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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대원마저 해부한 광기의 731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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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일본대원마저 해부한 광기의 731부대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54] 생체 실험과 세균전쟁 ③

[다무라(증언자)는 해부칼을 호소야에게 넘겨주었고, 호소야는 해부칼을 들고 스도우 옆으로 다가가 (다른 대원인) 우노에게 넘겨주었다. 우노는 해부칼을 받은 뒤 (곧바로 찌르진 못하고) 스도우의 뱃가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때 스즈키 소좌는 큰 소리로 '빨리 시작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우노는 해부칼을 스도우의 배에 찔러넣고 아래로 그어 내려갔다. 스도우는 마지막에 '짐승 같은 놈들!'이라고 소리 지르고 숨을 거두었다](한샤요·신페이린, <일본군 731부대의 죄악사>, 헤이룽강인민출판사, 1991, 118-119쪽. 진청민, <일본군 세균전> 청문각, 2010, 189-190쪽에서 재인용).

위에 옮긴 글은 일본 731부대원들이 누군가를 생체 실험하는 모습을 담았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희생자를 수술대 위에 묶어놓고 해부칼로 배를 갈랐다. 독자 분들은 '스도우'란 이름을 지닌 저 불쌍한 희생자는 중국인이거나 다른 외국인 포로라고 짐작할 것이다. 놀랍게도 '스도우'는 일본인이었다. 희생자의 이름은 스도우 요시오(須藤良雄). 어제까지만 해도 731부대에서 함께 일하던 요원이었다.

일본인 대원조차 생체실험의 제물

731부대가 얼마만큼 세균전을 위한 생체실험에 미쳐 있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위의 스도우 요시오 해부 건이다. 스도우는 731부대 제4부(세균제조부)에 배치된, 계급은 그리 높지 않은 대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페스트균 생산과정에서 페스트에 감염되자, 비밀리에 해부실로 옮겨와 생체실험의 도구로 썼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 놀라운 사실은 같은 731부대에서 방역진료 조수로 일했던 다무라 요시오(田村良雄) 병장이 훗날 양심선언으로 털어놓아 세상에 알려졌다. 다무라는 일본의 전쟁포로들 가운데 전쟁범죄자들을 가둔 중국 푸순(撫順) 감옥에서 그 자신이 731부대에서 저질렀던 전쟁범죄를 뇌우치고 세균전 비밀을 폭로하는 공술서를 남겼다. 그가 공술서를 쓴 시점은 1954년 9월8일~10월10일 사이였다(한민족문화교류협의회, <일본관동군 731부대 생체실험증거자료집>, 2009, 211-218쪽 참조).

731부대 안에서 일본인이 생체 해부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됐을까. 이 범죄행위의 주역은 다무라의 상관인 스즈키 히로히사 소좌였다. 그는 한 중국인을 생체 해부하고 난 뒤에 부하인 호소야(증언자인 다무라의 조교)에게 스도우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페스트균에 감염돼 심하게 앓고 있던 그를 해부해 연구 자료로 쓰기 위해서였다.

스즈키 소좌는 "이는 모두 천황 폐하에게 충성을 하기 위해서이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른바 '대일본제국의 승리'을 위해 죽는 것은 영광이란 말인가. 개죽음이 아니고? 페스트 탓에 어차피 죽을 운명임을 스도우가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한 몸을 세균 연구에 바치는 것을 '히로히토에 대한 충성'이라 여겼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냉혹한 칼잡이'였던 스즈키 소좌의 지시에 따라 끌려온 스도우는 옷을 모두 벗고 알몸이 된 상태에서 수술대 위에 눕혀졌다. 페스트균에 감염되기 전까지만 해도 매우 건강했고, 여자 얘기만 나오면 흥분하기 일쑤였던 스도우였다. 하지만 며칠 사이에 그의 온몸은 자색 반점 투성이가 됐고, 가슴 부위는 긁어서 생긴 상처가 곪아서 피가 흘러 내렸다.

수술대 위에 묶였기에 몸을 움직일 때마다 감긴 끈이 스도우의 목을 조였다. 그저 가쁘게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마취도 없이 칼을 들이대자, 그는 '짐승 같은 놈들!'이라고 욕설을 퍼붓곤 얼마 뒤 숨졌다. 어제까지의 동료를 죽일 정도로 생체실험에 미쳐있던 731부대원들을 뭐라 불러야 할까. 수술대 위에 묶여 산 채로 마취도 없이 칼질을 겪은 스도우가 내뱉은 마지막 욕설처럼 그냥 '짐승'이라 불러야 할까.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들조차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제식구를 잡아먹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짐승보다 못한...'이란 말이 생겼을까 싶다.

▲ 하늘에서 내려다 본 731부대 전경. 사진 오른쪽 ㅁ자 형 건물이 생체실험용에 쓰일 수감자(마루타)들을 가두는 특수감옥이다. ⓒ위키미디어

페스트 감염돼도 기밀 지키려 병원에 못 가

731부대가 '마루타'(丸太, 통나무)로 일컬어지던 실험 대상자들을 구하긴 어렵지 않았다. 따라서 아무리 세균연구에 빠져 있었다고 해도 같은 일본인, 그것도 어제까지의 동료 대원을 굳이 생체실험으로 죽여야 했을까는 강한 의문으로 남는다. 위의 스즈키 소좌는 '천황폐하에 대한 충성'이라 했지만, 아마도 몇 가지 요인이 겹쳤을 것으로 보인다.

731부대에서의 페스트 균 생산은 극비사항이었기에, 균을 만지던 대원이 감염됐다 해도 육군병원에 보내질 않았다. 스도우는 치료가 어려울 정도의 중증으로 곧 죽어갈 몸이었다. 뭔가 731부대에 해를 끼치는 언동으로 미운 털이 박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여러 요인들이 겹쳐 스도우가 생체실험의 도구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를 수술대 위에 올려놓기까지는 스즈키 소좌 한 사람의 결정으로 이뤄졌다고 보긴 어렵다. 윗선의 은밀한 재가가 있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731부대의 연구원들이 세균연구에 미쳐 있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731부대에서 일본인 대원 스도우를 생체 해부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는 일본 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森村誠一)가 쓴 <悪魔の飽食>(角川文庫, 1983)에도 실려 있다. 한국에는 <악마의 731부대와 마루타>(고려문학사, 1989)란 제목으로 번역본이 나왔으나, 현재는 절판 상태다(스도우 생체해부 관련 부분은 28-31쪽 참조).

1945년 패전 뒤 40년 가까이 지나도록 731부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본인들에게 <悪魔の飽食>은 처음으로 그 비밀스런 실체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처음엔 일본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赤旗)>에 연재했고, 그 글들을 책으로 묶어냈다. 그 책이 일본은 물론 한국과 중국 등 해외에서도 큰 화제를 모으자, 일본 극우들은 모리무라를 죽이겠다고 잇달아 협박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들은 731부대가 '단순히 방역급수(防疫給水)를 하던 위생부대였다'고 우긴다.

일본이 731부대를 만든 까닭

제1차 세계대전은 항공기 폭격과 탱크(전차)라는 괴물이 처음 선보였던 전쟁이라는 기록과 더불어 독가스가 전선에서 마구 뿌려져 커다란 논란을 불렀다. 1915년 4월 오후 5시 독일군은 짧지만 격렬한 포격을 가한 뒤 독가스를 영불 연합군 쪽으로 흘려보냈다. 1차대전의 격전 가운데 하나였던 이프르 전투에서였다. 독일군이 썼던 독가스는 염소가스로, 가스통 분량은 5730개였다. 연합군도 같은 해 9월의 루스 전투에서 5000통의 염소가스로 반격에 나섰다. 그러면서 또 많은 희생자를 냈다. (피터 심킨스 외, <제1차 세계대전: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플래닛미디어, 2008, 97쪽과 110쪽 참조).

그때의 상황을 담은 다큐 필름들을 보면, 독가스에 노출된 연합군 병사들이 시력을 잃고 양손을 앞사람의 어깨에 얹은 채 일렬로 걸어간다. 독가스를 피하느라 참호 속에서 방독면을 쓰고 트럼프를 하는 병사들도 보인다. 결코 한가롭지 않은 모습이다. 군용 짐수레를 끄는 마차의 말에도 방독면이 씌어졌다. 이렇듯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대규모 화학전(독가스)으로 말미암아 7만3000명이 죽고 100만 명이 시력을 잃는 등 몸을 다쳤다.

유럽 전선에서 독가스가 지닌 살상력을 똑똑히 보면서 일본도 큰 관심을 갖게 됐다. '하세베'란 이름의 장교를 유럽으로 보내 실태를 조사한 다음, 일본군 참모본부에 보고하도록 했다. 육군 의무부에서 그 보고서를 건네받아 검토한 끝에 1918년 11월 도쿄 과학연구소장 이토에게 독가스(화학무기)에 세균(생물무기)을 덧붙여 연구 개발 임무가 주어졌다. 공학박사인 이토 소장은 그러나 참모본부가 만족할만한 성과물을 내지 못했다. 끝내는 '직무 유기' 혐의를 쓰고 감옥에 갇혔다(파면된 이토 대신에 훗날 관동군 생화학전의 기수로 떠오른 자가 문제의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였다).

▲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1941년 3월 소장으로 승진하기 전엔 세균연구에 미쳐 며칠씩 밤샘 작업을 하느라 면도나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았다고 알려진다. ⓒ위키미디어

이시이, "미래의 전쟁에서 세균무기 중요"

국토와 자원이 제한된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려면 부족한 것이 한둘 아니다. 군 병력도 상대적으로 적고, 무기를 만들 광석자원이나 군대와 함포를 움직일 석유자원도 부족하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침략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올 묘책의 하나로 생화학전, 특히 세균전에 눈을 돌렸다고 보면 틀림없다. 핵무기가 없던 시절에 전선이나 도시의 인구과밀 지역을 겨냥한 731부대 세균 폭탄은 독가스와 더불어 유용한(?) 무기로 여겼을 것이다.

세균무기 개발과 관련, 중국 조선족 출신으로 하얼빈시 사회과학원 731연구소장으로 <일본군 세균전>이란 두꺼운 책(흑룡강 인민출판사, 2008. 한국어 번역본으로 973쪽 분량)을 쓴 진청민(金成民)은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가 대원들에게 했던 말을 이렇게 전한다.

"군사의학은 치료와 예방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군사의학은 공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미래의 전쟁은 필연적으로 과학전쟁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 가운데 세균전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기 때문에 반드시 세균무기 연구에 정력을 쏟아야 한다.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는 국경이 없다. 하지만 연구자는 반드시 조국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연구해야 한다"(진청민, <일본군 세균전> 청문각, 2010, 105쪽).

여기서 이시이가 말하는 '조국'이란 한반도로, 만주로, 중국 본토를 '야마토 민족'(大和族, 일본민족)이 지배하는 '대일본제국'임은 말할 나위 없다. 나치 독일의 절대 권력자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의 '생활권'(Lebensraum)을 폴란드와 러시아 평원으로 넓히는 '제3제국'을 꿈꾸었듯이 말이다.

'공포와 죽음의 악마 의사' 이시이 시로

'공포의 의사' 또는 '죽음의 의사'로 3000~5000명의 생목숨을 생체실험으로 희생시켰던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1892-1959)는 어떤 내력을 지녔을까. 이시이는 일본 도쿄의 국제관문인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가까운 치바현 시비아먀 지역의 카모(加茂) 마을 출신이다. 그곳 대지주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시이의 맏형은 노일전쟁이 격전장이었던 뤼순(旅順) 전투에서 러시아 요새를 공격하다가 죽었다.

어릴 적 이시이는 교본을 하룻밤에 다 외울 정도로 수재 소릴 들었지만, 당시에도 의과대학을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3년 동안 재수한 끝에 1915년 23살 나이에 교토 제국대학 의학부에 들어갔다. 1921년 의학부 과정을 마친 이시이는 육군군의학교를 거쳐 도쿄 제1위생병원에서 군의관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군의 허락을 받아 1924년 교토 제국대학 의학부 대학원으로 들어갔다.

그해 여름, 일본 전역에서 원인을 알기 어려운 수면병(기면성 뇌염)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자, 이시이는 교수들을 설득해 내과-병리-세균학 연구원들과 함께 연구팀을 꾸렸다. 동물실험을 거듭한 끝에 그 병이 유행성 뇌염이고 원인은 바이러스라는 것을 알아냈다. 1927년 이시이가 써낸 의학박사 논문도 이와 관련한 것이었다(논문 제목은 '그람 양성 쌍구균 연구').

이시이가 동물실험을 거듭하며 세균전에 꽂힌 것은 그 무렵부터로 알려진다. 출발은 인간의 생명을 구한다는 데 있었지만, 그 뒤 그가 보인 행태는 살아있는 사람을 실험대상으로, 그것도 침략전쟁의 승리를 위한 연구였다는 것이 심각한 윤리적 일탈로 비난을 받는 대목이다. 세균전을 준비하려면 먼저 페스트나 탄저균 등 세균을 길러내야 한다. 문제는 동물이 아니라 산 사람을 세균으로 오염시키는 끔찍한 생체실험 과정을 거듭 밟았다는 점이다.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방독면을 쓴 병사와 말. 독가스로 말미암아 7만 3000명이 죽고 100만 명이 다쳤다. 이시이 시로는 유럽에서의 화학전을 조사하면서 독가스는 물론 세균무기 개발을 목표로 삼았다. ⓒ위키미디어

2년 동안 유럽 머물며 세균전 연구

글 위에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가스로 7만3000명이 죽었다고 했다. 이시이가 박사학위를 받기 2년 전인 1925년 국제사회는 스위스 제네바에 모여, 화학무기(독가스 등)는 물론 생물무기(세균무기 등)도 전쟁에서 함부로 쓰지 말자고 뜻을 모았다. '제네바 의정서'(Geneva Protocol, 정식 명칭은 '질식, 독성 또는 기타 가스 및 생물무기의 전쟁 사용 금지에 대한 의정서')에 따르면, 각국은 전시에 화학무기와 생물무기를 생산, 보유, 이동할 수 없다.

참고로, 오늘날 화학무기금지조약(CWC)이나 생물무기금지조약(BWC)은 '제네바 의정서'(1925)보다 더 엄격하다. 전시든 평시를 가리지 않고, 무기의 개발, 생산, 비축을 금지한다. 기왕에 생화학무기를 갖고 있다면 파기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제는 여러 나라들이 (특히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이 규정을 따르지 않기에, 사실상 문서로만 남은 실정이다.

독가스나 세균무기를 금지하자는 1925년 제네바 회의엔 모두 35개국이 참가했다. 일본 대표도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일본 미국은 '제네바 의정서'에 서명만 했을 뿐 비준을 하진 않았다. 이시이가 교활하다는 것은 '제네바 의정서'를 거꾸로 읽었다는 점이다.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오히려 그런 금지된 무기를 열심히 개발해야 한다고 여겼다. 일본인 작가 아오키 토미키코(靑木富貴子)는 이시이의 고향마을 카모(加茂)부터 중국 하얼빈의 731부대 흔적까지 발로 뛰며 이시이를 추적했다.

[(누군가가) '제네바 의정서'에 대해 묻자, 이시이는 '국제조약으로 금지할 만큼 세균무기가 위협적이고 (인명 살상에) 효과가 있다면, 이를 개발하지 않고 그냥 놔둘 수가 없다고 여겼다'고 말했다](靑木富貴子, <731 石井四郞と細菌戰部隊の闇を暴く>, 新潮社, 2008, 64쪽).

박사학위를 딴 뒤인 1928년 이시이는 육군의 특별 승인을 받아 혼자 유럽으로 떠났다. 2년 동안 유럽을 돌아다니며, 지난 1차 세계대전 때 벌어졌던 독가스전에 관련된 자료를 모았다. 아울러 1348년 유럽을 휩쓸며 무려 2500만 명을 희생시켰던 페스트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유럽에서의 경비는 처음엔 이시이 개인 돈으로 마련했고, 후반부엔 일본 육군이 댔다. 그가 낸 유럽 독가스전 실태 보고서에 일본 육군 지도부는 대만족을 표시했다고 알려진다.

유럽을 다녀온 뒤인 1930년 그는 육군군의학교 교관(계급은 소좌)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세균학을 강의하면서 본격적으로 세균 연구에 들어갔다. 군의학교 방역부 지하실에 틀어박혀 밤샘 연구를 거듭했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세균부대 창설에 꽂혀 있었다.

'미친 군의관' 소리 들은 마조-사디스트

관동군의 만주 침략(1931)은 야심가 이시이에게 기회로 다가왔다. 육군 참모부를 설득해 일본이 조직적으로 세균전을 준비하는 길에 그 자신이 앞장섰다. 육군 군의학교에 '방역연구실'이란 부서를 만들고, 군의학교 가까운 곳에다 방역연구실 건물을 세웠다.

그 무렵 이시이의 행적을 보여주는 사례. 그는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고급 장교들 앞에서 오줌으로 소금을 만들었다며 그 소금을 핥아 먹었다. 자신이 개발한 정수기(이른바 '이시이식 정수기')가 '오수(汚水)를 식수로 쓸 수 있다'며 자신의 오줌을 필터로 걸러내 사람들 앞에서 마셨다. 히로히토 국왕 앞에서도 시연을 해 명성을 얻었다.

[국왕이 육군부대들을 순방하는 과정에서 한 부대를 방문했을 때 이시이가 만든, 간단하면서도 순식간에 수질을 정화시킬 수 있는 기계를 국왕에게 직접 선보인 적이 있다. 이시이가 국왕 앞에서 이 기계를 통해 오줌을 순식간에 식수로 바꾸어 버리자, 황궁 관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국왕은 이 식수를 시음해볼 것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다. 그러자 이시이가 직접 한 컵을 꿀꺽꿀꺽 마셨다] (에드워드 베르,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2002, 241-232쪽).

히로히토 앞에서의 정수기 시연을 계기로 이시이 시로는 일본 군부가 눈여겨보는 인물이 됐다. 그는 '미친 군의관' 소릴 들었다. 여기서 '미쳤다'는 것은 부정적 평가가 아니다. 세균부대 창설을 부르짖는 이시이의 열정(?)을 높이 사서 하는 말이었다. 일본 작가 아오키 토미키코의 글을 보자.

[1945년 종전 직후 소련군에 붙잡혀 1년4개월 동안 갇혀 있다 풀려난 전 관동군 참모부 장 마쓰무라 토모카츠는 그가 남긴 책에서 이시이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일찍이 일본 육군에는 이시이라는 미치광이 군의관이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 정도로 이시이는 (세균 전문부대를 만들기 위한) 선전에 능숙하고 실행력이 있는 군의(軍醫)였다'](靑木富貴子, 47쪽).

마쓰무라 참모부장은 이시이를 가리켜 '선전에 능하고 실행력이 있다'고 후한 점수를 매겼다. 하지만 이시이는 냉혹하고 사악한 품성을 지닌 '죽음의 의사'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미국의 법의학자 조슈아 페퍼와 스티븐 시나는 이시이를 혹평했다. '그는 총명하다는 명성을 얻기는 했으나, 동료에게 오만하고 무례하게 굴고 상관에게는 아첨을 일삼았다'(조슈아 페퍼·스티븐 시나, <닥터 프랑켄슈타인>, 텍스트, 2013, 146쪽).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마조-사디스트'는 윗사람에게 아첨하고 아랫사람에겐 가혹한 복합적인 인간 유형이다. 위의 두 미국인 법의학자들이 이시이를 가리켜 '마조-사디스트'라 부르진 않았다. 하지만 '동료에게 오만하고 상관에겐 아첨했다'는 그들의 말 속엔 이미 그런 부정적 평가가 담겼다.

▲ '죽음의 부대'인 731부대 기지를 세울 때 많은 중국 노동자들이 강제 동원됐다. 사진은 건축 자재를 보관했던 곳이다. ⓒ위키미디어

1933년 방역급수부, 731부대의 출발점

위의 지적대로 이시이의 선전과 아첨이 통했을까,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고급 장교들이 이시이의 세균부대 제안에 귀를 기울이면서 마침내 그의 꿈이 이뤄졌다. 1933년 이시이는 관동군의 후원 아래 '방역 특무기관'을 만들려고 만주에 발을 내디뎠다.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우창에 가까운 중국인 마을 베이인허(北運河, 하얼빈에서 남동쪽 70km 지점)에 관동군 방역급수부 기지를 세웠다.

'방역 급수'(防疫給水)란 이름 그대로 전염병을 예방하고 병사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름과는 달리, 본격적으로 생체실험과 세균 연구를 위한 죽음의 조직이자, 세균병기 개발을 위한 악마의 소굴이었다. 방역급수부는 일본인들 사이에 '도고(東鄕) 부대'로 일컬어졌다. '도고'는 기밀유지를 위한 일종의 위장 명칭으로, 이 부대에 소속된 의사들은 필요에 따라 가명을 쓰곤 했다.

생체실험에는 주로 중국인들이 희생됐다. 도고부대는 731부대의 출발점인 셈이다. 1934년 9월에 일이 터졌다. 생체실험을 위해 가둬놓았던 수용자 16명이 탈출해버린 사건이다. 이로 말미암아 도고부대의 비밀이 새나갈 것이 걱정되자, 이시이는 부대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1935년 하얼빈 동남쪽 15km 떨어진 핑팡(平房) 지역에 새로운 기지를 세웠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731부대라 하는 곳이다.

731부대 기지를 세우느라 핑팡 주변의 중국인 마을 4개를 강제로 철거하고 그곳 주민들을 모두 쫓아냈다. 그 총면적은 80㎢에 이르렀다. 하루아침에 퇴거라는 날벼락을 맞게 된 중국인 마을 사람들이 흘린 눈물은 강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런 폭력적 강제 철거 뒤 731부대 기지와 비행장, 초등학교, 우체국, 가족들을 위한 숙소 등이 들어섰다. 작은 규모의 뉴타운이 세워진 셈이었다(이시이는 자신의 고향인 카모 마을의 가난한 소작인들을 불러다 기지 건설 일을 시켰다.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게 된 노무자들과 고향마을 사람들은 이시이를 주군처럼 받들었다).

특히 731부대 본부 건물을 중심으로 한 6㎢는 특별군사지역으로 지정돼 주변엔 높은 담과 고압 전선이 둘러쳐졌다. 그 안에 본부 관사, 숙소, 생물 무기(세균무기)를 연구 제조하는 연구동, 수감자들을 가둘 특수시설(감옥) 등이 들어섰다. 특수 감옥은 하늘 위에서 본 건물 생김새가 미음(口)자 형으로 지어진 건물의 안마당에 자리해, 바깥으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핑팡에 머물던 731부대원들과 그 가족들을 합치면, 가장 많을 때인 1942년엔 3000명을 넘어섰다(이 가운데 의사를 포함한 핵심 연구원은 400여 명).

이시이, "살아있는 중국인 실험은 극비사항"

그뿐 아니다. 하얼빈에서 북서쪽으로 150km 떨어진 안다(安達)과 하이라루(海拉) 지역에 문제의 야외 실험장이 들어섰다. 그곳으로 끌려간 수감자들은 각종 잔혹한 생체실험 끝에 죽음을 맞이했다. 731부대는 그 뒤로도 확장을 거듭했다. 다렌(大連)에 출장소를 만들었고, 소련 국경에 가까운 무단강(牧丹江), 린커우(林口), 슨우(孫吳), 하이라루 등 4곳에 지부를 세웠다(1940년 12월). 이들 4개 지부는 언젠가 소련과의 전쟁이 터질 경우 세균전을 펼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731부대는 히로히토의 칙령으로 만들어진 특별한 부대다. 부대원들 사이엔 '천황의 칙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유일한 부대'라는 자부심이 컸다고 한다. 군부 예산을 따지는 일본 의회도 731부대에 배정된 예산이 얼마나 되는지, 어디에 쓰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예산은 매우 풍족했다. 군의관들을 비롯한 연구원들의 월급도 아주 많았다. 이시이는 일본의 여러 의과대학을 돌면서 뛰어난 연구능력을 보인 교수나 대학원생 등을 뽑아 731부대로 데려갔다. 높은 급료, 인체해부(생체실험)를 비롯한 현장실습 등은 고급인력을 끌어들이는 유리한 조건들이었다. 그런 부하들에게 이시이는 생체실험에 관련한 보안을 강조했다.

"페스트 유행병은 자연조건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으나 인공적인 방법으로 유행을 일으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먼저 사람의 생리 조건과 특징을 잘 알아야 한다. 인체의 생리특징을 연구한 기초에서 인공적인 방법으로 질병을 일으키고 유행하게 하는 조건을 알 수 있다. 생리특성을 연구하는 작업은 산 사람으로 실험해야 한다. 이런 실험은 중국인을 사용하여, 실험실에서도 진행할 수 있고 야외에서 진행할 수도 있다. 이것은 본 부대의 극비사항이다" (궈청저우·랴오잉창,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의 세균전 실록>, 북경연산출판사, 1997, 41쪽. 진청민, 160-161쪽에서 재인용).

이시이는 세균 가운데 특히 페스트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미친 듯이' 페스트균을 이용한 세균무기 개발에 매달렸다. 밤샘 연구를 하기 일쑤였다. 그의 사진을 보면 면도를 제대로 하지 않은 모습도 보인다.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1941년 3월 소장으로 승진한 뒤부턴 외모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다음 주 글에선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해 생체실험용으로 쓸 '마루타'를 어떻게 압송해와 가혹행위를 했는지, 겉으론 '방역 급수'로 위장한 731부대와 그 관련 부대들이 펼친 세균전의 실상은 어떠했는지를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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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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