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넘게 가꿔온 조상님들의 묘지가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묘지임을 알고도 팠다고 하는 것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13일 오후 전남 영광군 군서면 매산리 임야. 입구에서부터 공사로 인한 흙더미들과 돌들이 거대한 산을 이루며 길을 막고 있었다. 인근에는 뾰족하게 깨진 바위 파편부터 나무 조각들은 마치 진입 금지를 외치는 철조망 같았다.
흙더미를 비집고 들어간 현장은 처참하기만 했다. 빼곡이 있어야 할 수목들은 찾아볼 수 없었고 주황빛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채 허리가 잘려 나가 있었다.
약 2~3m의 절벽이 형성된 황토 벽면은 포크레인이 할퀴고 간 흔적들과 절반이 잘린 채 누워있는 대나무‧소나무들이 당시 현장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곳은 A씨와 형제들의 소유 임야로 대대로 100년이 넘도록 증조부·모, 고조모 3분을 모시던 장소였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추석 전 벌초를 위해 인부를 고용하고 일을 맡겼지만 인부들의 '묘가 사라졌다'는 말에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지난해 8월까지만 해도 벌초를 진행했다는 A씨(68)는 인부들에게 "다시 한번 찾아봐라", "길을 잘못 들었을 것이다"며 재차 확인을 부탁했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답은 "당장 와보셔야 할 것 같다. 묘지가 공사현장으로 바뀌었다"는 어처구니없는 말만 돌아왔다.
확인을 위해 현장를 방문한 A씨는 조상들의 분묘가 모두 파헤쳐 진 현장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분묘 주인 A씨는 "추석 전 조상님들이 잘 지내고 있으신지 인사드릴 겸 분묘를 찾았지만 공사현장으로 바뀐 모습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며 "지난해 8월에도 벌초작업을 하고 올해도 벌초를 예정해 두면서 공들여 관리하던 분묘가 한순간에 사라졌다"고 토로했다.
전남도에 따르면 전남 영광군 군서면 매산리 일원에는 총사업비 282억8900만원을 들여 '불갑천 재해복구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2022년 5월부터 2024년 5월까지 2년간 진행되는 이 사업은 지난 2020년 호우피해 복구사업으로 교량 재가설, 제방 축조, 호안 정비, 기타 시설물 정비 등 도민들의 정주여건을 개선한다는 목적으로 추진됐다.
하지만 도민들의 정주여건을 개선한다는 사업 목적과는 달리 주민 묘지를 불법 훼손하고 유골까지 유실시켜 버렸다.
분묘 주인 A씨는 "한 마디의 사전 통보조차 없이 무단으로 분묘를 파헤치는 것도 모자라 유골까지 흔적 없이 파헤쳐 버렸다"며 "누가 봐도 그 장소가 묘지임을 알 수 있었기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반인륜적 행위"라고 분개했다.
공사 과정에서 인부들이 민간인의 묘지를 사전 통보조차 없이 무단으로 훼손하고 토사까지 공사에 사용했다는 문제도 제기했다.
A씨는 "묘지를 파헤쳐 생긴 토사도 무단으로 가져가 자신들의 공사에 사용했다는 사실에 어이 없어 헛웃음만 나온다"며 "문제가 생길 부분이 충분히 많았음에도 공사를 중지하지 않고 계속 진행한 것은 책임자들의 '무책임한 행정'의 민낯을 보여주는 일이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에 대해 공사 현장소장은 묘지를 훼손한 부분에서는 '죽을죄를 지었다'고 잘못을 인정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현장소장 B씨는 "공사 당시 낮게 형성된 봉분 등을 인지하기는 했지만 관리가 안된 듯 주변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나무들이 가로막고 있어 주인 없는 땅인 것 같아 공사를 진행했다"며 "사고 위험이 큰 구역이라 흙을 싣고 나르는 트럭들의 회차를 편하게 하기 위해 땅을 파내 평평하게 만들었다"고 해명했다.
이어 "임의로 묘지를 훼손할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며 "피해자에게 사용한 토사는 물론 묘지 원상복구‧보상 등 다양한 방면으로 협의를 진행 중이다"고 덧붙였다.
분묘 주인 A씨와 형제들은 지난달 22일 현장소장 B씨와 해당 시공사를 상대로 영광경찰서에 고소장을 접수했다. 고소장에는 분묘 3개를 훼손한 혐의와 토사 절취, 유골 유기에 관해 산지관리법 위반, 절도죄, 분묘발굴죄, 유골유기죄 4가지 사안을 적시해 제출했다.
중견 로펌의 한 변호사는 "분묘를 훼손하면 형사처벌 대상일 뿐 아니라, 재물훼손과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 등 손해배상까지 물을 수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