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일 인기 있는 스포츠는 무엇일까. 마라톤이다. 지난 24일 있었던 춘천마라톤대회 참가신청은 3분만에 마감됐다. 동아마라톤과 JTBC마라톤은 접수 개시와 동시가 서버가 다운되는 일이 반복돼 추첨제로 전환했는데 당첨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이들 3대 메이저대회 참가자 수는 무려 4만 명에 달한다. 가히 마라톤 열풍이라 할 만 하다.
한강변, 양재천, 여의도공원 등 곳곳에 달리기 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젊은이들의 '러닝 크루'는 앞뒤 주자가 경광봉을 들고 수십명이 함께 달리기도 한다. 사실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운동임에도 가녀린 외모의 여성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무리지어 내달리는 모습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10여년 전만 해도 마라톤 인구는 50대가 주축이었는데 이제 2030 세대가 대세다.
그런데 궁금하다. 달리기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렇게 폭발적 인기를 누리는데 왜 육상부는 인기가 없을까. 당연하다. 공부도 안 시키고, 감독으로부터 욕이나 듣고, 선배가 때리고, 코치로부터 인격적 모욕은 물론 성추행을 감내해야 하는 곳에 갈 이유가 없다. 합숙소에 갇혀 나의 자유도 없고 운동부 외엔 친구도 없는, 이 재미없는 운동을 왜 하겠나. 이렇듯 똑같아 보이는 운동도 어디냐에 따라 천지 차이다. 친구들과 하면 꿀맛인데 운동부에서 하면 죽을 맛이다.
스스로 단절을 선택한 K-스포츠
그래서인가. 우리나라에선 운동부에서 운동하겠다는 사람이 없다. 달리기가 이렇게 인기지만 우리 육상 총 등록선수가 고작 5800여 명이다. 이웃 일본은? 42만 명. 인기종목도 마찬가지다. 우리 고교 축구팀은 200개가 안 되는데 일본은 4천개다. 야구팀은 100개도 안 되는데 일본은 4천개가 넘는다. 우리는 한 팀에 30~40명인데 반해 일본은 100~200명이다.
농구, 배구로 가면 더 놀랍다. 우리의 고교 배구팀은 남·여 다 합해봐야 40개, 농구팀은 50여개인데 일본은 각각 7천개다. 남·녀팀이 따로 있어서다. 대한체육회 등 체육인들은 '선수 부족'의 원인으로 출생률 저하를 첫손 꼽는데 비겁한 변명이거나 멍청한 거다.
우리 체육계는 재미있게, 동기 부여하며, 스스로 운동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한다. 서구는 물론 이웃나라는 선수는 풍년, 관중은 만석인데 왜 우리나라만 선수 부족에 시달리며 텅 빈 경기장에서 경기를 해야 할까. 정말 이유를 모르는 건가, 아니면 외면하는 건가.
체육계는 엘리트 스포츠 붕괴를 주장한다. 2012 런던올림픽 때 380명이 출전했는데 작년 파리올림픽 선수단은 144명이었다. 여자핸드볼 제외하면 단체 종목은 전멸이다. 그런데 체육계는 붕괴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외면한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그놈의 '전폭적인 지원'만 허구한 날 외치고 있다.
체육영재학교? 더 공부 안 시키고, 더 폐쇄적으로?
지난 26일엔 민주당 임오경 의원이 체육영재학교 설립을 위한 '국민체육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 공동발의에 나섰다. 현행 제도로는 체육영재를 조기에 발굴하여 잠재력 극대화하기 어려우니 '스포츠 과학과 인문학적 소양을 겸비한 융합형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고교 과정 이하의 체육영재학교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구시대적 발상이다. 더 어린 나이에, 더 폐쇄적으로, 아이들 가둬놓고, 하루 종일 운동시키겠다는 것이다. 특히 이 개정안에 따르면 이 학교 운영은 "초·중등교육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무시무시한 법이다. 스포츠를 제도권에서도 이탈시켜 일반인과 일반학생들과도 완전히 단절된, 자기들만의 고립된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시도다. 요즘 어느 세상에 이런 스포츠가 있을까.
엎친 데 덮친 격, 유승민 대한체육회장은 지난 달 전국소년체전에서 운동하는 아동의 학습권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방편인 최저학력제, 출석인정결석허용일수, 합숙소 운영금지, 이 모두를 자신의 임기 내에 폐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성장하는 아동, 청소년들의 최소한의 인격권마저 무시하는 어처구니 없는 행태일 뿐 아니라 일반 아동, 학생들의 스포츠에 대한 접근권도 동시에 봉쇄하는 만행이다.
막 가는 스포츠 행정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작년 대한체육회의 비리와 극도의 혼란상과 관련해 "어떻게 해서 체육회가 이렇게 괴물이 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체육계는 엉망이 됐다. 전임 이기흥 회장은 지난 11일 직원부정채용, 물품 후원 요구(금품 등 수수), 후원 물품 사적 사용(횡령), 예산 낭비(배임) 등의 혐의로 자격정지 4년의 징계를 받았다.
신임 회장도 못지 않다. 지난 4월 문체부 산하 스포츠윤리센터는 대한탁구협회 측에 국가대표 선수 바꿔치기 및 임직원 인센티브 부당 지급을 들어 유승민 전 탁구협회장에 대한 징계를 요구했다. 체육계는 이제 대한체육회장에 대한 징계를 의결해야할 코미디 같은 처지에 놓였다. 유 회장은 자신의 SNS에 '실수는 인정하나 고의성은 없었다'는 해명을 내놨는데 그는 "다만 체육인을 혼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악의적인 음해나 허위사실에 대해선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라는 사실상의 협박으로 마무리한다. 그가 '젊은 이기흥'으로 불리는 이유다.
지금 대한민국 체육을 책임지는 핵심 포스트엔 과거의 메달리스트들 뿐이다. 여당인 민주당의 임오경 의원, 야당인 국민의힘 진종오 의원, 문체부엔 장미란 2차관이 있고 체육계 재정을 담당하는 국민체육진흥공단엔 하형주 이사장이 있다. 체육영재학교라는 시대에 역행하는 발상이 충분히 가능한 이유다.
누가 대한민국 스포츠의 붕괴를 가져왔는가
국회 뿐 아니라 국가 체육정책의 정점에 있는 2차관에 유난히 메달리스트들을 많이 임명한 것도 엘리트 스포츠 붕괴를 가속화하는 요인이었다. 박근혜 정부 때 사격의 박종길이 임명된 이후, 문재인 정부 최윤희, 윤석열 정부 장미란이 있었지만 그들이 체육계 현안 해결은 고사하고 그 수많았던 체육계 문제를 개선, 개혁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체육계 스스로 대한민국 스포츠의 몰락을 외치지 않는가. 이미 증명된 것이다.
특히 유승민 회장이 염려스럽다. 자신이 모든 체육인을 대표하는 듯한 착각은 거두었으면 한다. 그리고 '열심히 운동만 하면 유승민처럼, 장미란처럼, 진종오처럼 된다'는 환상도 삼갔으면 한다. 그들은 메달을 따지 못해, 또는 부상으로 결국 회한을 남기고 쓸쓸하게 퇴장하는 수많은 아이들, 선수들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이런 선수들은 자신들의 '성공가도'를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이 국회에, 정부에 있는 그 기간에 오히려 대한민국 엘리트 스포츠는 점점 쪼그라들어 붕괴 직전에 몰린 것이다. 당신들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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