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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도 익산에 특화된 '공예관' 건립이 필생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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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백제왕도 익산에 특화된 '공예관' 건립이 필생의 꿈"

이광진 (사)한국공예문화협회 이사장의 공예인생 히스토리

이광진 (사)한국공예문화협회 이사장을 빼놓고 전북 공예 역사를 논할 수 있을까?

전북 익산 출생의 그는 국내 공예문화가 활성화됐던 1999년 전북 공예인들의 뜻을 모아 지금의 협회를 설립, 이듬해부터 개최한 '익산 한국공예대전'을 대한민국 최고의 공모전으로 육성한 공예가이다.

지방대학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2012년에 국내 최대 규모의 한국공예가협회 이사장 자리에 오른 데 이어 연임이 없었던 종전 기록을 깨고 3번이나 잇따라 중책을 맡아 9년 동안 국내 공예인들의 자부심을 한껏 끌어올린 장본인이다.

▲이광진 이사장이 올해 익산 한국공예대전 출품작을 배경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프레시안

도예가인 이광진 이사장은 1989년에 원광대 미술대학교수로 재직한 이후 30여 년 동안 개인전과 단체전을 700여회 개최하는 등 왕성한 예술창작활동을 해왔다.

주요 커리어만 봐도 원광대 미술대학장·미술관장·박물관장, 전라북도공예가협회 이사장, 전라북도산업디자이너협회 회장, 익산예총 회장 등 여러 타이틀을 갖고 있다.

수상 경력으로는 전북예술상(1999년)과 한국공예가협회상(2007), 목양공예상(2008년), 목정문화상(2008년), 대한민국미술인상 현대공예본상(2015), 익산W미술상(제1회·2021년) 등 적잖은 수에 이른다.

이런 그가 익산에 전국 규모의 '한국공예대전'을 개최하겠다고 마음먹은 때는 IMF 외환위기가 끝자락을 향했던 1999년의 일이다.

산업 전반의 체질 개선과 혁신이 강도 높게 추진되는 상황에서 이대로 가면 공예 기반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고 보고 공예문화 활성화와 후학들의 활로 모색 차원에서 전국 단위의 '공예공모전' 개최를 강행했다.

우선 전국 공모전이 공예업의 미래로 나가는 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전북 공예인들을 대상으로 기금 조성에 나섰다. 이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 이사장은 예술인들이 관(官)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뜻과 의지를 모은 다음에 행정에 지원을 요청해야 할 것 아니냐고 설득해 기금 목표치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에 대한 회상이다.

"작가들이 작품 한 점을 기증하는 것은 쉬워도 직접 현금을 내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기꺼이 동참해 주었습니다.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도 아닌 지방의 중소도시에서 공예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기금을 모았다니…. 지금 생각해도 제 인생에 있어 가장 보람된 한 해가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하하~”

▲이광진 이사장이 올해 출품한 작품을 바라보고 있다. ⓒ프레시안

어렵게 조성된 1억원의 기금은 '익산 한국공예대전'의 종자돈이 됐다. 그는 모금된 기금을 갖고 익산시를 방문해 공예대전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보조금 지원을 요청했다.

지역의 공예인들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은 뒤 관(官)에 도와달라고 하니 행정도 적극 나섰다. 이후에도 시상금 마련 등 험로는 끝이 없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2000년에 전국 규모의 '제1회 한국공예대전(大殿)'이 익산에서 어렵게 출범할 수 있었다.

대학교수로 활동하며 전국적인 인맥을 쌓아온 이 이사장은 직접 발로 뛰는 홍보전에 나서면서 전국에서 무려 680여점을 출품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공예대전이 출범한 이후에도 갈 길은 여전히 멀었다. 출품작의 40%가량이 입상하다 보니 행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등 극복해야 할 난관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 이사장은 고심 끝에 입상률을 출품작의 25%까지 낮추는 초강수를 통해 한국공예대전의 실질적인 권위를 회복해 나갔다.

모든 상의 권위는 신뢰를 먹고 자란다. 이를 잘 갈파하고 있는 이 이사장은 특히 심사위원회의 공정한 심사를 최우선했다. 1차 심사에서는 금속과 도자, 목·칠, 섬유 등 4개 분과의 심사위원들이 웹하드의 출품작을 영상을 통해 비접촉 심사를 하도록 했다.

선후배 관계가 밀접한 문화예술 분야의 경우 오히려 실물 심사가 공정성을 헤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대면 심사를 한 것이 공정성과 신뢰성 확보에 큰 도움이 됐다.

각 분과별로 원로 등 1명씩 참여하는 2차 심사는 학연이나 지연이 없는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위원들로 구성해 '책임심사제'를 실현하도록 했다.

▲출품작을 보는 이광진 이사장의 얼굴에는 언제나 환한 웃음꽃이 피어있다. 대상을 받은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프레시안

심사점수 합산 역시 5명의 위원 점수 중에서 최고와 최저를 배제한 채 중간의 3명 점수를 평균으로 내서 수상작을 고르는 엄정하고 공정한 심사를 유지했다. 그래서인지 '익산 한국공예대전'의 심사는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잡음도 없었다.

전북의 익산에서 고고한 함성을 울렸던 '한국공예대전'은 알음알음 전국에서 알아주기 시작했고, 10회를 넘기며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권위 확보와 엄정 심사 외에 공예인을 위한 배려도 전국 행사로 우뚝 서는 데 한몫했다. 이 이사장은 공예인을 위한 대전(大殿)인 만큼 참가자의 작은 불편도 없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울과 부산, 광주, 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출품한 작품들을 반입·반출할 수 있도록 운송비 30만 원을 지급하는 이유이다.

이렇게 정성을 들인 '익산한국공예대전'이 올해로 24회를 맞아 익산예술의전당에서 최근 전시를 마칠 수 있었다. 올해의 출품작은 322점으로 이 중에서 25%인 82점이 전시돼 뜨거운 관심을 끌었다.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공예대전으로 우뚝 선 것이다.

전국 규모의 행사를 치르다 보면 시상금 마련부터 안내와 홍보, 대관, 전시 등 신경 쓸 것이 한둘이 아니다. 상금만 해도 대상 3000만원 등 총 1억원에 달한다.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매년 수많은 우수 공예인들의 경연장을 만들기 위해 필생의 소명이 없었다면 모든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코로나19의 최악 상황에서도 전국의 열정적인 작가들이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적용한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많이 출품한 배경에도 그의 혼신이 투영돼 있다.

"주변의 많은 도움을 받으며 24년을 이어온 공모전으로 인해 개인적으로 갚아야 할 빚이 많아졌습니다. 공예대전을 더욱 활성화해서 익산을 알리고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이 부채를 갚는 길이라 생각하면 더욱 열심히 뛰게 됩니다."

인터뷰를 위해 익산예술의전당 미술관을 찾았던 지난 12월 4일 오전에도 그는 전시된 작품을 둘러보고 있었다.

▲2024 익산한국공예대전 수상작 중 한 점 ⓒ

한평생을 공예인으로 살았고, 이제 후학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그에게 과연 '공예'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직접 물어보았다.

프레시안 : 공예란 무엇입니까?

이광진 이사장 : 공예의 본질은 쓰임입니다. 한마디로 용(用)이지요. 감상에 그치는 다른 예술 분야와 달리 쓰임새가 있다는 점에서 실용과 궤를 같이합니다. 여기에 플러스를 한다면 미(美), 아름다움입니다. 다만 쓰임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지요. 요즘은 쓰임과 함께 아름다움의 조형성을 많이 고려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요즘 공예가 위기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광진 : 그렇습니다. 서예에 치이고 사진에 내몰리는 등 과거처럼 대접을 못 받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동안 사랑을 받아온 전국적인 전시회도 많이 폐지되거나 축소되고 있으니…. 익산이라는 지방에서 전국적인 공예운동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우리 일상에서 공예가 조금씩 퇴색되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깝고 고통스럽습니다. 공예가 진정한 예술의 분야이자 실용의 가치를 인정받는 날이 오기를 희망할 따름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를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고요. 하하하!

프레시안 : 그러면 공예인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광진 : 공예단체나 공예인들도 자생력을 키워야 합니다. 앞서 강조했지만 자꾸 밖에 의존하면 안 됩니다. 행사를 치르는 것도 보조금에 기대면 성공할 수 없거든요. 외부에 기대는 의타성은 경쟁력을 떨어뜨릴 뿐입니다. 사실 예술인들은 수도권의 소수 인기 작가 외에 작품 판매가 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MZ세대에게 공예 환경은 아주 어려울 수밖에 없지요. 가난을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래서 관의 보조금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공예인 스스로의 자생력을 먼저 길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공예 전시 자체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광진 : 공예대전은 수익 창출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작가들의 출품료는 5만원입니다. 300명이 참여한다 해도 1500만에 불과한 셈이지요. 그런데 시상금만 해도 1억원이니 출품료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셈이지요. 국내 공예산업의 활성화, 후학들의 활로 등을 위해 길을 터주자는 것이지요.

프레시안 : 정책적 지원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광진 : 어찌보면 저는 대학교수로서 품위 유지를 위한 급여를 학교에서 받았던 선택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전업 도예인들이나 전업 공예가들은 굉장히 고생을 많이 합니다. 공방을 하나씩 마련하기에도 오랜 준비기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공예를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만 더 기회를 주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프레시안 : 개인적인 여유 시간은 어떻게 보내십니까?

이광진 : 젊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등 소통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제 자신의 정신도 젊어지고 판단도 뚜렷해집니다. 옛 골목대장 친구들을 만나는 것보다 젊은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노는 것을 더 좋아할 정도이지요. 70대의 나이지만 여전히 피자와 햄버거에 아메리카노를 즐기고 있습니다.

프레시안 : 후배 사랑이 지독하다고 들었습니다.

이광진 : 먼저 앞으로 나간 사람이 뒤따라오는 사람을 위해 길을 열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한국공예가협회 이사장을 3번 연임할 당시에 지역의 후배 공예인들이 수도권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같이 노력했던 기억이 납니다. 수도권 사람들은 서울 아니면 모두 시골이라 생각합니다. 익산 출신이 이사장을 연거푸 맡아 지역의 인재를 서울로 끌어올려 기회를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한국공예대전 역시 100년 앞을 내다보고 후학들이 들어올 장(場)을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후배들의 의견을 많이 청취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2023년 익산한국공예대전 포스터 ⓒ

이광진 이사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한 공예인이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처럼 공예에 미쳐 최고의 경지를 만들어냈다.

지방에서 시작한 행사를 대한민국 최상위로 키워낸 발본적 혁신의 대명사이다. 바람을 거스르는 비행은 순조로울 수 없다. 시대의 흐름과 민심의 바람을 타야 더 멀리, 더 빨리 갈 수 있는 법이다. 그가 국내 선후배 공예인과 함께해온 이유일 것이다.

인터뷰 말미에 앞으로의 꿈은 무엇이냐고 다시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고향인 전북 익산에 특화된 '공예관'이나 '공예미술관'을 건립하는 것이라는 답변이 나왔다. 백제 마한의 옛터 익산에 공예관을 짓는다면 그 자체의 의미가 깊어 지역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

국내에는 아직도 공예로 특화된 공예미술관이 단 한 곳도 없다. 익산시에서 부지를 제공한다니 예산만 투입한다면 국내 최초의 특화된 '공예관'이 탄생할 수 있다. 앞으로 후배들이 주체가 되어 50년, 100년 공모전을 이어가는 그의 몽(夢)이 단순한 꿈이 아닌 현실로 변환하는 순간은 언제 올 것인가? 다시 한 번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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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홍

전북취재본부 박기홍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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