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평론가 고성국의 <대통령이 못된 남자>(정은문고)는 '누가 어떻게 대통령이 됐는가' 대신 '누가 왜 대통령이 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과거 유력 정치인들의 행적을 차근차근 되짚어 본다. 과거에도 항상 대세론은 있었고, 2인자의 처절한 노력도 있었으며, 제 3의 후보의 등장도 있었다.
한국 정당사상 최초로 여성 대통령 후보가 나온 상황에서 이 책의 제목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쉽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되지 않는다"는 말처럼, 대통령 자리를 거머쥔 자의 성공 신화도, 대통령에 도전했다 실패한 사례도, 재현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성국이 이 책에서 언급한 사례들은 대선을 80여일 남긴 이 시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고성국의 글은 과학적인 데이터나, 거창한 이론 대신 대신 한국 정치사의 인물 성격과 그들이 빚어낸 스토리, 그리고 대중들의 생각을 읽는 방식으로 정치를 풀어낸다. 아늑한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서, 정치부 기자나 정당에 몸 담고 있는 친구가 한명 껴 있는 휴일 오후의 방담 자리를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옛날 이야기 하듯 조봉암부터 정동영까지 17명의 '대통령이 못된 남자' 스토리를 풀어 놓을 것이다.
'대세론'은 있다?…이회창과 박근혜
▲대통령이 못된 남자 ⓒ정은문고 |
고성국은 "이회창은 97년과 2002년에 같은 수준의 득표(97년 993만 표, 2002년 1140만 표)를 했지만 졌다"며 "이회창은 위기관리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패인을 분석했다.
"위기 관리를 잘 하려면 우선 지금이 위기인지 아닌지를 빨리 알아채야 한다. 위기는 한발이라도 일찍 알면 그만큼 수습하기가 쉬우니까. 그런데 이회창은 모든 사람이 위기라고 생각할 때조차 위기라고 느끼지 않았다.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특별한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아들과 며느리의 행동은 사건의 계기에 불과했을 뿐이다...'이게 위기입니다'라고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이게 위기가 아닙니다'라고 설명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논쟁이 붙으면 리더는 웬만하면 위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위기면 지금까지 안하던 특별한 대책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기가 아니다. 민심을 소란하게 하지 마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목소리에 십중팔구 편승해서 '별것 아니다. 담대하게 나가자'고 정리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위기는 점점 커지고 대세론은 흔들린다...지금 박근혜는 위기다. 새누리당이 박근혜 눈치만 보는 당이 된 탓이다. 어느 누가 감히 박근혜한테 쓴 소리를 하겠는가. 쓴소리 할 사람이 없어지는 것은 진짜 위기다"
이회창의 대세론과 박근혜의 대세론의 성분은 다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성국은 대세론보다 대세론을 흔드는 '외생 변수'에 주목한다. "대세론을 흔들기 위해 처절하게 뛰는 후보"에 의한 변수 관리를 못하면 대세론은 무너지고, 변수 관리를 잘하면 대세론은 유지된다는 것이다. 2002년, '국민참여경선'이라는 정치 실험 도입으로 '노무현 변수'가 탄생했고, 결국 이회창 대세론이 깨졌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대세론을 '후보 자신과의 싸움'으로만 보는 것도 위험하다.
고성국은 이어 "2012년 대선의 변수는 어떨까. 박근혜 쪽은 변수가 별로 없다. 분열될 일이 없으니까. 야권은 민주통합당과 안철수의 후보 단일화에서 플러스 알파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야권에만 변수가 있다"고 지적한다. '박근혜 대세론'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다시 말하지만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프레시안 |
2인자? 제 3의 후보?…문재인과 안철수
김종필은 끝까지 2인자였다. 3공 때도 2인자, '3당 합당' 후에도 2인자, DJP연합이 성사됐을 때도 2인자였다. 정당을 직접 만들고 운영했으며, 국무총리를 두 번이나 지낸 그를 문재인과 비교하는 것 자체는 어려울 지 모른다. 그는 "대통령이 못 된 남자"가 맞지만, 그의 정치적 뿌리, 정치 입문 동기, 그리고 정치 이력은 '노무현 정부 2인자'인 문재인과 모든 면에서 비교 불가다. 문재인은 김종필, 노태우, 박철언, 최형우 등 한국 정치사의 모든 2인자들과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노태우의 경우 대선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유니크'한 이력을 자랑하지만, 그가 차지하는 정치적 의미는 현재까지도 제한적이다. 그는 전임 대통령인 전두환의 '친구'라는 점에서 문재인과 비슷하지만, 쿠데타 군부 세력과 인권 변호사 출신 '참여정부' 인사는 기본적으로 비교 불가다.
오히려 문재인은 독특한 의미로 '제 3의 후보'일 수 있다.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했지만, 그의 정치 이력은 짧다. 노무현의 죽음이 없었다면 그가 정치 일선에 등장할 일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온전히 '노무현의 계승'을 표방하는 것도 아니다. 문재인은 후보에 출마한 후 시대의 변화를 읽기 시작했다고 보는 게 맞다. 민주당 당원들이 그런 그를 대통령 후보로 만들어 준 것이다. 안철수와 단일화라는 대선판의 '변수'를 만들어야 한다는 야권 지지자들의 절박함이 문재인을 선택한 것이라는 해석도 생각해볼 만 하다.
고성국은 이 책을 통해 정주영과 문국현, 그리고 박찬종을 '제 3의 후보'로 보고 이들의 행적을 쫒는다. 정주영의 경우 고성국은 "시대 정신"을 읽지 못한 아마추어 정치인으로 규정했다. 시대 정신을 읽는다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정주영의 사례를 보면 그가 왜 안철수와 같은 '기업인 출신 제 3의 후보'와 다른지, 알 수 있다.
"대통령 국민 직선 자체가 87년 6월 항쟁의 성과였다. 이같은 이유로 이 시기의 시대 정신을 민주화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987년도, 1992년도 시대 정신인 민주화를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87년 선거에서 노태우를 뽑은 것을 잘못된 선택으로 규정하는 이유다. 같은 맥락에서 여전히 민주화가 시대 정신이었음에도 민주화와 관련해서는 할 말이 거의 없는 정주영이 출마한 것 자체가 시대 정신과 동떨어진 해프닝으로 치부되는 것이다....'왜 정주영이 인기가 있었느냐'가 아니라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왜 (정주영은) 400만 표에도 못 미쳤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정주영은 시대 정신에도 맞지 않았고, 때문에 국민은 그를 대선 후보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즉 인기가 있었고, 참신함도 있었지만, 국민이 그를 '대통령감'으로 생각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순하면서 명료한 결론이다. 인기가 높다고 대통령이 된다면, 싸이는 왜 대통령이 될 수 없는 것이고, 돈이 많다고 대통령이 된다면 정몽준은 왜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것인가.
어찌됐든 정주영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케이스다. 반면 문국현은 그야말로 떼밀려서 출마한 경우다. 그는 "지나치게 고집을 부려 같은 편이 될 수 있었던 열린우리당과 긍정적 관계설정에 실패"해 버렸다. 대선 성적표도 참담했다. 정주영은 16.3%를 얻었지만, 문국현은 5.8%를 얻었다.
대통령이 못된 남자, 혹은 여자는?
▲ 고성국 박사 ⓒ프레시안(최형락) |
따지고 보면 정주영과 문국현은 '승부'에 강하지 않다. 승부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안철수는 '승부사' 자질이 보인다. 폭로전과 대선 출마를 연계해 지지율을 대폭 끌어올린 그는 확실히 다른 제 3의 후보들과 다르다. 다만 고성국은 기업인 출신 '제 3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보다 '제 3후보'에게 대통령의 자질이 있는지 문제에 더 관심을 갖는다. 우리는 이미 이명박 대통령을 겪었기 때문이다.
2인자로 시작해, 비극을 겪은 후 홀로서기에 일단 성공한 문재인, '지금까지 나왔던 제 3의 후보는 잊으라'고 말하는 안철수, 그리고 4년간 대세론을 구가해온 박근혜, 이들의 승부는 어떻게 결론이 날까.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 3인 중 2인이 만들어갈 향후 스토리는 훗날 '대통령이 못 된 OOO'하는 식으로 기억에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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