은 이 문제를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하는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지난해 국내에 소개된 이족(彛族) 시인 지디마자(吉狄馬加)의 시집 <시간>(문학과지성사 2009)은 현대화에 휩쓸려 문화적 뿌리를 상실해가는 한 소수민족의 정신세계를 절절하게 보여준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자본주의적 동질화의 속도와 국가 통합의 정도가 비례함을 알게 된다. 그런데 사라진 모어(母語)를 그리는 시인의 애환과 향수가 결과적으로는 '위대한' 중국문학 속으로 빨려들고 만다는 사실이 당혹스럽다. 행간에 감지되는 미묘한 불협화음조차 다민족 복합국가의 '중화문화'를 구성하는 요소로 안착하는 대목에 이르면 그야말로 난감함이 엄습한다. 중국문화의 두께를 통찰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것이다.

조선족 영화들이 파고든 중국의 '경계'

그런 점에서 최근 국내외에서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는 조선족 영화감독 장률과 김광호의 영화들은 소수민족 문화의 새 영토를 열어냈다 할 만하다. 무엇보다 조선족(혹은 탈북자)의 실존적 삶을 통해 중국이라는 복합텍스트를 침통하게 한다는 점에서 심상치 않다. 그 작품들은 디아스포라가 발딛고 선 경계의 틈새 사이로 피어난 불온한 꽃이다.

장률의 <망종>(2006)과 <경계>(2007), 김광호의 <궤도>(2008), 이 세편의 영화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경계>의 순희와 <궤도>의 향숙은 모두 <망종>의 주인공 최순희의 분신이다. 이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닌다. <망종>에서 조선족 순희는 장소를 알 수 없는 벌판에서 아들과 단둘이 살며 김치를 판다. 몇번이나 "엄마, 우리 언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요?"라고 묻던 아들 창호는 영화 후반에서는 이렇게 되묻는다. "엄마 거기서 언제 다시 돌아와요?" 돌아갈 고향이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 영화 <망종>의 한 장면

고향 없는 이 여인들의 공통된 특징은 남편의 부재이다. 사람을 죽이고 감방에 갔거나 두만강을 건너다 총에 맞아 죽었거나. 더구나 동포라는 이유로 잠시나마 마음을 열었던 김씨에게 순희가 배신당하는 장면은 민족이 결코 이들의 안식처가 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오히려 <경계>에서 순희는 사막에서 홀로 나무를 심으며 살아가는 몽골인 항가이에게서 위안을 찾고, <궤도>의 향숙은 천형으로 두 팔이 잘려 세상의 이방인이 된 철수의 집에서 지친 육신을 회복한다. 물론, 이들의 동거 역시 시한부일 뿐이지만.

질병과 범죄라는 은유

세 작품의 또다른 연결고리는 바로 질병과 범죄라는 코드이다. <망종>의 배경인 익명의 소도시로 들어가려면 먼저 기차역에 설치된 간이 검역소를 통과해야 한다. 사람들은 바코드처럼 생긴 검역기를 머리에 찍은 다음에야 도시로 들어오는 것이다. 질병은 변경의 이름 없는 도시로부터 순희와 철수의 작은 방까지, 국가의 통제력을 빈틈없이 가동한다. 시도때도없이 부뚜막에서 튀어나오는 쥐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린 순희. 쥐는 TV를 통해 철수의 방으로 쉬지 않고 흘려보내는 사스(SARS) 예방 위생수칙 방송과 더불어, 미시적 일상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공권력이 만들어낸 가상의 공포이다.
▲ 영화 <궤도>의 한 장면

질병은 곧 범죄로 연결된다. <궤도>의 향숙은 사스 감염자이자 자신을 강간하려던 식당 주인을 칼로 찌르고 달아난 도주범이다. 흥미롭게도 그녀는 <망종>에서 위생적인 조리 작업장을 제공하는 댓가로 성행위를 요구한 식당 주인을 공격한 순희와 겹쳐진다. 마침내 아들 창호가 (추측건대) 사스 감염자로 격리된 것을 계기로, 질병에 대한 공포는 질병을 퍼뜨리는 범죄를 격발한다. 쥐약 넣은 김치를 어느 한족의 결혼식장에 배달하고 돌아온 순희는 이제 부뚜막 옆에 죽어 있는 쥐를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집어 내다버린다. 질병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뀌는 순간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사스 안전수칙을 반복하는 TV를 발로 뒤엎어버리는 철수처럼, 이들은 마침내 공포를 걷어차버린다. 그리고 검역소가 설치된 간이 기차역을 벗어나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보리밭으로 달려나간다.

중화문화의 구심력에 저항하는 힘

세 영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자 매력은 그 불온성에 있다. 그 때문인지 이들은 모두 한국에서 개봉되었고 중국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만약 장률과 김광호의 작품을 같은 민족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한다면 분명 해석은 길을 잃고 말 것이다. 조선족이라는 변경을 소재 삼았음에도 그 주제는 한족의 어느 작품보다도 더 강력하게 중국의 중심부를 겨누고 있다. 중국이라는 국가를 생각하지 않고 이들 작품을 이해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변방의 잡초들을 거침없이 빨아들이는 중화문화의 거대한 구심력에도 강하게 저항한다. 중국문화로 순순히 편입되지 않으면서 엄연한 중국문화로 존재하는 것, 장률과 김광호의 디아스포라로서의 구체적 실존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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