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이 저질렀던 홀로코스트(집단학살) 희생자는 연구자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1100만 명이고 많게는 1700만 명 또는 2000만 명쯤으로 추산된다. 희생자들 가운데는 유대인 500~600만 명, 소련 전쟁포로 270만~330만 명, 폴란드 비(非)유대인 민간인 180만~250만 명이 포함돼 있다. 역사학계도 유대인들이 나치 학살의 최대 희생집단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논란은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를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보는 데서 비롯된다. 적지 않은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를 지금껏 이스라엘이 저질러온 전쟁범죄의 '면죄부' 또는 '선(先)지급금'인양 여기고 있다.
1928년생으로 올해 97세인 일본 원로학자 미야타 미쓰오(宮田光雄, 도후쿠대 명예교수, 유럽정치사상사)도 그런 문제의식을 지녔다. 그는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들이 오늘날 팔레스타인 민족을 억압하는 현실에 의문을 나타낸다. 한국에도 번역 소개된 책(ホロコースト '以後'を 生きる, 2009)에서 유대인들이 걸핏하면 홀로코스트를 내세워 전쟁에 관한 국제법을 어기면서 그들의 불법 행위를 합리화하는 것이 오히려 홀로코스트의 깊은 의미를 가볍게 만든다고 안타까워한다.
[이스라엘은 한편에서는 대량학살이라는 파국의 시대 속에서 홀로코스트라는 일회성의 역사를 반복해 주장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고정관념처럼 입에 올림으로써, 홀로코스트가 가진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낮추는 진원지가 됐다. 팔레스타인(아랍)과의 대립 상황 가운데 홀로코스트의 특정한 메타포(metaphor, 은유)가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해 오용되었고, 심지어 정치적 우파진영에서는 아랍이 나치에 비유되는 일까지 생겨났다](미야타 미쓰오,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다>, 한울, 2013, 224-225쪽).
미야타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저지르는 전쟁범죄에 대한 모든 비판이나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면책시키는 수단으로 홀로코스트를 이용하고 있다고 못마땅해 한다. 홀로코스트를 마치 카드놀이의 '으뜸패'처럼 활용하면서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바깥 세계와의 이성적 대화에 관심을 쏟지 않는다는 지적이다(미야타는 중동분쟁을 풀기 위한 해법의 하나로 종교간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는 교과서에 나오는 원론적인 해법일 뿐이다. 근래의 살벌한 상황은 종교간 대화마저 꽉 막아버렸다).
유대인들이 일반명사인 홀로코스트(holocaust)를 고유명사(Holocaust)로 바꿔 독점하려들고 이를 면죄부인양 내세우는 것도 문제지만, 홀로코스트를 돈벌이로 여기는 '홀로코스트 산업'도 문제다. 유대인 단체들은 가해자(독일 정부와 기업, 스위스은행)로부터 받아낸 배상금을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나눠주지 않는 '이중 갈취'로 배를 불렸다.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키워 이스라엘을 감싸는 것이 유대인 파워의 목표다. 그 과정에서 훼방꾼이라 여겨지는 비판자들은 제거됐다.

학위 논문, "홀로코스트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노르만 핀켈슈타인(Norman Finkelstein, 1953-, 전 드폴대)은 유대인 파워에 밀려 제거된 희생자들 가운데 하나다. 지난 연재 글에서 봤듯이, 그는 '유대인 배상청구회의'(JCC)를 비롯한 유대인 단체 임원들과 변호사들이 홀로코스트를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행위와 탐욕을 비판해왔다. 미 유대인 주류사회로부터 미운털이 박힌 그는 2006년 종신교수직(tenure) 심사에서 떨어졌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부모로 두었기 때문일까, 청년 핀켈슈타인의 학문적 관심사는 홀로코스트였다. 1988년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 제목은 '시온주의와 홀로코스트: 최종해결에 대한 시온주의 대응 연구'(Zionism and the Holocaust: A Study of the Zionist Response to the Final Solution)였다. 나치가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사실상 '절멸')에 나설 때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로의 이주에만 관심을 쏟았을 뿐, 유럽 유대인의 생존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홀로코스트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유대인 지도자들이 쉬쉬하며 감추려는 아픈 대목이다.
핀켈슈타인은 학위논문을 쓰면서 문제의 책 한 권을 주의 깊게 살폈다. 미 유대인 방송작가 조안 피터스가 쓴 <태곳적부터>(From Time Immemorial, 1984)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팔레스타인에는 70만~80만 명의 아랍인들과 5만~6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태곳적부터>는 20세기 초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옮겨갈 무렵 그 지역은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빈 땅'이라 주장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때 75만 아랍인들(토착 인구의 80%)이 쫓겨나 난민이 됐다. 피터스는 "쫓겨난 난민들이 원주민들은 아니다"라고 우겼다. 유대인들이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자, 주변 아랍지역에서 옮겨온 '이주민'이라는 얘기다. 필자의 책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에서 관련 내용을 옮겨본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팔레스타인 인구지도에 관련된 자료들을 멋대로 왜곡한 <태곳적부터>는 워낙 황당한 내용으로 채워졌기에 곧 비판에 부딪혔다. 핀켈슈타인은 국내에도 소개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이미지와 현실>(Image and Reality in the Israel-Palestine Conflicts, 1995)에서 피터스의 책을 '희대의 사기작'이라 혹평했다. 그러나 미 유대인 단체들과 유대인들이 장악한 미디어로부터 <태곳적부터>는 격찬을 받았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사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20~30년 전에 그곳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며 그 전에는 빈 땅이었다"고 주장할 때 근거를 대는 '권위서'가 됐다](김재명,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미지북스, 2021, 242-244쪽).
촘스키, '정보기관의 짜깁기' 의심
<태곳적부터>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다. 초판이 나온 1984년 연말엔 양장본으로만 8쇄를 거쳤고, 200편 가량 극찬을 담은 서평들이 쏟아졌다. 1985년 전국유대인도서상을 받았다. 피터스는 잇단 TV 출연과 언론 인터뷰, 미 전역의 유대인 단체들로부터의 강연 요청을 따르느라 몹시 바빴다.
박사 논문을 준비하던 대학원생 핀켈슈타인은 <태곳적부터>가 엉터리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는 그 책의 오류와 표절 등의 문제점을 짚은 25쪽 분량의 문서를 만들어 관심이 있을 법한 연구자 30명에게 발송했다. 하지만 한 사람을 빼고는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단 한 사람이 바로 노엄 촘스키(1928-, MIT대, 언어학)였다. 촘스키의 역작(Understanding Power, 2002)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태곳적부터>는 대박을 터트린 그해(1984)의 인문교양서였다. 많은 이들이 그 책을 가리켜 '초콜렛 케이크의 발명 이래로 가장 멋진 사건'이라고 떠벌렸다. 그런데 프린스턴대의 핀켈슈타인이란 아주 신중한 청년이 책의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책의 전체가 날조된 게 드러났다. 이 책은 완전히 가짜였다. 아마도 정보기관이나 그 비슷한 단체가 내용을 짜깁기했을지도 모른다](노엄 촘스키,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2, 세대의 창, 2005, 270쪽).
딱 집어 말하진 않았지만, 촘스키는 <태곳적부터>가 정보기관이 이런 저런 자료와 통계를 짜깁기해 피터스의 이름을 빌려 펴냈을 것으로 짐작했다. '정보기관'이라면 이스라엘 모사드 말고는 딱히 떠올릴 만한 게 없어 보인다.
촘스키의 걱정, "당신 경력이 망가진다"
미국의 언론이나 연구자들은 문제점을 못본 체 했다. 나름의 공신력을 인정받아온 저널인 <뉴욕 리뷰 오브 북스>(New York Review of Books)조차 비판적인 리뷰를 싣지 않았다. 촘스키의 표현에 따르면, '<뉴욕 리뷰 오브 북스> 편집자는 이 책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친구들(유대인집단)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리뷰를 싣지 않았다. 다른 매체나 연구자들도 몸을 사렸다. 촘스키는 핀켈슈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젊은 연구자의 장래가 이로 말미암아 가시밭길을 걷게 되지 않을까 염려를 나타냈다.
"만약 당신이 이것을 추적한다면, 당신은 미국의 지식인(유대인) 공동체가 사기꾼 집단임을 폭로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당신을 미워하며 파멸시키려 들 것이다. 이 주장을 펴다가 어떤 끔찍한 일을 당할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의 밥줄과 생명이 걸려있는 문제니까. 당신의 생명도 걸려 있다. 만약 이것을 끝까지 추적한다면, 당신 경력이 망가지고 말 것이다"(노엄 촘스키, 271-272쪽. 영문 요약본⇒https://chomsky.info/power01/).
생각이 깊고 지혜로운 촘스키의 걱정은 터무니없지 않았다. 프린스턴대 지도교수들은 핀켈슈타인이 쓴 학위논문 초고를 읽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절망한 나머지 핀켈슈타인은 촘스키에게 조언을 구했다. 촘스키는 '좀 더 너그럽게 대해줄 것 같은' 교수들이 있는 다른 학과를 옮겨가길 권했고, 핀켈슈타인은 그 조언을 따른 뒤 어렵사리 박사학위를 받았다.

'쓰레기' 혹평 받고 사라졌다가 재출간
그 무렵 미국 유대인들의 집중 지원을 받아 불티나게 팔리던 <태곳적부터>가 영국에서 출판된다는 소식을 듣자, 촘스키는 핀켈슈타인이 쓴 비판 문서를 영국의 주요 언론사와 연구자들에게 보냈다. 미국과 달리 영국의 반응은 싸늘했다. 촘스키의 표현을 빌리면, 가장 친절한 논평의 단어가 '웃기는' 또는 '앞뒤가 맞지 않는'이었다. 핀켈슈타인의 글을 보자.
[영국에서 나온 논평들은 참혹했다. 옥스퍼드대학의 동양학자 앨버트 후라니는 <옵서버> 지에 실은 논평에서 <태곳적부터>가 '우스꽝스럽고 쓰레기 같다'고 깎아내렸다(사적인 자리에서 후라니는 그것을 '그로테스크한 작품'이라 불렀다). 이언 길모어와 데이비드 길모어는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서 8000단어 분량으로 이 책을 철저히 분석한 뒤, '터무니없는 책'이라 결론지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컬럼비아대, 영문학)은 <네이션> 지에서 피터스와 그의 시종들에게 통렬한 반론으로 맞받아쳤다](노르만 핀켈슈타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이미지와 현실>, 돌베개, 2004, 124-125쪽).
뒤늦게 미국의 독자들이 피터스의 <태곳적부터>가 엉터리라고 깨달았을 무렵, 책은 서점가에서 없어졌다. 그런데 2001년 2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희대의 사기작'이란 혹평을 받았던 <태곳적부터>가 다시 출간됐다. 미 유대인 단체들과 미디어들의 격찬을 받으며 아마존 판매 순위 맨 위에 올랐다. 핀켈슈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가 저지른 사기행각이 드러나자 어둠속으로 사라졌던' 피터스는 다시 밀려드는 강연 요청을 받았다.
생각해볼 점 하나. <태곳적부터>가 재출간된 시점과 배경에 대해서다. 출간 5개월 앞서 2000년 9월 당시 이스라엘 강경파 정치인 아리엘 샤론이 이슬람 성지인 예루살렘 알아크사 사원에 의도적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도발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티파다(intifada, 봉기)가 일어났고, 유혈상황은 2005년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태곳적부터>의 재출간은 이스라엘의 대외 선전에 나름의 역할을 할 것이란 판단 아래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보기관이 책 출간에 관련됐을 가능성을 촘스키가 짚은 것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유대인 '경비견'(watchdog)의 집요한 비방
핀켈슈타인은 뉴욕 지역의 여러 대학(럿거스대, 브루클린대, 헌터대, 뉴욕대)에서 강사로 지내다가, 2001년 미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자리한 가톨릭 계열 대학인 드폴대학 정치학과 조교수로 자리 잡았다. 동료교수들과 학생들의 평판은 좋은 편이었다. 학문적 성과물도 여럿 냈다. <팔레스타인의 흥망성쇠>(The Rise and Fall of Palestine, 1996)는 1차 인티파다(1987-1993) 때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보고 느낀 점을 담은 정치 에세이다. 이스라엘 점령 아래 고통 받는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나치 독일의 억압 통치에 견주었다. <홀로코스트 산업>(The Holocaust Industry, 2003)은 그가 쓴 책 가운데 가장 많은 관심을 모았다.
이스라엘과 미 유대인 압력단체들에 비판적인 핀켈슈타인의 성향은 (촘스키의 걱정대로) 그의 경력을 망가뜨렸다. 2006년 드폴대의 종신교수 임용(tenure) 심사과정에서 탈락했다. 드폴대 정치학과 및 단과대학 위원회는 그를 지지했었다. 하지만 상급 위원회와 대학총장은 반대했다. '학문적 품위 부족'과 '동료학자에 대한 공격적 언사'가 탈락 이유였다. 그 과정에 깊이 끼어들었던 자가 앨런 더쇼비츠(1938-, 하버드대, 법학)다.
더쇼비츠의 또 다른 직업은 변호사다. 1994년 백인 전처와 그의 애인을 잔인하게 죽인 혐의을 받는 전직 미식 축구선수 O.J.심슨의 변호를 맡아 무죄를 이끌어냈다. 그는 친이스라엘 강성 시온주의자로서, 누군가가 반이스라엘 발언을 하면 곧장 물어뜯는 '경비견'(watchdog) 또는 '핏불'(pit bull, 맹견, 투견)이란 악명을 얻었다. 그는 핀켈슈타인 비방 서신을 드폴대에 잇달아 보내는 등 아주 집요한 공세를 폈다. 예전부터 유대인 주류사회에 밉보였던 핀켈슈타인이 실수(?)를 저질렀다면, 더쇼비츠의 개인적 원한을 샀다는 점이다.
더쇼비츠는 핀켈스타인의 <홀로코스트 산업>이 나온 같은 해에 문제의 책을 하나 냈다. 이스라엘의 유대국가적 정통성을 내세우는 책(The Case for Israel, 2003)이다. 문제는 그 책 속에 담긴 뒤틀리고 극단적인 친이스라엘 시각이다. 게다가 함량 부족, 표절 의혹이 따랐다. 핀켈슈타인은 그 책 곳곳에 피터스의 <태곳적부터>를 표절했다고 지적했다. "잘못된 통계도 그대로 베꼈다"는 신랄한 비판이었다(드폴대 총장이 테뉴어 심사 탈락 이유로 꼽은 '학문적 품위 부족'과 '동료학자에 대한 공격적 언사'가 바로 더쇼비츠와 관련된다).
논란이 커지자, 2003년 9월4일 미국의 진보적 매체인 <지금 민주주의>(Democracy Now!)에서 핀켈슈타인과 더쇼비츠 두 사람을 불렀다. 방송진행자 에이미 굿맨의 사회 아래 50분 동안 맞장 토론을 벌였다. 말이 토론이지, 핀켈슈타인은 '책 몇 페이지에 이런 내용을 표절했다'면서 구체적으로 공격했고, 더쇼비츠는 '그게 아니고 사실은....'하며 변명하느라 바빴다(사진 참조). 댓글에는 '저런 사람이 하버드대 교수냐 창피한 줄 알아야지' 등의 비판이 따라붙었다(⇒https://www.youtube.com/watch?v=GzqTWpPI5Qw).
지난 글에서 핀켈슈타인의 노모(홀로코소트 생존자)는 배상금을 타내려는 가짜 생존자와 배상금을 갈취하는 홀로코스트 산업가 양쪽을 경멸하면서 "유대인들이 추즈파(chuzpah, 뻔뻔함, 후안무치)란 말을 만들어낸 것은 우연이 아니란다"라는 말을 아들에게 들려줬다고 했다. 핀켈슈타인은 2005년 더쇼비츠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책 <추즈파를 넘어서>(Beyond Chuzpah, 2005)를 냈다. 부제목 '반유대주의의 오용과 역사 남용에 대하여'(On the Misuse of Anti-Semitism and the Abuse of History)이 말하듯, 책의 전반부는 미국 유대인들이 ('반유대주의'라는 개념을 조작해)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을 무조건 '반유대주의'로 몰아치며 이스라엘을 감싸는 행태를 다루었다.
이 책 후반부는 (책 제목대로 '후안무치'한) 더쇼비츠를 겨냥한 비판이다. 이스라엘의 인권 기록을 위조하고 피터스의 <태곳적부터>를 표절했다고 지적했다. 물론 그 지적은 정당했다. 바르후 킴머링(Baruch Kimmerling, 히브리대, 사회학)은 출판사 표지 소개글에서 <추츠파를 넘어서>는 '가장 포괄적이고 체계적이며 잘 문서화된 책'이라고 평했다. 아말 비샤라(Amahl Bishara, 미 터프츠 대, 인류학)는 이런 서평을 남겼다. "더쇼비츠의 책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을 통해, 이스라엘의 점령이 인권을 침해하고 국제법을 심각하게 어기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이스라엘이 정당하고 인도적'이라는 더쇼비츠의 주장을 해체(dismantle)해버렸다"(Amahl Bishara, Book Review, <The Arab Studies Journal>, Vol. 13/14, Fall 2005/Spring 2006).
촘스키, "유대인들이 거대한 반대 캠페인 폈다"
더쇼비츠는 자신을 겨눈 <추즈파를 넘어서> 출판을 막으려 애를 썼으나 실패했다. 캘리포니아대 출판부에 편지를 보내 "책을 낼 경우 소송을 걸겠다"고 협박하고,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놀드 슈워제네거에게도 편지를 보냈으나 통하지 않았다. 속으로 칼을 갈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핀켈슈타인의 종신교수직 심사가 다가오자 맹공격에 나섰다. 거칠게 말하자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드폴대 교수들이 컴퓨터를 열면, 더쇼비츠를 비롯한 유대인집단에서 보낸 이메일 폭탄이 쌓여 있었다. 집요하고 전방위적인 공격이었다. 친이스라엘 미디어들은 핀켈슈타인이 '자기혐오에 빠진 유대인'(self-loathing Jew)라고 공격했다.
더쇼비츠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도 동원됐다. 그의 홈페이지(alandershowitz.com)에다 "핀켈스타인의 가장 비열한 말", "핀켈스타인의 가장 멍청한 말 10가지" 따위를 써내게 했다. 근거 없는 비방은 기본이었다. 이를테면, 핀켈슈타인의 어머니가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것은 '나치 협력자'였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12명의 교수로 구성된 드폴대 '예술 및 과학 교수 거버넌스 위원회'는 더쇼비츠의 요란한 공세에 짜증이 난 나머지, 하버드대 총장에게 "더쇼비츠의 비방을 멈추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교수위원회는 "더쇼비츠 쪽 공격은 너무나 터무니없고 경솔한 행동"이라 질타했다.
놀랍게도 결과는 테뉴어 탈락이었다. 미 학계에서 큰 논란이 벌어졌다. 유대인 파워의 정치적 보복과 압력이 주요인이란 지적들이 나왔다. 홀로코스트 연구의 선구자로 꼽히는 라울 힐베르크(1926-2007, 버몬트대)는 핀켈슈타인을 지지하는 편지를 드폴대학으로 보냈다. 물론 노엄 촘스키도 지지 편지를 보냈다. 심사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촘스키는 그 뒤로 기회 있을 때마다 핀켈슈타인의 탈락 과정에서 유대인 주류들이 보인 태도를 비판했다. 2007년 4월 미국의 진보적 매체인 <지금 민주주의>(Democracy Now!)의 사회자 에이미 굿맨과의 인터뷰가 그랬다. 20분쯤 이어졌던 인터뷰에서 촘스키는 터무니없는 비방을 했던 더쇼비츠를 '미치광이'라고 대놓고 비난했다.
"모든 것이 터무니없어요. 핀켈슈타인이 뛰어난 학자로, 책을 잇달아 출간했어요. 여러 저명한 학자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았고, 교수진-학과위원회도 그를 추천했지요. 그가 정교수 직을 맡지 못했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앨런 더쇼위츠가 앞장 선 유대인들의 거대한 반대 캠페인은 필사적으로 그의 명예를 훼손하고 비방했어요. 드폴대는 그런 비방 움직임을 끝낼 것을 하버드대에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미치광이(maniac)를 막기 위해서였죠](⇒www.democracynow.org/2007/4/17/noam_chomsky_accuses_alan_dershowitz_of).
드폴대에서 쫓겨난 핀켈스타인은 미 대학가에서 사실상 퇴출됐다. 2014-15년 터키 사카리아대 중동연구소에서 강의했을 뿐, 개인 연구자로 남았다. 2018년에 펴낸 <가자: 그 순교에 대한 탐구>(Gaza: An Inquest into Its Martyrdom)는 제목만으로 핀켈슈타인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짐작하게 만든다. 440쪽 분량의 책에서 그는 가자지구 난민들의 처지를 가리켜 '인간이 만든 인도주의적 재난'(man-made humanitarian disaster)이라 했다. 그는 여러 인권보고서를 검토하면서, 국제기구(국제앰네스티, Human Rights Watch, 유엔 인권이사회)가 이스라엘의 전쟁범죄로부터 팔레스타인의 인권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상황은 유대인 파워가 초강대국 미국을 휘어잡은 결과물이다.

유대인 파워의 또 다른 희생양, 아랍계 지식인
유대인들에게 밉보여 대학에서 퇴출된 교수는 핀켈슈타인뿐 아니다. 유대인 파워가 만들어낸 또 다른 희생양이 스티븐 살라이타(Steven Salaita, 버지니아 공대, 영문학)였다. 살라이타는 아랍계 지식인으로, 팔레스타인-요르단계 혈통을 지녔다. 유대인의 이익과 생존만을 내세우는 시온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의 책 <이스라엘의 죽은 영혼>(Israel's Dead Soul, 2011)을 펴냈고, 친팔레스타인 인터넷 매체인 '일렉트로닉 인티파다'(https://electronicintifada.net/)에도 글을 싣곤 했다.
유대인들로부터 곱지 않은 눈길을 받고 있던 살라이타는 2013년 일리노이대에서 미 원주민 연구 프로그램을 맡을 종신교수로 뽑혔다. "미 원주민과 팔레스타인의 경험이 교차하는 지점에 대한 그의 학문적 독창성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 대학 쪽 설명이었다. 일리노이대로 옮겨갈 준비를 하던 2014년 7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침공하면서 문제가 터졌다. 많은 팔레스타인 희생자들이 생겨나자, 살라이타는 분노한 나머지 7월 한 달 동안에만 수십 개의 트윗을 올렸다. 그 가운데 몇 개만 보자.
[△지금 #이스라엘을 옹호한다면 당신은 '끔찍한 인간'(awful human being)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갈등이 아니다. 식민지 권력에 맞선 토착민의 투쟁이다. △시온주의자가 내세우는 반유대주의 논리를 적용하면, '미친 놈'(sociopath)이 아닌 한 거의 모든 사람을 '반유대주의자'로 만들 거다. △식민지화, 토지강탈, 아동살인을 비난하는 것이 '반유대주의'라면, 양심이 있는 사람에게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 △지금 이스라엘을 옹호한다면, '절망적으로 세뇌 당했다'는 진단이 정확하다. △네타냐후 총리가 팔레스타인 어린이 이빨로 만든 목걸이를 하고 TV에 등장한다면 누가 놀랄까?](⇒https://www.dailykos.com/stories/2015/8/18/1412900/-The-Salaita-Tweets-A-Twitter-Outrage-concordance).
이런 반이스라엘 트윗들이 그의 경력을 망가뜨리는 불씨가 됐다. 2014년 8월 가을학기에 맞춰 가족과 함께 일리노이대로 가려던 살라이타는 유대인들의 엄청난 공격에 부딪쳤다. 유대인 집단(교수, 학생, 기부자, 지역 언론)들이 한 목소리로 "살라이타에게 교수직을 줘선 안 된다"고 캠페인을 벌였다. 일리노이대 총장 필리스 와이즈는 유대인들로부터 수백 통의 항의 메일을 받았다. 결국 일리노대 이사회는 살라이타의 교수 임용 건을 취소해 버렸다.
이미 전 직장인 버지니아 공대에 사표를 낸 살라이타는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일리노이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고, 87만 5000달러의 합의금을 받아냈다. 하지만 미 대학에서의 강의 기회가 사라졌다. 2015년 레바논 베이루트의 아메리칸대 영문과에서 1년 계약직 교수로 있었다. 그 뒤 2019년 워싱턴 교외에서 스쿨버스 운전사로 일한다는 소식이 잠간 전해졌다. 다행히 2023년 이집트 카이로 아메리칸대 영문과 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분명한 사실은 살라이타는 미 대학에서 시간강사 자리조차 잡질 못했다. 핀켈슈타인과 마찬가지로 미 학계에서 퇴출됐다.
너무 높고 강고한 유대인 파워의 벽
이제 글을 매듭지어야겠다. '홀로코스트 산업가'들을 포함한 유대인 파워의 시각에서 보면, 핀켈슈타인과 살라이타 퇴출은 일종의 본보기인 셈이다. "반이스라엘 언동으로 유대인들에게 밉보이면 누구든 불이익을 각오해야 한다"는 경고다. 정치권과 언론계에서도 여럿이 퇴출당했다. 큰 틀에서 보면, 나치 홀로코스트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전쟁범죄와 인권침해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둘러싼 시각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이고 힘겨루기다. 승자는 외견상으론 늘 유대인이고 이스라엘이다.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사의 엄청난 비극을 이용해 막대한 자금과 영향력을 쌓아올린 유대인 파워는 이스라엘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로비를 해왔다. 그로 말미암아 미국의 중동정책은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로 기울었고 여러 폐해를 낳았다. 특히 이즈음 가자 지구의 재난은 끔찍한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핀켈슈타인, 살라이타, 그리고 촘스키를 비롯한 비판적 지식인들은 일찍이 그런 상황을 걱정하면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다. 오늘 글을 쓰면서 새삼 깨닫는 사실이지만, 유대인 파워의 벽은 너무 높고 강고한데다 독선적이다. 이런 상황은 21세기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여겨지는 인권과 지구촌 평화에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앞으로 이 연재는 딱 두 번 남았다. 다음 주엔 독일 지식인들과 보통사람들이 나치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최종회 글에선 독일의 과거사 반성과 이웃 국가들과의 화해를 잘 했는지 (일본에 견주어) 살펴보고 연재를 끝낼 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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