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위기여성들에게 일상 돌봄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 온 십대여성건강센터 '나는봄'이 지난 4일 문을 닫았다. 서울시가 내년 위기 청소년 통합지원을 위한 신규 지원센터를 출범시키겠다며 기존 센터의 위탁 사무를 종료한 까닭이다.
성매매 여성으로 낙인 찍힌 '경의선 키즈'들과 함께 춤추는 등 10대 위기여성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모습으로 화제를 불러 모았던 십대여성일시지원센터 '나무'도 올해를 마지막으로 운영을 종료한다. 나무는 청소년쉼터 등과 서비스가 중복된다는 이유로 지난해 서울시의회로부터 재위탁을 승인받지 못하는 등 외부로부터 기관의 필요성을 의심받아 왔다.
연이은 10대 위기여성 지원기관 폐쇄로 여성 청소년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운영 종료로 발생하는 지원 공백에 갈 곳을 잃은 것은 물론 추후 새로 출범한다는 통합센터가 기존 기관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이 만난 4명의 위기 여성들은 나는봄·나무와 소규모 10대 위기여성 지원시설로 인해 자신의 삶이 달라질 수 있었다며 연이은 운영 종료 소식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들은 기존에 잘 운영되던 센터를 없애고 통합센터를 개소하겠다는 서울시 주장에 의문을 표했다. 한 개의 큰 나무가 아니라 지역사회 곳곳에 소규모 지원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위기 여성들을 지원하는 더 나은 길이라고 입을 모았다. 위기 여성 청소년 네 명의 이야기를 차례로 소개한다.

최연수(20, 가명) 씨와 박지수(13, 가명) 양은 서로 닮은 점이 많다. 가족과 또래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것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자살 시도를 알리며 애정을 갈구한 것도, 외로움을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해 성인 남성과 만난 것도 모두 같다.(☞관련기사 : '자살 생중계'에 2차례 정신병동 입소한 10대 여성, 유일한 안식처를 빼앗겼다)
방황하다 기적처럼 만난 안식처가 서울시에 의해 사라지는 것마저 똑같다. 연수 씨가 마음의 위기를 겪을 때마다 찾아갔던 십대여성일시지원센터 '나무'는 올해를 끝으로 문을 닫는다. 10대 시절 청소년쉼터에서 수난을 겪은 연수 씨가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곳이 나무였다. 서울시와 서울시의회는 그러나 '청소년쉼터와 기능이 중복된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시각으로 나무 운영에 의문을 표했다.
서울 동작구 나무 휴게실에서 만난 연수 씨는 <프레시안>에 "나무는 내가 나일 수 있는 공간이었다"며 "여전히 나무에 도움받고 싶은 게 많은데 사라진다고 해서 너무 아쉽다"고 토로했다. 소규모 일시지원센터에 불과한 나무가 어떤 도움이 됐는지 묻자 연수 씨는 "병원이나 문화센터, 학교에서 얻을 수 없는 지원을 나무에서는 받을 수 있었다"며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다.
"누구도 나를 신경쓰지 않아" 가정 내 소외와 체벌이 자해·원조교제로
연수 씨는 두 가지 자아를 만들어 상황마다 다른 "역할극"을 한다. 하나는 또래 여성들과 비슷한 생활습관과 가치관을 지닌 자아, 다른 하나는 자해를 반복하고 원조교제와 성매매 등으로 생활비를 버는 자아다. 두 자아를 철저히 구분해 드러내는 탓에 가족을 비롯한 대다수 주변인은 연수 씨가 지난 4월에야 성매매를 멈췄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런 연수 씨의 자아는 사춘기가 심해진 중학교 1학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는 "집에서 나를 신경 써준다는 느낌을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로 가정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그의 부모는 연수 씨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지도 않고 알고자 하지도 않았다. 생활비가 모자랄 때면 스트레스를 풀고자 연수 씨를 체벌할 뿐이었다. 물리적 학대를 피할 수 없는 좁은 집에서 연수 씨는 화를 내지도, 마음껏 울지도 못했다.
연수 씨의 부모는 성과 관련한 사안에서 특히 폭력적으로 딸을 대했다. 단순히 친구 사이인 또래 남성과 밤늦게 그네를 타고 있었단 이유만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연수 씨를 구타했다. 이때 튀어나온 "그럴 거면 나가서 살라"는 어머니의 꾸짖음은 연수 씨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 "나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인가 보다"라고 생각한 연수 씨는 이날 생전 처음 집을 떠났다.
학교, 친구 집, 야간도서실, 야외 벤치 등을 전전하던 연수 씨는 더이상 머물 곳이 없자 청소년 일시쉼터를 찾아갔다. 쉼터 아이들을 보며 한숨을 푹푹 쉬던 종사자는 가정폭력으로 집을 나왔다는 연수 씨의 말을 가볍게 여기며 "그래도 부모님 연락처는 줘야 한다"는 답만 반복했다. 어쩔 수 없이 연락처를 적은 연수 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쉼터에 달려온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집에 돌아온 연수 씨는 이후 어떤 위험에 처해도 쉼터는 찾지 않게 됐다.
연수 씨는 갈수록 심해지는 심리적 고립을 자해와 원조교제로 풀었다. SNS에 자해 사진을 올렸을 때 오는 안부 메시지, 랜덤채팅으로 만난 "아저씨"들이 성을 목적으로 제공하는 돈과 친절보다 나은 애정을 중학생 연수 씨에게 주는 사람은 없었다. 부적절한 행동임을 알고 있었고, 성폭행 등의 위험에 처하면 우울에 빠지면서도 원조교제를 반복한 이유다.

동네 거닐다 만난 소규모 청소년 지원센터, "내가 나로 있어도 되는 유일한 공간" 되다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여전히 방황하던 연수 씨의 삶을 뒤바꾼 계기가 나무에서의 일상이다. 연수 씨는 동네를 거닐다 우연히 '청소년을 위한 공간'이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를 보고 십대여성일시지원센터 나무에 들어갔다.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작은 카페 정도로 기억하던 이곳은 위기 여성 청소년이 언제든 머물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혼자 책을 읽거나 잠을 자도 꾸짖는 이 없어 연수 씨에게 안성맞춤이었고, 그래서 별다른 일이 없는 날이면 집 대신 나무를 들려 휴식을 취하곤 했다.
연수 씨는 나무에서 얻은 경험 중 무엇이 가장 좋았는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두 시간 넘는 인터뷰에서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말하던 순간이었다.
"여기만 오면 가족이나 친구와 달리 내게 관심을 집중해 주는 느낌을 받아요. 활동가 선생님들과 몇 시간 동안 대화만 하기도 하고, 보드게임도 하고, 비즈 만든다고 동대문에 가서 재료들을 사는 날도 있었어요. 가끔은 밖에 나가서 카페 데이트도 했고요. 엄마와의 다툼을 해결할 방법도, 학교에서 알려주지 않던 근로기준법도 여기서 배웠어요. 다른 곳에서는 항상 가면을 쓰고 역할극을 하는 느낌이었는데, 나무에서만은 내가 나로 있어도 되는 느낌, 자아를 가져도 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나무 활동가들은 연수 씨가 '온전한 나'를 공개할 때 바라던 반응을 보여준 유일한 어른들이기도 하다. 연수 씨는 정신과에서 생전 처음 원조교제 사실을 터놓았을 때 "나쁜 사람들을 만나는 건 너의 마음을 해치고, 그런 행동을 거듭할수록 더욱 밑으로 빠질 뿐이야"라는 단호한 조언을 받았다. 이는 위험한 줄 알면서도 원조교제를 선택했던 연수 씨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반면 나무는 잘못을 따지기보다 연수 씨의 마음을 살폈다. "지금 많이 힘들어요? 어떤 방법이 지금보다 더 힘들지 않을 수 있는 길일까요?" 곁을 지키며 함께 대안을 찾는 활동가들의 말이 연수 씨에게는 큰 위로가 됐다.
이들은 연수 씨의 신상을 SNS에 유포하겠다는 익명의 협박에도 해결사 역할을 맡았다. 연수 씨는 처음 도움을 요청한 경찰로부터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으니 무시하라'는 답을 받았다. 뒤이어 찾아간 나무의 활동가들은 놀란 연수 씨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에서부터 변호사에게 법적 자문을 구하는 일까지 도맡았다.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끝에 연수 씨는 별 탈 없이 신상 유포 협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나무가 연수 씨의 '램프의 요정 지니'가 되는 순간이었다.

"언제든 도움 청할 수 있는 청소년 공간, 줄이지 말고 곳곳에 많이 설치해야"
의지할 곳이 생긴 연수 씨의 삶은 하루하루 달라졌다. 성인이 된 연수 씨는 자해도 끊고, SNS에 자해 사진이나 우울하다는 글도 올리지 않는다. 외로움을 달래려 위험한 '아저씨'들을 만나는 일도 그만뒀다. "앉아만 있어도 5만 원을 주겠다"는 아르바이트 공고에 속아 성매매에 몸담은 적도 있지만, 나무와 나무에게 소개받은 성매매 피해여성 상담기관의 지원으로 지난 4월 성매매를 완전히 중단했다. 이후 연수 씨는 학습과 진로 탐색에 집중하고자 청소년교육기관 교육을 수강하고 있다.
청소년쉼터부터 갖은 기관을 돌아다닌 연수 씨는 지금도 말 못할 고민이 생길 때면 나무를 찾아 조언을 구한다.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지원받을 수 있는 건 다 받고 싶어요. 나무는 제가 부족한 것들을 찾아서 채워줬고, 그건 병원이나 문화센터, 학교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어요." 만 24세 후기 청소년까지 지원할 수 있는 나무의 활동가들은 연수 씨에게 최고의 조언을 건네려 여전히 최선을 다한다.
연수 씨는 자신과 비슷한 위기 여성들을 지원하기 위해 "나무처럼 각자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찾아 도와줄 수 있는 공간이 지역 곳곳에 생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연수 씨가 나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나무의 규모나 지원 액수가 커서가 아니라, 방황하며 거닐던 동네에서 우연히 발견했을 정도로 접근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연수 씨의 경험은 기능 중복을 최소화하고 한 개 시설의 규모를 키워 통합 지원센터로 만들겠다는 서울시 정책과 정반대의 성격을 띤다.
연수 씨의 꿈은 동거하는 반려동물이 세상을 떠날 때 잘 보내줄 수 있도록 자신의 건강을 잘 돌보는 것이다. 이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연수 씨는 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할 계획이고, 그 계획에는 나무의 도움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연수 씨는 여전히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하던 공간을 서울시가 없애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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