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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패망을 직감한 사범학교 10대 학생들 무장 투쟁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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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패망을 직감한 사범학교 10대 학생들 무장 투쟁에 나서다

['백의민족해방단' 김철현의 숨긴 이야기] ②1945년 3월 무슨 일이

김철현 선생의 유품 속 4건의 원고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강원도 춘천의 춘천사범학교에서 일제 강점기 말기에 발생했던 ‘백의민족해방단’ 사건이다.

백의민족해방단 사건은 강원지역에서는 비교적 알려진 독립운동 이야기지만 전북지역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김철현 선생이 남긴 원고를 통해 79년전으로 돌아가 본다.

김철현 선생은 수신인이 분명하지 않은 한 통의 장문의 편지를 남겼다. ‘형(兄)’에게 보내는 것으로 보아 그와 같은 1941년 춘천사범학교에 입학했던 동기생 가운데 한 사람을 지칭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수신인이 분명하지 않은 편지의 시작부분. 김철현 선생이 춘천사범학교시절 동기인 아무개에게 보내는 형식의 글이다. 전체 31쪽 문서다. ⓒ유족 제공

제행무상(諸行無常)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습니다. 이순을 넘기고 보니 내 인생에도 회한과 같은 것이 밀려오는구려.

인생유전이라 할까, 그 암담했던 1940년대의 암울 속에서 내 딴에는 청운의 꿈을 안고 찾은 곳이 내 고향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준험(峻險)한 고원(高原)이요, 소양이 굽이쳐 더욱 고고(孤高)한 이역 춘천이었습니다. -내 고향은 금만평야에서 밀려난 변산반도 자락에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에 내 의식에서 조차 지워버렸던 일(백의민족해방단)을 동창회가 새삼 들고 나와 무언가 써달라는 부탁, 이게 또한 모교가 그 개교 반백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라 하기에 그 일에 몸담아 애 쓰시는 형들에 대한 옛 우정의 한 자락이겠거니 생각하고 ‘정말 고맙게 그 뜻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형!

이제는 그 옛날이라 할 만큼 많은 세월이 흘렀군요. 1941년 전국 각처에서(만주에서까지도) 춘천사범(제3회)에 모여든 우리는 꿈 많은 젊음과 우정을 그곳에 묻어왔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이름조차 아스라한 –우리는 그 혹독한 일제에 밀려 진짜 이름조차 버린 채 창씨개명이란 환부(換父)하고 역조(易祖)하는 남의 나라 이름으로 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옛 학우들의 얼굴이 이따금 떠오를 때면, 그렇게도 고집스럽던 내 오기가 어쩐지 치기(稚氣)스러워집니다. 너무 오랜 오득(悟得)이라 해 둡시다.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의 김철현 선생. 앞줄 왼쪽이 김철현 선생이다. ⓒ유족 제공

(중략)전일에 독립기념관엘 가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웅장함이며 광대함을 대하매 자주민으로서 가슴 뿌듯했습니다. (중략) 헌데, 그곳에 게시된 반일투쟁사에서 '1945년 춘천에서 백의동맹'이라 표시된 사실을 보고 한편 반갑고, 한편 놀라웠습니다.

형! 형도 아시다시피 그 사건은 1944~1945년 춘천사범학교의 학우들이 연루된 항일 민족항쟁이 아니겠습니까? 독립기념관에는 '백의동맹'이라 되어 있으나 실은 '백의민족해방단'이라는 명칭이 바른 것임을 이 자리를 빌려 밝힙니다. (중략)

당시 그 사건에 간여한 한 사람으로서 무슨 큰일이나 한 것처럼 내세울 수도 없어 마음속 깊이 묻어 둔 일이었습니다만 그룻 표시된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것이 이제는 생사조차 알길 없는 옛 동지들에 대한 도리일듯 싶어 정말로 외람스러이 작죄(作罪)하는 심정으로 그 때 그 일을 간략히 밝히고자 합니다.

이렇게 이어진 편지는 ‘백의민족해방단’의 태동 배경과 일제에 의해 일망타진된 이야기, 감옥에서의 고문을 받았던 끔찍한 이야기 등으로 이어진다. 다음은 기고문의 일부를 발췌한 내용이다.

때는 1945년 3월20일. 이제 막 심상과 2회 선배님들의 졸업식에 참여했다가 귀가하려고 지금의 (춘천교육대)백양로로 왁자지껄 걸어 나오고 있었다.

도리우찌 모자에 당꼬바지 차림의 낯선 녀석 세 놈이 빠른 걸음으로 교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중략) 놈들은 강원도 경찰국 고등과 형사대였다.

(…)아지트로 피해있던 우리에게 밤이 이슥할 즈음 모처로부터 절망적인 정보가 입수되었다. 우리의 조직이 상부로부터 무너져버려 아주 절망적이라는 것이다. 그날 밤 우리는 아지트에 들이닥친 형사대에 의해 고스란히 쇠고랑을 찰 수밖에 없었다. 내 나이 열여덟이었다.

(중략) 백의민족해방단의 전반적인 윤곽은 우리도 알 수 없었고 다만 우리 춘천사범학교에 관계된 조직이 두 갈래였던 것은 나중에 형사들에 의해 알게 됐다. 그 한 갈래가 필자를 포함한 문산달웅, 염희태, 김영진 그룹이었고 1년 선배인 2회 졸업생 라대식씨와 박성준이 관여했던 또 다른 선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옛 철원경찰서 건물 모습. 왼쪽은 철원의 유명한 노동당청사 모습이고 오른쪽이 김철현 선생이 갇혀 있었던 옛 철원경찰서의 모습이다. ⓒ철원군청

(붙잡혀간)당시 철원경찰서 유치장은 흡사 지하실 같아서 음침함 속에 흡음시설이 안 된 시멘트 건물인 탓에 자그마한 소리도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더욱 나의 어린 가슴을 죄어오는 것은 밤마다 들려오는 피의자들의 신음소리와 취조실에서 견디기 어려운 고문에 시달리고 반죽음이 되어 다시 유치장에 내던져진 이들의 고통에 못이긴 신음소리는 긴 복도와 천정에 메아리쳐 24시간 검은 자루를 뒤집어 쓴 채 고문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는 피가 마르고 목숨을 깎는 저승의 소리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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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홍

전북취재본부 김대홍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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