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소와 도시철도에서 일한 적이 있는 나로서는 공장에서의 규율된 노동이 갑갑하다 못해 우울하기까지 했다. 단지 밥을 먹기 위해 제 생명력에서 노동력을 뚝 떼어내어 자본의 시간으로 변질시켜야만 했던 때를 김진숙 같은 선진(?)노동자도 돌아가야 할 시간으로 여기는 걸까. 아니면 복직되었지만 곧바로 일거리를 받지 못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아픔을 함께 앓는 걸까.
울타리치기 운동으로 대지에서 쫓겨나 도시로 모여든 영국 민중들은 삼삼오오 작은 공동체를 조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지와 한몸이었을 때 공동체란 삶의 자연스런 귀결이었지만 한낱 지푸라기 같은 떠돌이가 되고부터 공동체는 인위적으로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험만을 살펴봐도 공동체가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사례가 없지 않았지만 사실인즉 개인의 영역이란 것도 공동체를 전제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오늘날 노동조합을 단순히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조직으로만 알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그 인식 자체가 자본주의적 코드에 접속된 결과일 수 있다. 크로포트킨에 의하면 근대 초기 노동조합은 하나의 공동체였다.
다른 일정이 있어서 조금 일찍 그 자리를 빠져나오면서도 왜 노동자들에게 공장은 벗어나야 할 곳이 아니고 돌아가야 할 곳인지에 대해서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제공해야 생존이 가능하니 '공장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에 충분한 설득력이 있는 건 맞다. 그러나 공장으로 돌아가고 난 다음의 시간은 무엇인 걸까. 솔직히 이러한 내 의문은 요즘 이 지점에서 맴돌이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꽤나 오래된 것이기고 하다.
ⓒ프레시안(최형락) |
쌍용자동차 노조가 77일간의 옥쇄파업을 벌이고 있을 때 나는 밥벌이에 꽁꽁 묶여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텔레비전 뉴스와 고속도로를 달리면 멀리 보이곤 했던 경찰 헬기를 통해서만 짐작해볼 수 있었다. 77일간은 여러 사람에게 참 비통한 시간이었다. 비해고자 노동자들이 파업 중인 동료들에게 쏘아대던 새총이 등장할 때는 더욱더 그러하였다.
'함께 살자'라는 그들의 외침은 백척간두에 선 실제적 절규였다. 미래를 향한 선지자의 예언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어디까지 와 버린 것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급박한 구조신호 말이다. 노동자들의 인간적 자긍심마저 자본에 넘겨주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그 후 우리의 무의식에 확실히 뿌리를 내렸다고 나는 진단한다.
돌이켜보면 민주노조 운동이 해일처럼 일어나던 예전에는 패배가 그냥 패배가 아니었다. 테러와 린치, 공권력의 군홧발이 거꾸로 위대한 승리이기도 했던 시대였다. 이건 단순히 자기학대적인 정신주의가 아니다. 패배 속에서도 기쁨이 생성되고 있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억압을 부수는 희열이 패배 속에 뒤섞여 있었다고 할까.
언제부터인가 기본급 인상이, 단체협약 타결이 패배가 되는 묘한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노동조합이 공동체도 결사체도 아니기 시작할 때,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결정하는 저울추가 되기 시작할 때부터일 것이다.
이러한 노동조합에 대한 복잡한 심경과 더불어 쌍용자동차 노조의 옥쇄파업이 있었고 그 후로 벌어진 말 못 할 사건들이 찾아왔다. 공개적으로 밝히건대, 나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과 죽음의 충격으로 몇 편의 시를 써야만 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은 이렇게 밖에서 습격하듯 밀어닥친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투쟁을 고무·선동하거나 또는 죽음을 직접적으로 애도하는 시는 쓰지 못했지만 말이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공장 바깥이 절벽임을, 공장 바깥은 노동조합만한 공동체도 없음을, 공장 바깥은 공장 안에서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협잡이 있음을 증언해 주었다. 그래서 그들이 저 공장 안으로, 저 규율된 노동의 시간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내 의문을 일소에 부치는 전적으로 옳은 목소리다. 그들은 공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기들을 음식물쓰레기처럼 내던진 자본의 심장 속으로 말이다.
어쩌면 김진숙도 어쩔 수 없는 노동을 통해서 공동체의 소중함을 얻었던 듯하고, 아직도 그 시간을 잊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아직까지 노동자들의 공동체는 공장 바깥에 있지 않고 언젠가 해방되어야 할 공장 안 노동에 있다는 이 피할 수 없는 진실은 공장 밖에 있는 사람들과 운동을 어지럽게 하지만, 이것은 눈을 뗄래야 뗄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맨몸이기도 하다.
자본이 생명의 숨결 하나하나까지 물샐틈없이 장악하고 있다는 건 어쩌면 우리의 패배의식이 만들어낸 환영이거나 자본이 살포한 독극물일 수도 있음을 우리는 깊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공장에서 벌어지는 노예노동에 생명의 숨결을 터주고, 또 함께 사는 일의 가능성을 타전할 수 있으리라.
지난 24일 범국민대회는 깨알 같은 시민조직위원 8441명이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이제 그만 공장 안으로 보내자는 마음들을 모은 자리였다. 이 또한 아이러니한 사건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저것 따지는 것은 조금 더 훗날로 미뤄두기로 하자. 그보다 먼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그간의 고통은 고통대로 품은 채 공장 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나서야 할 일이다.
함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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