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이때 한나 아렌트와 칼 야스퍼스는 편지 왕래로 한국전쟁의 국제정치적 의미를 논의했다. 아렌트는 같은 해 늦여름에 마무리한 <전체주의의 기원> '서문'의 첫 단락에 한반도 상황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1933년 망명한 이후, 아렌트는 공산주의 신념을 버린 '과거의 공산주의자' 하인리히 블뤼허와 1941년 파리에서 재혼했다. 특별히, 아렌트는 평생 반려자인 남편에게 이 책을 헌정했다. 당대의 경험을 함께 고뇌했기에, 이 책은 공동으로 집필한 '정치적 사유의 산물'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역사적 경험은 재현되는가?: 아렌트의 역설
전체주의의 등장 배경과 과정을 천착한 아렌트의 '저항적' 이야기하기는 참으로 복잡하다. 다양한 시각에서 20세기 전반의 경험을 '현재'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첫째,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명제를 반박했다. 전체주의는 이전의 독재와 달리 역사에 '처음 등장한' 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둘째, "역사에서 종말은 새로운 시작을 포함한다"는 명제다. 아렌트는 죽음을 상징하는 전체주의에 저항하며 인간의 삶을 탄생, 즉 '새로운 시작'으로 이해했다. 셋째, "우리는 '전체주의' 용어를 삼가며 세심하게 사용할 온갖 이유를 갖는다"는 주장이다. 인간의 새로운 경험과 정신적 산물은 마치 대지의 표면 밑을 흐르다 연약한 지반 위로 분출하는 물줄기 같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한 '극단적' 악행을 극복하려는 아렌트의 분투 정신은 이후 저작에 투영됐다. 즉 아렌트의 정치적 사유는 '세계사랑amor mundi'에 기반을 두었다.
전체주의 운동에 직면한 국민국가의 운명
전체주의 운동이 국민국가 체제를 부정하고 세계 지배를 목표로 했기에, 아렌트는 전체주의 '운동'에서 전체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계기들을 이야기했다. 조직 '운동'은 자연에서 나타나듯이 영구적인 유동성을, 국가 '제도'는 안정과 변화의 균형을 지향한다. 전체주의 운동은 인간세계 밖의 작동 원리, 즉 자연법칙(인종투쟁)과 역사법칙(계급투쟁)을 실현한다는 목적으로 국민국가의 정치 ‧ 법 ‧ 질서를 붕괴시켰다. 붕괴 과정은 베르사유 체제 성립 이후 진행됐다.
전체주의 운동은 정당의 기반인 계급이나 시민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대중을 지지세력으로 끌어들였다. 운동의 촉매제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에 호소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 즉 인종의 퇴보를 막는 인종주의와 경제적 갈등을 막는 역사적 유물론이었다. 한편, 인종 쇠퇴에 대응한 우월한 인종의 지배는 비관주의에, 다른 한편 계급 지배를 넘어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계급 없는 사회'는 낙관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런 신화는 모두 대중을 끌어들인 수단이었다. 운동의 '성공'을 위한 기제는 두 가지다. 첫째, 비밀단체인 '운동 조직'은 지도자 ‧ 엘리트 집단 ‧ 당원 ‧ 동조자로 구성되며, 지도자에 대한 총체적 충성을 요구했다. 둘째, '선전'은 과학성과 예언 형식의 이데올로기로 대중의 숫자를 증대시킨 수단이었다.
인류의 공존을 부정하는 '총체적 지배'
전체주의 운동은 자유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지지 덕택에 권력을 장악했다. 집권한 전체주의 정부는 새로운 상황에서 법과 제도의 안정을 지향하지 않고, '자연 과정'의 특성인 영구적 운동 원리를 정치영역에 적용했다. 몇 가지 주요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체주의 정부는 운동과 안정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고자 권력의 지속적인 이동과 무정형의 국가 조직을 만들었다. 관직의 중복, 권위의 분할, 실질적 ‧ 형식적 권력의 공존 형태를 유지했다. 둘째, 비밀경찰은 '용의자'가 아닌 '객관적 적'을 끊임없이 만들고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비밀조직으로 운동의 항구성을 유지했다. 셋째, 총체적 지배는 추방 → 수용 → 학살의 구도에 따라 법적 ‧ 도덕적 인격을 학살하고, 개인의 개체성마저도 파괴했다. 집단수용소 재소자는 인간의 시작 능력을 상실한 꼭두각시 인형, 즉 산송장이었다. 넷째, 이런 '극단적' 악행을 죄의식 없이 수행했다. ⑴ 실정법을 무시하고 인간을 마치 똑같이 반응하는 '단일한 인류'를 만드는 기제로 자연법칙과 역사법칙, 즉 운동의 법을 적용했다. 이 법칙의 구체적인 실현 수단이 바로 테러다. ⑵ 미덕 ‧ 명예 ‧ 공포가 아닌 이데올로기 자체는 정치 행위의 원리였다.
이데올로기적 사유와 정치의 위험성
아렌트에 따르면, "모든 이데올로기는 '총체적' 요소를 지니더라고, 이 요소는 '전체주의 운동'에서만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다." 전체주의는 이데올로기와 운동, 총체적 테러, 인간의 자연적 연대의 파괴(사적 영역의 정치화), 관료 통치를 특성으로 했다. 이 체제는 이제 역사적 유물이 됐지만, 이데올로기적 사유와 정치는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재현될 수 있다.
첫째, 매카시즘과 반공주의이다. <전체주의의 기원>이 출간될 당시 미국내 반공주의의 중심인물은 '전후 전향한' 공산주의자였다. 나치 동조자들을 모두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이 전체주의적 방식이듯이, 이런 지적 사고는 미국 전체의 정치적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매카시즘은 대중을 끌어들이는 '운동'의 형태를 취하지 못했고 반국가적 열병도 드러내지 않았다. 1960년대 진영 사이 대립이 격화됐을 때, 반공주의는 또한 사회주의와 대립을 강조했지만, 세계 지배와 같은 통합적 상상력을 제공하지 못했다. 특이하게도, "중국이 천안문 사태(1989년) 이후 '유사 전체주의'에서 벗어났을 때, 아렌트의 저작은 중국어로 번역되었다."
둘째, 21세기 초두 이데올로기 충돌과 테러 현상을 들 수 있다. 부시 행정부는 '악의 축'을 기반으로 한 외교정책을 수행했다. 즉 "근본주의적 민주주의는 필요하다면 세계에 선포되고 폭력적 수단을 통해 세계에 부과될 도덕적 선으로 강조됐다." 반면에, 호전적 이슬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주장했고, 이슬람 세계를 만들고자 테러를 정당화했다. 마찬가지로, '핵 위협' 주장은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이런 담론은 인류 절멸의 위험성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78주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공산 전체주의'에 대한 여러 차례의 언급을 우려해야 한다. 자유 ‧ 평등 ‧ 인권 ‧ 법치 ‧ 평화 등의 이념은 정신의 산물이며 우리 삶을 인도하는 지표이다. 그러나 "이념을 실행하는 논리가 그 내용을 삼켜버리는 게 이데올로기 정치의 본질이다."
⑴ 기념사에서는 공산 전체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대립을 전제로 하고, 일부 집단을 청산해야 할 '반국가적' 세력으로 규정한다. 집단 활동인 정치는 ① 차이(즉 다원성)를 인정하는 활동, ② 낯선 것을 배제하고 모두를 포괄하는 활동, ③ 차이를 경멸하는 적대 활동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나 차이를 존중하는 우위 경쟁인 '경합(agonism)'이 반대 세력을 인정하지 않는 '적대감(antagonism)'으로 치환될 경우, 정치와 정치적인 것은 심각하게 위축되며 훼손된다.
⑵ '자유 사회' 개념의 모호성과 결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우선, 자유 개념의 모호성을 들 수 있다. "자유는 자유롭지 않다"에도 나타나듯이, '개인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는 구분된다. 그러나 기념사에서 정치적 자유에 관한 언급은 드러나지 않는다. 둘째, 미덕(평등에 대한 사랑, 조국애)을 정치 원리로 삼는 민주 공화정을 고려할 때, '자유 사회' 개념은 헌법 정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에서 정치와 자유는 대립을 전제하지만, 공화주의에서는 정치와 자유의 공존을 인정한다. 이렇듯, 모호한 이념을 토대로 현실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자칫 정치와 역사의 의미를 훼손시킬 수 있다.
강조하자면, "우리는 '전체주의'라는 용어를 삼가며 세심하게 사용할 온갖 이유를 갖는다." 현실의 정치적 ‧ 사회적 난관을 해결하고자 역사적 유물을 현실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 사유에서 비롯된다. 지금까지의 주장을 고려할 때, 아렌트의 전체주의 이론은 여전히 현실을 통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연재는 공공선 거버넌스(원장 강치원)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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