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창을 불허한 국가보훈처는 행진곡을 5·18 민주화운동의 공식 기념곡으로 지정할지 여부를 앞으로 논의하겠다고 했다. 행진곡을 대체할 새로운 곡을 공모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에 앞서 5·18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망언이 <TV조선>, <채널A>에서 흘러나오기도 했다. '일베충'들의 망동이 더해지면서 박근혜 정부의 5·18은 더 어수선해졌다. 행진곡 제창 거부도 박근혜 정부 들어 본격화한, 박정희의 명예 회복이 핵심일 이른바 '역사 전쟁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임을 직감케 하는 풍경이다. 보훈처의 제창 불허 방침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리라는 뜻이다. 작년에 대선을 앞두고 퍼진 '이명박근혜'라는 말이 다시 생각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보훈처의 처사는 물론이고 종편의 사실 날조와 '일베충'들의 극성도 마음껏 웃어넘기자. 뒤집어 보면, 행진곡을 둘러싼 소극(笑劇)은 5·18의 역사를 기억하는 데 차라리 다행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5·18정신의 단순한 망각을 넘어 사실 자체에 대한 악의적인 덧칠과 왜곡이 횡행하고 이를 바로잡을 역사 교육조차 부실한 오늘, 소극이 어처구니없을수록 기억의 투쟁은 새로워질 수 있고 새로워짐 속에서 5·18의 진실도 후대에 제대로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꼭 다짐하고픈 것은 1980년 광주의 기억과 진실이 한반도의 현재에 대한 성찰로 깊어지게 하는 일이다. 유신 독재가 군부 독재로 둔갑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광주의 비극이 비단 광주만의 문제가 아님을 좀 더 분명히 인식하지 않고서는 5·18의 참뜻을 되살리기 어려울 것이다. 광주가 흘린 피와 눈물 덕에 1987년 6월 시민혁명의 성취는 물론, 남과 북이 합심하는 한반도의 자주(自主)를 꿈꾸는 것도 비로소 가능해지지 않았던가. 우리 사회에서 권력의 고지를 선점한 수구 정치세력도 그 점을 아주 모르는 것 같지 않다. 그렇기에 그토록 시민의 정서를 거스르면서까지 행진곡을 5·18의 역사에서 지워버리려고 하는 것일 테다.
▲ 항쟁 기간 중 자식을 먼저 보낸 한 할머니.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이 온통 주름살로 짓붉다. 1980. 5. 29 / 김녕만ⓒ5.18기록관 (http://archives.518.org/) |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행진곡이 그렇게는 지워지지 않는다. 윤상원과 박기순, 황석영, 백기완, 김종률 등의 이름이 호명되는 곡의 탄생 과정이 이 노래가 국민가요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미 여러 리메이크 곡도 선보인 바 있다. 제창이든 합창이든 누가 부르라고 해서 부르고 기억하라고 해서 기억하는 노래가 아니다.
그런 노래를 흥얼거리며 공선옥의 장편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창비 2013)를 읽었다. 좋은 작품을 만날 때 고마운 마음이 들곤 하지만, 5·18을 맞으며 드는 고마움은 좀 특별했다. 내가 이 장편에서 전해받은 먹먹함과 애잔함, 생의 희미하지만 끈덕진 기운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의욕도 샘솟는다. 공선옥의 이야기는 통상 '5월 문학'을 대별하는 세 가지 특색, 즉 기억의 재현, 죄의식의 표출, 상처의 치유(전성태 '아아, 그새 오월이구나', 창비주간논평 2009.5.13.)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아니, 세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서 그 이상의 무엇이라고 말해야 맞다.
너무도 기막힌 근대화의 실상이기에, 너무도 참혹한 5·18의 사연들이기에 작가도 '환상'을 현실의 엄연한 일부로 받아들이고 작품에 밀어넣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두고 <백년의 고독> 같은 마술적 리얼리즘을 연상할 필요는 없다. 극도(極度)의 사실이어서 환상이 저절로 따라왔을 뿐 이 장편에 황당무계란 없다. 인간은 원래가 별이 폭발한 잔해에서 퍼진 입자들로 구성된 존재이고 죽으면 파동인 동시에 입자인 빛으로 되돌아간다. 작가는 철저하게 사실에 입각한 '환상'을 소설적인 상상력으로 구체화하고 살을 입혀 별처럼 빛나는 인물들을 창조했을 뿐이다. "소소거림과 너울거림을 타고" 빛 속으로 들어간 정애,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정애가 그런 빛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정애라는 빛을 받지 못했다면 묘자도 제 모습을 드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비극의 상흔은 민중의 노래로
새마을운동이 펼쳐지던 1970년대에서 5·18 이듬해인 1981년 여름까지를 다루고 2009년 어느 시점에서 끝나는 이 장편은 광주로만 국한할 수 없는 비극의 상흔인 '가슴에 피'가 풀어져 언어의 예술로 승화된 사례다.
행간에 숨은 말의 밀도에 민감한 독자라면 생략된 폭력의 현장을 떠올리며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삶의 이쪽과 저쪽에서 나누는 정애와 묘자의 묵언 대화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독자라면 폭력이 완전히 말살시키지 못하는 희망에 대해서도 성찰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시대의 난리에 대해 모든 당대(當代)는 벙어리 냉가슴일 수밖에 없는가. 3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광주는 그 모든 슬픔과 상처와 어둠을 고스란히 떠안은 채 병리적 분열과 자폐적 웅얼거림, 부질없는 방황을 넘어섰다. 노래로. 민중의 노래로.
공선옥은 '작가의 말'에서 "어머니의 진짜 말은 내가 알아먹을 수 없는 말 속에 있는 것 같"았다고 술회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은 차라리 뜸부기나 소쩍새의 울음소리보다 더 못한 소리인 것만 같았다"고 적었다. 이어서 "어머니는 또한 노래를 했다. 어머니는 밭에서 김을 매다가, 부삭에서 불을 때다가, 노래했다. 한숨 같은 육자배기 가락으로 노래했다"고 썼다. 행진곡의 제창조차 논란거리가 되는 이 수상한 시절에, 알아먹을 수 없는 어머니의 그 말과 민중의 짓밟히고 흩어진 말을 그러모아 삭히고 얼러서 한민족이면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소설로서 노래를 지은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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