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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으로 불타오른다는 것, 무리-풍요-저항-반란으로 넘쳐흐르는 시를 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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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으로 불타오른다는 것, 무리-풍요-저항-반란으로 넘쳐흐르는 시를 쓴다는 것

[프레시안 books] <폭풍 다음에 불 –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

2024년 말, <오징어 게임>이 다시 시작됐다. BBC를 통해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오징어 게임>의 두 번째 시즌이 왜 필요했냐는 질문에 대해 황동혁 감독은 주저함이 없이 '돈'(money)이라고 답했다. 그 또한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였던 셈이다.

'오징어 게임'의 원동력은 상환 불능의 부채로 인한 개인의 절망이다. 오늘날 희망은 돈에 의해 제한된다. 돈은 항상 특정한 행동 방식을 강요한다. 우리가 자급자족하지 않는 한, 먹고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를 조직하는 한 가지 형태로서 돈이라는 거대한 힘에 직면하게 된다. <폭풍 다음에 불 –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존 홀러웨이 지음, 갈무리)의 저자 존 홀러웨이(John Holloway)는 돈이 아닌 다른 힘을 '희망'으로부터 찾고자 이렇게 묻는다. "희망은 돈의 힘을 꺾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홀러웨이는 "희망에 대해 생각하려면, 우리는 위기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하며 '희망의 원리'를 설파한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와 함께 마르크스주의를 불러낸다. 홀러웨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위기의 이론'으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이 우리에게 의존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희생자이고 억압받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본은 우리에게 의존한다. 홀러웨이는 노동가치론이 이야기하는 것이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우리이며, 따라서 자본은 우리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받아들였을 때, 자본주의의 발전을 인간에 대한 의존성을 극복하기 위한 자본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우리는 자본에게 패배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실상 자본이 우리에게 패배하고 있고, 자본의 존재가 점점 더 취약해지고 있기에, 금융 위기, 코로나 위기 등이 표출되는 것이다.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은 바로 여기에 있다. 희망은 자본주의의 도착지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기차가 지나는 길목의 틈새, 즉 '균열'(cracks)로부터 나타나는 셈이다. 홀러웨이는 자본주의의 목적론적 '거대 서사'에 대한 '반문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래서 희망은 우리를 거대 서사의 관념으로 데려간다. 하지만 그것은 블로흐나 역사적 유물론의 거대 서사는 아니다. 그것은 깨져야 할 서사이다. 현재 화폐에 의해 직조되고 있는 사회적 관계는 파멸의 직조이다. 그러나 화폐의 논리에 도전하고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연관을 구축하고 있는 대항-직조들이 있다. 이것들은, 오늘날 지배적인 화폐-자본-죽음(Money-Capital-Death)의 총체화하는 거대 서사를 깨고자 하는 대항-서사들(counter-narratives)이다. 그것들은 수많은 서사의 세계, 많은 세계들의 세계를 창조할 가능성을 여는 대항-서사들이다. 이러한 대항-서사들이 희망의 실체이다.

▲<폭풍 다음에 불 –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존 홀러웨이 지음). ⓒ갈무리

비단 <오징어 게임>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각종 뉴스를 보면 자본주의 사회의 광범위한 비극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끔찍한 세상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키는데, 그 분노에는 이미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의 흔적이 담겨 있다. 홀러웨이를 통해 제안된 이와 같은 문법적 반전은 <자본>에 담긴 마르크스의 분석이 상품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richness)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읽어냄으로써 이루어진다. 부(wealth)는 자본주의적 형태의 풍요이다. 다만, 부는 (풍요 그 자체가 아니라) 제한된 형태의 풍요이며, 인간의 활동을 가치 측면에서 생산적인 노동으로 강제적으로 형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형태에 의한 이러한 제한은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항상 넘쳐흐르면서 피할 수 없는 적대(antagonism)를 초래한다.

희망은 투쟁 속에, 형태가 담을 수 없는 내용 속에,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한 어떤 확실성 없이 존재한다. 희망은, 부의 형태가 아닌, '아직 아님'(not yet)의 형태로 자리하는 풍요를 기반으로 삼는다. 풍요의 잠재력을 갖춘 다중(multitude) 또는 무리(rabble)의 대항-서사를 통해 구축되는 반문법은 희망이 '사회적 관계'라는 것을 말해준다. 바꾸어 말해, 희망은 부의 형태에 대항하는 풍요를 통해, 가치 확장에 대한 욕구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가 아니라, 존엄성의 상호 인정을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적 자기 결정에 기반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를 하나로 묶고 있는 돈의 (단단한) 결속을 푸는 것으로 개념화된 '혁명'을 향한 홀러웨이의 메시지이다. 홀러웨이가 주장하는 혁명은 부의 형태에 가로막힌 풍요의 곳간을 활짝 여는 것이다.

혁명을 향한, 희망에 관한 홀러웨이의 접근 방식은 엄연히 정치적이며, 그 정치는 다분히 정동적이다. 자본주의 사회 체제의 구속적인 형태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무리에 대한 두려움이 자본주의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홀러웨이는 자본주의의 변증법적 운동에서 주체가 파괴해야 할 객체를 자세히 설명한다. 화폐는 자본주의의 사회적 구속력의 '가장 공적인 얼굴'인 사회적 형태, 즉 객체이다. 주체는 '우리'이고, 우리는 창조적 잠재력, 즉 풍요다. 생산되는 가치와 생산될 수 있는 가치, 그리고 그 가치의 실제성과 잠재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나타내는 화폐 사이에는 점점 더 큰 격차가 나타난다. 그 격차 또는 균열 사이에서 억압하는 자의 두려움과 함께 억압받는 자의 희망이 함께 피어오른다.

홀러웨이는 화폐의 약점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자본주의적 형태의 무질서한 군중들에 의해 사회적 결속이 해체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화폐의 약점이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따라서 풍요의 넘쳐흐름이 우리의 희망이라 할 수 있다. 소망적 사고가 아닌 블로흐의 이성적 희망(docta spes)에 관한 홀러웨이의 해석은 그것을 정의 또는 정체성의 경계 안으로 가두어지지 않는 반정체성주의에 위치시킨다. 이로써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정체성 정치가 아닌 사회적 투쟁의 정동 정치로 의미화된다. 사회적 투쟁이란 자본에 대항하는 투쟁의 수단으로서 상이한 사회적 관계를 가진 틈새 공간을 창출하고, 이로부터 넘쳐흐름을 만들어내는 것, 명사 대신 동사에 초점을 맞춘 대안적 (반)문법을 개발함으로써 정체성의 봉쇄에 대항하고 넘어서는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사람들의 활동에 대한 의식적인 조정에 기초한, 그리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활동이 서로 넘쳐흐르는 방식에 대한 인정에 기초한 결속"을 절박하고 시급하게 필요로 한다. 우리 각자의 풍요와 그것이 서로 관계하는 방식을 인정하는 일이 곧 혁명이다. 혁명이란, 풍요에 대한 화폐의 지배, 인간의 잠재력에 이윤이라는 파괴적인 논리를 부과하려는 시도에 대항하는 것이다. 부라는 풍요가 아닌 대항-풍요, 즉 투쟁하는 풍요가 혁명이라면, 그것은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새롭게 만드는 문제다. 홀러웨이는 쿠르드족 운동, 싸빠띠스따 운동, 그리고 자본의 논리에 도전하는 다른 수많은 운동으로부터 난맥의 상황을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해결하는 것, 그러니까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 및 다른 생명체들과 다른 관계를 발전시키는 스스로의 실천과 방식을 개발하는 노하우를 배운다. 홀러웨이는 이와 같은 실천과 방식이 생태 사회주의와 생태 페미니즘의 그것임을 강조하며, 이 기반으로부터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모든 투쟁이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를 경유해 자본주의를 겨냥하는 홀러웨이의 비판적 사유는 단순히 자본 또는 화폐를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삶과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데 닿아 있는 것이다.

홀러웨이가 제안하는 혁명은 지배 체제의 전복 같은 것이 아니라, 지배의 형태가 수반하는 수직적 상상력에 대한 전복이다. 혁명의 원동력인 희망은 자본주의의 균열로부터 흘러넘치는 수평적 상상력이자, 상상력 이상의 정동적 힘이다. 풍요의 곳간인 우리는 자본주의의 균열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위기의 희생자가 아니라 위기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자본주의적 운동 이상의 역사적 운동 속에서 여성, 흑인, 토착민 등에 대해 상환 불능의 채무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채무에 대한 인식이 자본주의적 균열을 사회적 관계로 새롭게 잇는 희망을 가능케 한다. '우리'의 존재가 타자의 존재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젠더화 또는 인종화에 도전하는 것이 곧 혁명이다. '거대 서사'로 인해 지워진 대항 서사들 속에서, 정체성으로 동일화되지 않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조건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희망 없는 시대에 비로소 희망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혁명에 관한 홀러웨이의 제안은 과거에 대한 채무가 미래에 대한 책임으로 전이되어야 함을 요청하는 것으로 읽어내야 마땅할 것이다. 그 전이의 매개체가 바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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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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