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어두운 시대의 살얼음판 위에서 나는 7년 여 동안 대한전선 그룹 노동조합본부 기획실장으로써, 한달수 지부장과 함께 지부 활동에만 매달려 일했다. 달마다 노동조합 신문을 제작 배포했고, 노동조합 간부교육을 수립·집행했고, 노동조합 임금인상 요구안을 만들었고, 신문을 제작했고…. 이 일 저 일로 노동조합 안팎을 뛰어다녔다.
때는 유신독재가 판을 치는 엄혹한 박정희 혼자만의 시대였다. 박정희가 내린 각종 긴급조치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시대의 한가운데였다. 헌법 상의 노동3권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도 박정희 비위에 맞추어 행사해야 했던 시기였다. 특히 대한전선 노동조합과 같은 대기업 노동조합은 더 조심해야 했다.
그래도 때때로 자연 속에 캠프를 치고 노동조합 교육행사를 진행했다. 때로는 문막을 지나 홍천강가에서, 때로는 노동조합 중간간부들과 그들의 가족과 함께 평택 효명고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운동회도 열었다. 봄 노동절에는 회사 시흥 강당에서 조합원 노래자랑 대회를 열었고, 때로는 노동조합에서 제작한 등산복을 입은 대한전선그룹 7개 공장 노동조합 남녀 중간간부들이 등산가방마다 노조 깃발을 꽂아 나부끼며 긴 줄을 이루어 천마산 정상을 오르기도 했다.
모든 게 일주일마다 정규적으로 열린 노동조합 대표자회의에서 결정된 사항들이었고, 지부 대의원대회에서 1년 사업계획으로 미리 계획되고 확정된 사항들이었다. 물론 모든 내용은 지부장의 지휘 하에 기획실장인 내가 모든 일을 설계하고 집행했다. 특히 현장 7개 노동조합 중간간부들의 교육기획과 집행에 정성을 기울였다. 전국화학노조 본부 전문위원인 고려대 출신의 천영세 부장, 연세대 출신의 오승룡 부장은 대한전선 노동조합 간부교육의 단골 강사였다.
덧붙여 이 시기의 전국단위 노동조합 본부에는 학생운동과 관계가 깊었던 대학 출신의 노동조합 전문위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노총는 김금수 선생님을 비롯하여 연대 출신의 이득헌, 고대 출신의 조춘구 등이, 화학노조본부에는 천영세와 오승룡 등이, 섬유노조본부에는 서울 상대 출신 김승호와 고대 출신 이원보 등이, 전국금속노조에는 서울상대 출신 노진귀가 전문위원으로 전국금속노동조합 본부활동과 일선 단위노조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오직 나만이 대기업 일선 현장 단위노조에서 일했다. 이들은 모두 내 또래 전후로서 언제 어디에서나 친구요 동지로서 한마음으로 통했다.
한때는 주택조합을 설립, 안양 일원에 2층짜리 소규모 아파트를 준공하기도 했다. 때로는 노동조합 본부 강당을 이용하여 일일찻집을 운영하였고, 일층 곁 조그마한 공터에 일일 막걸리 주점을 열어 조합원과 노동조합 간부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나는 평소에 신문 볼 시간도 없이 일했다. 하지만 내가 노조 기획실장으로서 활동하던 그때, 유신 척결 학생운동과 시민운동 핵심 주역들은 나의 대학 시절 민주화 운동 동지요 후배들 일색이었다. 특히 그들이 엮어낸 유인태, 이철 등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피고인 사진 속의 대다수가 나와 한 몸이 되어 활동했던 서울대 후배들 일색이었다.
'한달수 실종' 사태 속에 거둔 소중한 승리
1980년 5월의 '서울의 봄'이 지나도록 나의 노동조합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특히 1980년도 봄 임금인상 활동 때가 내 노동조합 활동의 정점이자 끝이 되었다.
내가 기획실장으로 있던 7여 년 동안 매년 임금인상을 위한 노동조합의 활동은 주로 이론 싸움이었고, 또한 1만 조합원들의 생활과 마음을 등에 업은 '여망(與望)'의 싸움이었다. 비록 박정희가 다스리는 비상시국이므로 임금인상교섭은 조용하게 치러졌지만, 그런 중에도 성과는 거뒀다.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법'이란 군도(軍刀)로 인해 임금인상을 위한 단체행동으로 직진하진 못했지만, 해마다 기아그룹이나 금성그룹의 임금수준에 뒤지지 않는 임금인상을 대한전선 그룹과 대한전선 본부 노동조합 대표단만의 교섭으로 이루어냈다.
그런데 어느 날엔가 대한전선 노동조합 본부 한달수 지부장이 아무런 말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리 소문 없이 노조 본부 사무실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본부 사무실의 지부장 자리는 마냥 텅텅 비어있고, 찾아오던 사람들의 발길도 뚝 끊어졌다.
대한전선 노동조합의 중심이요 지휘자인 한달수 지부장이 사라진 것이다. 그때는 1980년도 노동조합의 임금인상안을 이미 그룹에 제출해 놓고 있었더랬다.
한달수 지부장이 사라진 동안, 시흥 대한전선 분회에서는 김송 부분회장의 지휘로 내가 작성해낸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요구안을 근거로 당해 임금인상을 위한 단 한 번의 단체 활동이 있었다.
지부장이 사라진 이 위급한 시기에 김송 분회장 직무대리가 오랜 숙고 끝에 결단을 내렸다. 시흥전선 분회만으로 임금인상 활동전선을 압축, 대한전선 그룹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활동전선을 돌파한다는 결심이고 결행이었다. '사즉생(死卽生)!'.
시흥전선 분회 대의원들과 집행부 중간간부들은 힘뿐만 아니라 꾀도 있었다. 단합된 행동은 하되 행동 내용은 노동법과 단체협약 내의 근로시간 지키기 운동으로 집약시켰던 것이다. 법을 지키겠다는데 누가 트집을 잡을 수 있겠는가. 야간근무나 연장근무를 강제 받지 않는 하루 8시간 노동 지키기, 출근시간이나 퇴근시간은 철저히 지키기 등. 이른바 '준법투쟁!'
김송 부지부장의 지시에 따라 나도 모든 조합원에게 전할 행동지침 선언서를 작성해 돌렸다. 그리고 식당에 모인 500명의 조합원 앞에 나가 임금인상 활동을 위해 조합원에게 배포한 호소문이자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모두가 하나 되어 행동함으로써 한 사람의 희생자도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장시간 노동이 일상화되고 습관화되어 있던 시절, 8시간 노동이 지켜진다면 즉각 공장을 가동할 수 없는 환경이 되는 것이다. 운동은 일사불란 정연하게 집행되었다. 결과는 불문가지. 노동조합이 이겼다.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뒤에 나에게 닥친 일련의 일들을 생각하니, 이러한 나의 행동이 국가정보부와 정보 경찰부에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계기가 되었던 듯 짚어진다.
어느 날 김장선 지부장 직무대리가 나에게 갑작스럽게 하는 말이 이스라엘에 갔다 오란다. 이스라엘 노동조합총연맹인 히스타드루트와 이스라엘의 아시아·아프리카 협동조합 중앙기구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국제 협동조합 교육과정에 나를 파견하기로 결정이 됐단다. 그렇게 이스라엘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된 어느 백주대낮, 느닷없이 우리 집 아파트 문을 밀고 들이닥친 국가정보부 요원이 나를 지프차에 태워 남산 중앙정보부 심문실로 데려가 문초했다.
중앙정보부에서 7일 동안이나 무단 감금되어 심문받고 난 후 취조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해고당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나에게도 시대의 검은 구름이 밀어닥치고야 만 것이다. 나도 1980년 '서울의 봄', '자유의 날'을 탱크와 총검으로 뭉갠 전두환 군부독재정권 시대에 살았으니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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