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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박정희의 탄압 올가미를 36년만에 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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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박정희의 탄압 올가미를 36년만에 벗다

김대중·문익환 등,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 '무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을 받고 수감됐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가 유죄 확정 판결 36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박정희 정권 시절 무자비한 탄압의 근거가 됐던 긴급조치에 대한 위헌 결정 후 내려진 판결이다. 이로써 김 전 대통령과 문 목사 등은 비록 사후이지만 명예를 회복하게 됐다.

서울고법 형사8부(이규진 부장판사)는 3일 김 전 대통령, 문 목사,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선생, 정일형 전 의원 등 지금은 고인이 된 인사들과 함께 함세웅, 문정현 신부 등 총 16명에 대한 재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고 안병무 교수는 재심을 청구한 부인이 별세해 소송절차 종료에 따라 무죄 선고를 받지 못했다.

▲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실형을 받은 故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확정 판결 36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3일 오전 이희호 여사(오른쪽 두번째)와 이문영 고려대 명예교수(오른쪽)가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을 나서며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뉴시스

이날 무죄 선고는 올해 초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등에서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라고 판단한데 따른 것이다. 선고에 앞서 검찰은 형식적으로 무죄를 구형했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9호는 여기 있는 피고인과 가족에게 말씀드리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문제가 많았다"며 "당시 시대적 상황이 재심 대상 판결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고 무죄 선고 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피고인들의 인권을 위한 헌신과 고통이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기틀이 됐다"며 "재심 판결에 깊은 사죄와 존경의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달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대부분 노령인 피고인, 재심청구인이 모두 법정에서 나갈 때까지 법대에 앉아있었다. 재판부가 과거사 관련 사건에서 피고에게 사죄와 존경을 표시한 것도 이례적이다. 최근에는 고 장준하 선생의 재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가 장 선생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해 화제가 됐었다.

이 사건 유족들과 일부 생존 인사는 지난 2011년 10월 4일 재심을 청구했고, 서울고법은 지난 5월 28일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김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판결 직후 "뭐라고 말할 수 없이 감개무량합니다. 남편이 돌아가셔서 이 사실을 아실 적에 하늘나라에서 기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여사는 "이제라도 무죄를 선고한 것이 기쁘고, 언제든 재판부가 바르게 판단해서 앞으로도 모든 다른 사람들이 죄없이 수감되는 일이 없도록 바란다"고 말했다. 이 여사는 당시 상황을 회상하기도 했다.

"당시 선언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죄없이 교도소에 수감됐어요. 그런데 같은 사건관련자들은 1년도 안 돼서 석방됐는데 제 남편은 교도소에서 병원으로 옮겨졌어요. 병원 치료를 받고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곳은 면회도 안 되고, 나만 면회가 가능해 왔다갔다가 가능했어요. (남편이 있던) 그 방에는 창문에도 전부 비닐로 붙여서 바깥을 내다볼 수도 없었고, 하늘도 쳐다볼 수 없었어요. 빛을 볼 수 있는 장소였어요. 그래서 제가 교도소로 다시 보내달라고 간청하고, 서면으로 재판장에게 보내고, 교도소장에게도 청원을 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정권 탄압이 '정점'으로 치닫던 길목에 '명동 사건' 있었다

긴급조치 9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헌법에 근거해 선포했고, 1975년 5월 13일 15시부터 시행됐다. 74년 긴급조치 1호 발표를 시작으로 79년 모든 긴급조치가 해제될 때까지 수천명의 민주화운동가와 시민들은 법정에 서야 했다. 김 전 대통령과 문 목사 등을 옭아맨 긴급조치 9호는 기존에 발표된 긴급조치의 '집대성'이었다. 유신헌법을 부정하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했고, 학생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으며 체제 비방을 보도하는 언론에 대해서는 폐간 조치까지 취할수 있었다.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지 약 10개월 후인 1976년 3·1절 기념미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문익환 목사 등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내용의 '3·1민주구국선언'(일명 명동사건)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이 선언문 발표 당시 언론은 이 사실을 보도하지도 못했다. 선언문 발표 열흘이 지난 후인 그해 3월 10일, 당시 서울지검 검사장 서정각이 이 사건을 "일부 재야 인사들의 정부전복 선동사건"으로 규정하고 관련자 20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에 따라 입건한다고 발표하면서 알려지게된 셈이다. 당시 사법당국의 '정치적 목적'이 무엇인지 훤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3.1사건 가족대책위원회가 재판 방청을 거부당하자 입을 십자 모양으로 봉하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인사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 사진

이 사건으로 인한 김 전 대통령 구속은 '박정희 독재'의 추악한 면모를 세계에 널리 알린 계기가 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구속된 이듬해인 1977년 3월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확정받고 진주교도소에 수감됐다.1978년 12월 박정희 정권이 김 전 대통령을 형집행정지로 석방해 가택연금시키기까지, 그는 1년 9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당시 3.1민주구국선언사건 관련자는 김대중, 윤보선, 정일형 등 정치인, 문익환, 함석헌, 문동환, 서남동, 이해동 등 개신교 목사, 안병무, 이문영, 이우정 등 해직교수, 함세웅, 문정현, 신현봉, 김승훈, 장덕필, 김택암, 안충석 등이었다.

이 사건은 민주화운동 관련자 가족들의 투쟁이 주목받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74년 민청학련사건을 계기로 '구속자가족협의회'가 만들어져 활동하기도 했지만 '3.1사건 가족대책위원회'는 그 규모나 활동면에서 훗날 민주화운동 유가족들의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가족 면회와 재판 방청을 제한받자 가족위원회는 항의의 의미로 입을 십자 모양으로 봉하고 시위를 하기도 했다. '자유 만세', '민주주의 만세' 등을 적은 부채를 들고 행진을 벌였고, 접힌 우산을 펼쳤을 때 '민주 인사 석방하라'는 문구가 나오도록 하는 식의 '돌발 시위'를 기획하기도 했다.

1976년 3월 1일 발표한 3.1민주구국선언문 전문

오늘로 3,1절 쉰일곱 돌을 맞으면서 우리는 1919년 3월 1일 전세계에 울려 퍼지던 이 민족의 함성, 자주독립을 부르짖던 아우성이 쟁쟁히 울려와서 이대로 앉아 있는 것은 구국선열들의 피를 이 땅에 묻어버리는 죄가 되는 것 같아 우리의 뜻을 모아 '민주구국선언'을 국내외에 선포하고자 한다.

8, 15 해방의 부푼 희망을 부수어 버린 국토분단의 비극은 이 민족에게 거듭되는 시련을 안겨주었지만 이 민족은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6, 25동란의 폐허를 딛고 일어섰고, 4, 19 학생의거로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가슴가슴에 회생시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이 민족은 또다시 독재정권의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다. 삼권분립은 허울만 남고 말았다. 국가안보라는 구실아래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날로 위축되어가고 언론의 자유, 학원의 자주성은 압살 당하고 말았다.

현정권 아래서 체결된 한일협정은 이 나라의 경제를 일본에 완전히 예속시켜 모든 산업과 노동력을 일본 경제침략의 희생물로 만들어버렸다.

눈을 국외로 돌려보면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보기도 초라한 고아가 되고 말았다. 한반도에서 UN의 승인을 받은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말도 이제는 지난날의 신화가 되고 말았다. 동,서 양진영 사이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고 세계사에 새 힘으로 대두한 제3세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서방세계만 의존하다가 서방세계에마저 버림을 받고 말았다.

현정권은 이 나라를 여기까지 끌고 온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국내의 비판적인 세력을 탄압하다가 민주국가들의 신임을 잃게 된 것을 통탄히 여겨야 하며, 제3세계의 대두와 함께 UN이 변질되었다는 것을 탓하기 전에 긴 안목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쳐다보지 못한 것을 스스로 탓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비원인 민족통일을 향해서 국내외로 키우고 규합하여 한걸음 한걸음 착실히 전진해야 할 이 마당에 이 나라는 1인 독재 아래 인권은 유린되고 자유는 박탈당하고 있다. 이리하여 이 민족은 목적의식과 방향감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고 총파국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우리는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여, 야의 정치적 전략이나 이해를 넘어 이 나라의 먼 앞날을 내다보면서 '민주구국선언'을 선포하는 바이다.

1.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국시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공산주의 정권과 치열한 경쟁에 뛰어든 이 마당에 우리가 길러야 할 힘은 민주역량이다. 국방력도, 경제력도 길러야 하지만 민주역량의 뒷받침이 없을 때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다.

그러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남의 나라에서 실천되고 있는 어떤 특정한 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를 형성한 성원들의 뜻에 따라 최선의 제도를 장만하고 부단히 개선해가면서 성원 전체의 권익과 행복을 도모하는 자세요, 신념을 말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국민을 위해서'보다는 '국민에게서'가 앞서야 한다. 무엇이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좋으냐는 판단이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그 판단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국민을 위한다는 생각만으로 민주주의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으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명령과 복종을 민주주의라고 착각하는 일이다. 국민은 복종을 원하지 않고 주체적인 참여를 주장한다. 국민은 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할 기본권을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다가 투옥된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한다. 국민의 의사가 자유로이 표명될 수 있도록 집회, 출판의 자유를 국민에게 돌리라고 요구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유신헌법으로 허울만 남은 의회정치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로이 표현되는 민의를 국회는 법제정에 반영시켜야 하고, 정부는 이를 행정에 반영시켜야 한다. 이것을 꺼리고 막는 정권은 국민을 위한다면서 실은 국민을 위하려는 뜻이 없는 정권이다.

셋째로 우리는 사법부의 독립을 촉구한다. 사법권의 독립 없이 국민은 강자의 횡포에서 보호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법부를 시녀로 거느리는 정권은 처음부터 국민을 위하려는 뜻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2.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경제발전이 국력배양에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렇다고 경제력이 곧 국력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현정권은 경제력이 곧 국력이라는 좁은 생각을 가지고 모든 희생시켜가면서 경제발전에 전력을 쏟아왔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한가? 국민경제의 수탈을 바탕으로 한 수출산업은 '74년, '75년 두 해에 40억 불이라는 엄청난 무역적자를 내었고, 그 적자폭은 앞으로 줄어들 가망이 없다. 1975년 말 현재 우리 나라의 외채 총액은 57억 8천만 불에 이르렀다. 차관기업들이 부실기업으로 도산하고 난 다음 이 엄청난 빚은 누구의 어깨 위에 메워질 것인가?

노동자들에게 노조 조직권과 파업권을 박탈하고 노동자, 농민을 차관기업과 외국자본에의 착취에 내어 맡기고 구상된 경제입국의 경륜은 처음부터 국민을 위하는 것이 아니었다. 국민의 경제력을 키우면서 그 기반 위에 수출산업을 육성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었다. 농촌경제의 잿더미 위에 거대한 현대산업을 세우려고 한 것이 망상이었다.

차관에만 의존한 경제체제는 처음부터 부패의 요인을 안고 있었다.이대로 나간다면 이 나라의 경제파국은 시간문제다. 현정권은 이 나라를 경제파탄에서 건질 능력을 잃은 지 오래다. 경제 부조리와 부패는 권력구조의 심장부에서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에 이르고 보면 박정권은 책임을 지고 물러날 밖에 다른 길이 없다. 경제파국을 미연에 방지하여 국제사회에서 아주 신임을 잃지 않도록. 차관상환의 유예를 차관국가들과 은행들에 요청하기 위해서라도 정권교체는 불가피하다는 판단이다.

만약 그럴 겸허와 용기가 없다면 심장이라도 도려내는 심정으로 경제입국의 구상을 전적으로 재검토하라고 우리는 촉구한다. 실정을 정당화하지 말고 솔직히 승인하라. 국민의 국세 부담력을 무시하고 짜여진 팽창예산을 지양하라. 부의 재분배를 철저하고 과감하게 실천하여 국민의 구매력을 키우라. 그래야 공산주의의 온상이 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부조리 현상이 시정되고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회복될 것이며, 북녘 공산정권에 대해선 민족통일의 주도권을 잡게 될 것이다.

3.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의 과업이다.

국토분단의 비극은 해방 후 30년 동안 남과 북에 독재의 구실을 마련해 주었고, 국가의 번영과 민족의 행복과 창조적 발전을 위해서 동원되어야 할 정신적, 물질적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다. 외국의 군사원조 없이 백만을 넘는 남북한의 상비군을 현대무기로 무장하고 이를 유지한다는 일은 한반도의 생산력과 경제력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더욱 참을 수 없는 일은 우리의 문화창조에 동원되어야 할 이 겨레의 슬기와 창의가 파괴적으로 낭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민족통일은 지금 이 겨레가 짊어진 지상과업이다. 5천만 겨레의 슬기와 힘으로 무너뜨려야 할 절벽이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민족통일을 저희의 전략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용한다거나 저지한다면 이는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민족통일의 기회는 남과 북의 정치가들의 자세 여하로 다가질 수도 있고 멀어질 수도 있다. 진정 나라와 겨레를 위한다면 변해가는 국제정세를 유지해가면서 때가 왔을 때 이를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잡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때에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다. 그것은 통일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책이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헌장이다. 다가오고 있는 그날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민주역량을 키우고 있는가, 위축하고 있는가?

승공의 길, 민족 통일의 첩경은 민주역량을 기르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5천만 온겨레가 새 역사 창조에 발벗고 나서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틈바구니에서 당한 고생을 살려 민주주의의 진면목을 세계 만방에 드날리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통일된 민족으로, 정의가 실현되고 인권이 보장되는 평화스런 나라 국민으로 국제사회에서 어깨를 펴고 떳떳이 살게 하는 일이다.

민주주의 만세!

1976년 3월 1일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이우정
문동환, 함세웅, 안병무, 정태영, 김승훈, 장덕필, 김택암, 안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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