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의 계절이 되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 석·박사과정을 다 마쳤어도 논문을 쓰지 않으면 졸업을 할 수 없다. 물론 요즘은 석사학위를 학점으로 취득하는 제도도 생겼지만 박사학위는 아직 논문을 써야 한다. 한 학기에 한 명하기도 힘든 것이 논문지도인데, 갑자기 필자가 은퇴한다는 소문을 듣고 너도나도 논문을 쓰겠다고 덤벼들었다. 준비가 안 된 녀석(?)들을 뒤로 하고 몇 명 어렵게 지도를 하고 있다. 논문은 건조체로 쓰기 때문에 한국인도 지적당하는 것이 많은데, 외국인이 한국어로 논문을 쓴다는 것과 그를 지도하는 것은 전쟁을 치르는 것 같다. 우선 문장부터 다듬어야 하고, 논지 전개하는 것과 자신의 주장을 바르게 전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논문 형식에 맞게 편집해야 한다. 외국인 논문 지도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남들은 퇴직 전에는 논문 지도는 안 한다고 하던데, 필자는 무슨 팔자로 이렇게 많은 외국인 제자들이 달려왔을까 하고 즐거운 비명(?) 후에 닥친 진짜 비명을 지르고 있다.
논문 지도로 한 달 내내 늦은 시간까지 연구하고 토론하다 보니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모른다. 어려운 용어에 익숙해졌고, 귀납법적 논지 전개가 일상이 되어 버렸다. 논문 지도하다 저녁 먹으러 주변 상가에 가면 젊은이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대학생들의 언어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은어들이 많은데, 중·고생들의 말은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다.
오늘은 ‘꼽주다’라는 말을 들었다. 한국어학과 교수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였다. 대화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담임 교사에 관한 내용이었는, 수업 시간에 자기를 ‘꼽주었다’고 표현하였다.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질문한 내용을 잘 모르고 버벅거렸는데, 그때의 상황을 “담탱이가 꼽주었다.”고 표현하였다.
오호 통재라!
아마도 담임 교사가 자기반 수업하면서 친한 척(?)하고 그 아이에게 어려운 질문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녀석이 알 수 없는 질문이었던 관계로 대답을 하지 못해서 아이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용어였다. 종합해 보면 ‘꼽주다’라는 말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하게 하다” 혹은 “부끄럽게 만들다”라는 의미로 분석할 수 있다. 결국 “다른(상대방) 사람을 은근히 무시하고 눈치 주는 행위”를 이르는 말이라고 본다. 아이들의 표현으로 한다면 “은근히 돌려서 치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꼽주다’의 상대어로는 ‘꼽먹다’임을 알 수 있었다. 즉 “무시 당하거나 면박을 당했을 때” 아이들은 ‘꼽먹었다’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이런 말들의 어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필자는 늘 학생들에게 어원과 함께 가르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터라, 밥을 먹으면서도 생각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이리저리 유추해도 그 어원은 알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그냥 편하게 하다 보니 유행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예전에 ‘꼰대’나, ‘날나리’, ‘깝치다’ 등의 말들은 흔히 들어 봤지만 ‘꼽주다’는 처음 들었다. 예전에 아이들을 키울 때 자식들이 비속어를 쓰면 늘 나무라기만 했지, 애들과 함께 그 의미를 분석하지 못한 것이 유죄로다. 아이들은 어디까지가 표준어이고, 어디까지 비속어인지 모르고 사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틀림없이 이들이 하는 말들은 거의 대부분이 비속어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 아이들의 말도 안 되는 어휘가 하나 있다.
어쩔 티비?
어쩔 냉장고?
라고 시도 때도 없이 떠들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냥 주변에서 누군가 말을 할 때 듣기 싫으면 욕 대신 하는 말 같았다. 한국어과 교수의 직감으로 볼 때 “어쩌라고? 넌 가서 TV나 봐.”라고 하는 것을 줄여서 하는 말이 아닌가 한다. 상대방의 말이 듣기 싫으면 하는 말이고, 이를 받아칠 때는 “저쩔 TV.”라고 하는 것으로 유추해 보았다.
비속어는 학교 다닐 때 한때의 유행어일 뿐이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욕 대신 하는 말로는 조금 부드럽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가능하면 대화로 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오해 애재라! 이젠 어쩔 수 없이 ‘꼰대’ 소리를 들어야 하는 세대가 된 것 같다. 투덜투덜…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