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 병원에 갔다 온 어머니가 내게 흔치 않은 분노의 말을 쏟아낸 적이 있다. 의사에게 몸 상태에 대해 말하면서 "이건 이런 거 아니에요?"라는 식으로 몇 마디 물었다는데, 의사가 "뭘 안다고 그리 말하느냐"고 화를 내고 구박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면 생각하기 힘든 장면이었지만 당시로선 특별하다 할 것도 없는 일이었을 게다. 당시의 나는 푸코를 알지 못했지만, 푸코라면 필경 "의사가 환자를 대신해 말하고 환자는 그것을 자신의 진실로 받아들이는" 관계, 간단하게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라고 요약했을 그런 관계가 그 당시 의사와 환자의 통상적 관계였으니까.
지금은 환자와 의사가 서비스의 구매자와 판매자가 되고 의료행위는 친절을 요건으로 하는 '의료 서비스'가 되었으니 저런 무례함은 눈 씻고 찾아도 보기 힘들 터이다. 동일자와 타자의 직접적 권력관계가 화폐관계로 대체된 셈이다. 의대생들이 미용업과 인접한 성형외과로 몰리고, 안과나 피부과 등이 미용업과 가까워지는 것은 이런 사실의 단적인 징표라 하겠다. 잘 된 일이라 해야 할까? 환자 입장에선 분명 크게 좋아진 것이라 할 것이다. 어차피 병원이야 돈을 내고 가는 곳이니, 돈 낸 만큼 친절로 돌려받는 것이 열 받게 하는 권력관계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그렇긴 해도, 병원에서 의사가 자신의 신체에 대해 대신 말해주고 우리는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관계가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쇼핑하듯이 빈번하게 병원을 드나들지만, '내 몸의 병은 의사가 알아서 판단하고 치료해 줄 거야'라는 믿음은 친절해진 서비스 덕분에 오히려 더 공고해진 게 아닐까? 병이 나면 의사를 찾아가 몸을 맡기고, 그의 처방에 삶을 맡기는 태도가 일반적인 것을 보면,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는 돈과 서비스의 웃음 아래 숨어 그대로 존속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런 식의 말을 하면 대개는 의학처럼 고도로 전문화된 영역에서 우리가 의사의 판단에 기대지 않고 어찌하겠느냐는 반문을 받게 된다. 또 전문지식을 가진 그들이 정보를 제공하고 그렇게 제시된 정보를 바탕으로 환자는 자신에게 좋은 것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반박이 이어질 것이다. 결국은 환자의 선택이 최종심이고, 그 선택은 환자의 능동적 자유라는 생각은 의사와 환자 간 관계에 대한 최소한의 반감마저 지워준다. '그래, 어차피 의사의 능력에 달린 것인데, 그렇게 속 편히 믿고 맡기는 게 차라리 낫지'라고 할 수도 있겠다.
오해하지 말 것은, 철학적 개념 몇 개로 퉁 치며 병의 진단과 치료에서 의사의 능력을 폄하하고 현대의학의 힘을 의심하여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내기에, 때가 되어도 죽기 힘들어진 지금 시대에 어찌 그것을 의심할 것인가!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면, 애초에 건강했던 몸에 병이 생기는 것은 장기간의 부적절한 생활로 인해 발생한 것이기 마련이다. 유전적 소인이 있는 병들조차 많은 경우 나이가 들어서야 발병하는 것을 보면, 그리고 삶의 방식에 따라선 발병하지 않기도 하는 것을 보면, '내 병의 팔 할'은 내 자신이 매일 반복하는 삶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니 처방받은 약을 먹거나 수술로 병소를 제거해도 삶이 달라지지 않으면 병은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삶이 바뀌지 않으면 집 안을 더럽히는 것들이 대청소를 한다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되돌아오듯이 말이다. 병든 몸을 치료하는 데 의사들의 지식과 기술은 대단히 중요하고 효과적이지만, 그것조차 내 삶의 양상을 바꾸지 못하면 건강한 몸을 주진 못한다. 어디선가 읽은 니체의 말을 덧붙이면, 20년 동안의 삶으로 병든 몸을 며칠만의 치료로 고칠 수 있으리라 발상은 말 그대로 '한탕주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네마리 몰이 이 책에서 '선택의 논리'와 대비하여 제시하는 '돌봄의 논리'는 이러한 생리-철학(physiosophy)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보인다. 반면 '선택의 논리'는 선택가능성을 자유와 권리라고 이해하고, 선택의 주체를 개인이라는 '미리-가정된' 실체로 설정한다. 의학적 과정은 의사나 제약회사 등이 병의 제거를 약속하며 제공하는 정보에 따라 치료법을 선택함으로써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환자 자신의 선택이 바로 자신의 건강을 위한 자유와 권리라고 본다는 점에서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의학적 버전이라 하겠다. 이처럼 근대적 통념과 부합하기에 이 주장은 아주 쉬운 설득력을 갖는다. 의사가 환자를 대신해 판단하고 치료하는 일방적 관계와 달리 환자 자신이 선택의 형식으로 의학적 조치에 개입함을 전면에 내세워 강조한다는 점에서 양자 간에 대칭적 관계를 상정하고 있는 듯 보인다. 정치가나 매체가 제공하는 정보에 기반하여 투표를 통해 대표를 선택하는 근대적 주권의 개념과 동형적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논리는 개념적으로는 환자를 시장에서의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고객 내지 시민적 주체로 상정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환자의 신체를 계산적 지표(가령 혈당수치)를 목표치로 통제하는 조치들의 수동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 마치 근대인이 자신의 의식이나 의지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는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자신이 선택한 대표자나 그들이 만든 법에 복종해야만 하는 존재인 것처럼.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하는 주체란 개념이 선택의 결과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묻기 위한 것임을 잊는 한, 이런 이율배반은 모든 의문의 피안에 숨을 수 있다.
선택의 논리는 권력관계로서의 의사-환자 관계에 대한 비판을 통해 우리를 설득하지만, 사실 환자의 '선택'이란 무엇인지, 그것을 충실히 대의하는 것이 병이 문제화된 장에서 타당한 것인지를 저자는 묻는다. 당뇨병 환자가 과도하게 단 음식을 먹고 폐병 환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정말 그 환자의 자유로운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 환자의 의사를 그대로 존중해주는 것이 정말 의사나 간호사가 해야 할 일일까? 그러나 이런 말은 어느새 환자에 대한 의사나 간호사의 판단을, 그들의 권력을 그대로 용인하자는 말로 들리기 십상이다. 다시 권력과 선택의 대립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마치 선택의 논리를 따르면 그러한 권력과 통제가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와 대비되며 제시되는 '돌봄의 논리'는 선택가능성을 뜻하는 환자의 자유가 아니라 환자의 삶을 기준으로 삼는다. 병의 제거가 아니라 병과 함께 하는 삶으로 지향점을 바꾼다. 정상과 병리, 질병과 건강의 배타적 택일이 아니라 '병과 함께 하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임을 주목한다. 저자가 인류학적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당뇨병의 경우, 알다시피 병이 제거되는 '정상'이란 거의 도달할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치료'의 약속이란 냉정하게 말하면 거짓말 아니면 불가능한 꿈이다. 그렇다고 그 병이 있다고 살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 병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 그 삶의 방식이 어떻게 '건강'할 수 있을까만이 문제인 병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대다수의 병들이 그렇지 않을까? 증상화되는 정도나 양상이 일상적 삶을 중지시키는 문턱이나 치명성의 문턱을 넘지 않게 하는 것, 이를 위해 적절한 약이나 처방을 하고, 환자 자신의 신체와 생활을 조절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병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병을 제거하기 위해 삶을 바치는 것이 상례가 된 지금 세상에서라면 병과 함께 사는 삶을 지향점으로 삼는 이러한 논리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를 위해 의사와 간호사, 환자 및 그 가족 등이 적절하게 협력하고 조율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 그것이 돌봄의 논리다. 따라서 돌봄은 의사나 간호사, 가족만이 아니라 환자 자신의 활동이기도 하다. 돌봄의 논리를 가동시키는 주어는 그렇게 협력해야 하는 집단, 공동체다. 이 점에서 돌봄의 논리는 미리-가정된 실체로서의 개인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는다. 최소한 의사-간호사-환자-가족이 결합된 집합체가 출발점이고 주체다. 이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공동체'다. 이 돌봄의 논리에서는 의사나 간호사가 환자의 자유의지('선택')를 대변하거나 그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이 좋은 게 아니다. 병과 함께 하는 삶이 좀더 나아지도록, 병을 앓는 신체가 좀더 좋아지도록 적절한 처방과 판단, 실천을 환자와 함께 구성하는 것이 문제다. 그러기 위해 의사나 간호사는 환자의 말에 귀기울이고, 환자는 의사나 간호사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신체 상태를 주시하며 그에 맞추어 적절한 처치의 방법을 찾아내길 반복해야 한다.
여기서 판단의 주체는 의사도 환자도 아닌, 돌봄이란 말로 결합된 집합체이기에, 의사의 전문성과 환자 자신의 자유선택을 대립시킬 이유가 없다. 의사와 환자를 권력과 자유(선택)의 이항대립에 포개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환자의 신체와 삶을 위한 이런저런 조치를 하나로 묶어주는 '의사노릇(doctoring)'이란 개념은 이러한 돌봄의 논리를 집약하는 중심 개념이다. 상황과 조건, 건강상의 필요에 맞추어 적절한 처지를 하고 활동을 조절하는 집합적 브리콜라주(변통술), 그것이 '의사노릇'이고 그것이 돌봄이다. 동사로서의 그 단어의 주어는 의사가 아니라 의사-환자-간호사-가족 등이 결합된 돌봄의 공동체다. 의사와 환자, 권력과 자유라는 이항대립뿐 아니라 정상과 병리라는 개념마저 가로지르는 멋진 개념이다.
이 책은 특정 병원 인근의 현장에서 당뇨병 관련자를 인류학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지만, 이러한 '논리'나 개념이 당뇨병으로 국한될 이유는 없다. 물론 저자가 말하듯 다른 조건, 다른 병, 다른 환자로 달라진다면, 이 책의 주장은 그 변화된 조건에 맞는 것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한 번역가능성은 조건에 따라 다르게 반복될 실천의 특이성과 상응한다. 이 특이성은 개인과 자유, 시장 등의 개념에 물려 자본주의적 서비스가 되어버린 의료의 장에서 환자뿐 아니라 의사나 간호사 또한 벗어나게 해줄 작은 출구가 되어주리라는 생각이다. 선택의 논리가 개인주의나 자유주의와 짝을 이룬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번역가능성은 병과 의학의 영역을 넘어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 책이 개별적 사례에 집중하는 인류학적 연구임에도 '일반성'을 다루는 사회학이나 정치학, 혹은 철학이 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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