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역사문화공원은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역사적 인물과 서민이 공존하는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다. 우리는 그들의 비명(碑銘)을 통해 격동적인 한국 근현대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이 공원은 행정구역 상 경기 구리시와 서울 중랑구의 경계에 걸쳐 있으며 80여 명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잠들어 있다. 이를 연구하고 세상에 알리고자 설립된 망우리연구소가 ‘망우인문학총서’의 첫 번째 책으로 <독립운동의 주춧돌-남파 박찬익>을 출간했다.
박찬익은 백범 김구의 오른팔로 불리며, 특히 뛰어난 외교술로 독립자금을 조달하며 독립운동의 주춧돌을 놓은 독립운동가이다. 1949년 남파가 서거하자 망우리에 무덤을 썼으며, 이후 1993년 남파를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해 망우리 현장에는 허묘(虛墓)와 2기의 묘비만 남았다. 묘비명은 시인 조지훈의 글을 서예가 최중길이 새겼다. 이 묘비는 남파의 아들 박영준이 1964년 세웠다.
이 책은 원래 동화작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박영만이 1963년 발간한 <박찬익 전기 소설-주춧돌>을 망우리공원 연구가인 김영식 작가가 현대판으로 옮겼다.
이 책은 알려지지 않았던 박찬익에 관한 연구에 가장 충실한 자료이자,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유·이민사와 독립운동사의 소중한 자료이다.
남파(南坡) 박찬익(朴贊翊.1884~1949년)은 경기도 파주 출신으로 우의정을 지낸 창암(蒼巖) 박종악(朴宗岳·1735~1795년)의 후손이다. 실학파의 거두 박지원과는 일가이기도 하다. 남파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틀을 깨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상공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 선생과 불화 끝에 퇴학당한다.
이후 을사늑약(1905년)이 체결되고 5년 후 조선을 강제로 병합(1910년)하자 남파는 국권회복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만주로 망명(1911년)한다. 반년 후 남파와 뜻을 같이한 가족들 역시 전 재산을 처분하고 용정으로 이주한다.
이후 서일과 함께 대종교 독립운동단체 중광단을 조직해 활동했으며 1919년에는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서일, 김좌진, 나중소 등 민족 대표 39인과 함께 서명한다. 이 선언문은 일본 동경 유학생의 독립선언 발표와 3‧1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또한 동북의 군벌 장작림 동생 장작상을 만나 “한국의 독립 없이는 만주의 독립은 없다”라고 설득해 보병총 300자루 등 군수품을 조달해 지원했으며, 신민부 요원으로 중국과의 외교 전임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원, 법무부장, 외사국장 등도 역임한다.
남파는 1933년 백범 김구와 장개석을 만나게 함으로써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 이후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와 독립군 재건의 기틀을 마련, 우리 독립운동사상 중요한 비약과 발전을 가져오는 일대 전환기를 마련했고, 광복군 창설이나 좌우합작을 비롯해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의 거주 및 생계 문제, 중국국민당 정부의 정책과 자금 지원을 얻는 일에 특유의 외교적 수완과 기치를 발휘한 외교의 달인이었다.
<독립운동의 주춧돌-남파 박찬익>은 이러한 남파의 일생을 담고 있다.
김영식 작가는 “이 책은 망우리공원 첫 인문학 총서이다. 이 책을 계기로 독립운동가와 예술가는 물론 근현대 선각자들의 삶의 궤적과 철학을 담은 인문학서를 계속 출간할 예정이다. 망우리연구소와 병설 망우리인문학회에 많은 관심을 부탁한다”라고 말했다.
망우리연구소의 망우리인문학회는 이 책의 번역자인 김영식 작가가 이끌고 망우리인문학 총서 발간에는 김일수, 조운찬, 한철수 등이 기획위원으로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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