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는' 개헌 동시 투표 제안
우원식 국회의장이 "이번 대통령 선거일에 권력구조 개편을 포함한 개헌 국민투표를 대선과 동시에 실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비상계엄 해제와 국회의 탄핵소추 과정에서 빛나는 리더십을 발휘한 우원식의 기습 제안은 한편으로 신선하고 한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느닷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난 4월 4일 오전 11시 22분에 헌재가 만장일치로 윤석열을 파면했습니다. 광장의 환호는 마치 피어나는 봄꽃처럼 밝게 터졌습니다. 122일 만에 일상이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헌재의 판결로 내란은 종식된 걸까요? 저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헌재의 빛나는 결정문은 헌법을 중대하게 위반하고 '대한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윤석열을 파면하고 내란을 완전히 종식함과 동시에 주권자 국민의 뜻을 받드는 정치를 복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헌재 결정문은 끝과 시작의 그 동시성 안에서 더욱 반짝입니다. 위대한 폴란드의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시 <끝과 시작>을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모든 전쟁은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윤석열이 일으킨 내란의 본질은 민주공화국을 부정하고 파시즘 체제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국회와 언론을 완전히 무력화하려고 했습니다. 정치적 반대자들을 '수거'해 구금하려고 했습니다. '처단'이라는 끔찍한 단어도 등장합니다. 모골이 송연한 단어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란이 끝났습니까?
내란 동조 세력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란에 직접 가담했거나 동조하고 극우집회에서 내란을 선동한 국민의힘 의원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제대로 된 반성이나 사죄는 했습니까? 기괴한 산수놀이로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 구속취소 판결을 내린 지귀연 판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수사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즉시 항고를 포기하고 윤석열 석방을 지휘한 심우정 검찰총장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헌재의 거듭된 위헌 판결에도 버티던 한덕수, 최상목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계엄 국무회의에서 무슨 쪽지를 받았다던 그 많은 장관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정진석 비서실장을 비롯한 윤석열 참모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모르는 군검경 내부의 내란 동조자들은 또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윤석열은 파면됐지만 아직 내란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직 반파시즘 전선 위에 서 있습니다. 큰 전투에서 이겼지만, 수많은 작은 전투들이 남아 있습니다. 시민들의 위대한 저항이 없었다면 윤석열 파면도 이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번 헌재 결정문 가운데 가장 빛나는 문장이 있습니다.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수행 때문"이라고 규정한 대목입니다. 비상계엄 해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국회의 탄핵소추도, 헌재의 파면선고도 시민들의 저항이 없었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파시즘은 전선을 선명하게 규정하기 위한 전략적 용어로 국한해 사용합니다. 아직 학문적 용어로 정착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루칸 웨이는 아직 파시즘에 이르지는 않았고, 그 전 단계라 할 수 있는 '경쟁적 권위주의(competitive authoritarianism)' 상태라고 말합니다. 최근 <포린어페어>에 기고한 글에서도 "형식적으로는 선거제도 등이 살아있지만, 실제로는 노골적인 불공정 게임을 벌여 한쪽이 장기집권하면서 반대를 묵살하고 억압적 권력을 행사하는 상태를 경쟁적 권위주의 체제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경쟁적 권위주의 체제와 파시즘의 경계는 아주 얇습니다. 특히 윤석열의 비상계엄은 민주공화정을 완전히 파괴하려는 목적을 갖고 추진되었습니다.
헌법파괴 세력이 새 헌법을 만들면 안돼
시민들은 윤석열 파면을 넘어 사회대개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헌은 그 근본적인 변화의 주요 의제입니다. 제왕적 대통령제로 상징되는 87년 체제를 극복하고 대전환기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개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개헌을 '전가의 보도'처럼 생각하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개헌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특히 개헌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민주당과 이재명을 공격하는 것은 본말 전도입니다. 리베카 솔닛은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은 '관측소'가 되기도 하고 '피난처'가 되기도 하며 '창살 없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우원식의 제안에 민주당은 싸늘하고 국힘은 반색합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내란종식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내놨고, 권영세 비대위원장은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는 개헌안을 마련해 대통령 선거일에 함께 국민투표에 부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했습니다. 윤석열 파면 뒤에도 한남동 관저에 찾아가 내란 우두머리를 알현한 국힘 지도부가 개헌 추진 의사를 밝힌 의도는 명백합니다. '개헌의 집'을 지어 내란세력을 피난시키려는 것입니다.
개헌 논의를 내란세력의 피난처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관측소로 만들기 위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첫째, 윤석열 내란에 대한 완전한 단절과 반성, 사죄가 없는 한 국민의힘이 개헌의 주체가 돼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조기대선 국면에서 권력구조 개혁 논의를 진행한다면, 헌법을 파괴한 세력에게 다음 헌법의 절반을 쓰게 만드는 꼴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세훈, 한동훈 등이 임기단축 개헌을 이야기하고 권영세가 개헌 특위 구성을 말하는 이유는 내란세력 프레임에서 이탈해 민주당과 이재명을 포위 공격하려는 뚜렷한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국힘이 개헌 논의의 자격을 가지려면 철저한 내란 종식에 우선 합의해야 합니다. 나아가 불법 비상계엄을 방지할 원포인트 개헌에 동의해야 합니다.
계엄을 규정한 제77조를 수정해야 합니다. 장석준은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군 동원을 전제로 하는 계엄을 선포할 권한이 존재해야 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계엄'이라는 용어의 변경뿐 아니라 문민통제 원칙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 권한대행과 관련해서는 대통령의 궐위나 유고시에 국무총리, 법률이 정한 국무위원의 순서로 그 권한을 대행케한 제71조도 수정돼야 합니다. 왜 선출직이 아니라 임명직이 권한을 대행합니까? 심지어 국무위원이 그 내란에 동조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통령 권한대행은 최소한 선출직 입법기관의 대표인 국회의장이 맡는 것이 타당합니다. 헌법재판관 임명을 정한 제111조는 국회 선출 몫은 국회가 선출하면 대통령 혹은 권한대행의 임명 절차 없이 임명된 것으로 하는 게 취지에 부합합니다. 장석준에 따르면 독일,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은 국회 선출만으로 임명이 완료되도록 했습니다. 이 밖에도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만드는 내란 관련 조항도 폭넓게 보완해야 할 것입니다.
국민적 공론 모을 '개헌시민회의' 공약해야
둘째, 개헌은 기득권 엘리트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국민적 공론을 모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대선 후보들은 정치공세로 개헌을 이용할 것이 아니라 집권시 개헌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시민회의(시민의회, 시민평의회) 구성을 약속해야 합니다.
그 구성방식은 아일랜드나 아이슬란드, 칠레 등의 사례를 연구하면서 한국에 최적화된 모델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아일랜드의 경우 2012년 '개헌회의'를 총 100인 안팎으로 구성했습니다. 1인은 정부가 지명한 의장, 29인은 의석수 비례 국회의원, 66인은 추첨으로 뽑힌 시민 등으로 채웠습니다. 아일랜드 개헌의회 의제는 대통령 임기 5년으로 단축, 대통령선거를 지방선거, 유럽의회 선거와 동시에 실시, 투표연령을 17세로 하향, 의회 선거제도 개혁, 동성혼 보장, 여성의 공적 활동 참여 강화를 위한 여성관련 조항 개혁, 여성의 정치참여 증진, 신성모독 처벌 조항 삭제 등이었습니다.
장석준에 따르면 아일랜드 정부는 개헌안 전체를 국민투표에 부치지 않고 일단 2015년에 '동성혼 보장'과 '대통령 피선거권 하한선을 35세에서 21세로 하향'하는 조항을 국민투표에 회부했습니다. 투표율은 60.52%였고 '동성혼 보장'은 62.07% 찬성으로 가결, '대통령 피선거권 연령 하향'은 26.94% 찬성으로 부결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개헌 논의는 반파시즘 전선 안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내란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개헌은 소수의 기득권 엘리트가 밀실에서 기득권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국민적 공론화와 숙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개헌은 오직 국민들의 권리 신장과 대전환기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특히 민주공화국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방안과 다원적 가치를 반영한 권리장전이 포함돼야 합니다. 기존 정당들은 선거의 이해관계 때문에 여야 할 것 없이 다원주의 가치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들의 참여가 중요한 것입니다.
개헌은 '전가의 보도'도 '블랙홀'도 아냐
다만, 개헌을 둘러싼 논의는 좀 더 쿨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개헌은 '전가의 보도'도 '블랙홀'도 아닙니다. 영화 <콘클라베>에 "가장 위험한 것은 의심하지 않는 확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상대의 의견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자체를 모욕할 때 개헌 논의는 창살 없는 감옥이 됩니다. 민주당도 개헌 논의 자체를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개헌에 관한 로드맵을 차분히 대통령 후보 공약으로 표현하면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원식 국회의장도 개헌 일정을 기자회견 형식으로 선언한 것은 매우 섣부른 행위입니다. 개헌에 대한 의지가 좀 더 강하다고 하더라도 윤석열 탄핵 과정에서 형성된 국민적 신임을 고려한다면 내란세력 부활에 대한 시민들의 우려를 매우 비중있게 반영해야 합니다. 우리에겐 개헌 논의를 '피난처'나 '감옥'이 아니라 '관측소'로 만들려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마틴 루서 킹의 말처럼 낙관주의와 희망은 다릅니다. 낙관주의가 확률에 관한 것이라면, 희망은 누군가가 그 길을 택할 가능성과 관계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는 것입니다. 정권교체라는 낙관주의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대한민국을 전진시키기 위한 희망을 만들어야 합니다. 현실을 직시하되 꿈꾸기를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개헌 논의는 그런 희망의 합창이어야 할 것입니다.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주체와 방향인 까닭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