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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법 도망자' 신세, 그때 만난 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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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법 도망자' 신세, 그때 만난 한 여인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하다] 반공법 그물에 걸려 탄광을 떠나다

'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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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봄날이 지나가던 어느 날 소장이 갑자기 나를 불러올린다. 나를 보더니 대뜸 하는 말이 즉시 탄광을 떠나 달란다. 숨을 돌려 듣자하니 내가 서울에서 반공법 위반자로 낙인 찍혀 전국에 수배되어 있단다.

웬 날벼락! 그들이 왜 나를? 하여튼 정보부 요원이나 정보경찰이 언제 탄광으로 밀어닥칠지 모르니 그렇단다. 아뿔싸! 나는 멀쩡한 몸인데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모종의 일로 수배 중이던 정치학과 동기 손학규의 집 다락에서 쏟아진 많은 것들이 신금호가 지녔던 것이란다.

불현듯 모택동의 <모순론>과 <실천론> 그리고 세계 철학사 노트가 떠올랐다. <모순론>과 <실천론>을 우리말로 옮겨 쓴 노트와 소련 과학아카데미에서 출간한 세계철학사에서 옮겨낸 단문의 글들, 그리고 장질의 일본어판 세계대백과사전에서 옮긴 레닌 등 볼셰비키 활동가들의 글을 옮겨 쓴 노트가 마음에 켕겼다. 졸업하기 몇 달 전에 군대에서 갓 제대한 손학규에게 공부에 참고하라고 넘겨준 나의 책과 노트들이다.

하여튼 신금호를 잡으러 그들이 온 세상을 뒤집고 다니고 있단다. 나로서는 상상도 못하던 뜻밖의 일이었다. 모든 걸 뒤끝 없이 정리했는데, 손학규에게 넘겨준 것 때문에 내가!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다. 그러나 나는 서울대학교의 정치학도였다. 그러기에 현 세계 한 모퉁이에 있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사도 자본주의 자유세계의 책들과 함께 섭렵하지 않았더란 말인가?

그렇지만 이것이 통할 만큼 세상은 정직한가? 무지 무식한 자들이 어찌되든 반공법을 들이대면 얼마든지 엮어낼 수 있는 박정희 군부독재 긴급통치의 세상이 아닌가? 그렇다. 반공법으로 찍으려 들면 누구든 찍혀야 하는 세상이었다. 죄가 성립하든 아니든 독재자 박정희의 대한민국은 철두철미 반공을 절대국시로 하는 독재국가가 아닌가. 이 반공의 극한 세상에서 반공법으로 얽히면 누가 몸 뉘어 숨 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기에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공부를 하면서도, 민중 속에 섞이면서도 반공법에 걸려들지 않으려고 나는 늘 조심해 왔다. 헌데 손학규의 일로 인해 내가 반공법 그물망에 얽혀들게 될 줄이야! 그러나 어떻든 나에게 밀어닥친 운명은 현실이었다.

도망이 장땡이라고, 걸려들지 않으려면 즉시 탄광을 떠나달라는 요청이었다. 또한 떠나되 떠날만한 사유만은 남겨달란다. 회사는 이를 문제 삼아 해고시켰다고 하겠단다.

나로서는 반공법 위반자로 몰리더라도 죄 지은 것이 없으니 대수롭지 않아 보였지만, 세상은 오로지 유신 박정희 독재, 독재자 마음대로의 세상 아니던가. 그리하여 평소에도 정보부에 꼬투리 잡힐 만한 일은 남겨두지 않는 게 버릇이 되어 여럿이 사진을 찍는 것도 금기시했더랬다. 죄가 없다고 해도 반공법 올가미에 한 번 걸리면 인생 끝장이라는 걸, 인생 나락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 죄가 없다고 해도 우선은 잡히지 않아야 했다. 나는 하루아침에 도망자, 유랑자의 신세가 되어야 했다.

땡전 한 푼 없는 내가 갈 곳은 서울뿐. 은신처로 양남동 뚝방동네 천막집으로 떠나기 전 탄광에 댈 핑계를 만들려고 사무실에서 술주정이라도 해보려 했다. 가까운 민가집 가게에 들러 경월소주 큰 병을 사들고 안주도 없이 뱃속에 부었으나 정신은 더없이 말짱해질 뿐이었다.

'떠야 할 몸이라면 즉시 이대로 떠나자'고 마음을 다잡고, 그 몸 그 상태로 사택에 들렀다가 바로 도계읍을 향해 갔다. 주머니에는 기차값 정도 말고는 돈 한 푼 없었다. 도계읍 이발소로 들어가 머리를 깎으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앞날이 막막하긴 똑같았다. 밀항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즉시 어디라도 도항했으면 했다. 거듭거듭 생각해도 갈 곳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1974년 반공법을 적용받아 재판 받는 문인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경향신문 기증)

동무인가 동지인가, 그녀를 만나다

태백 읍내에서 털털거리며 기어가는 시골버스에 올라타 그 높은 황백산을 휘돌아 넘어 고한으로 내려갔다. 고한 역에서 서울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역 앞 양동 골목 허름한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 일찍 나서 남대문 시장터를 거치고 북창동 뒷길을 걸어 시청쪽으로 내려갔다.

새벽 뒷길이었으나 아무런 뜻도 없고 딱히 정해놓은 갈 곳도 없으니 발 가는 대로 걷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연거푸 굶은 터라 힘이 빠진 채 어슴푸레한 새벽 인적 드문 북창동 뒷길을 마냥 걸었다. 빈 속이라도 달래고 싶었으나 돈 한 푼 없었다.

마침 북창동 골목길 모퉁이에서 작은 구루마에 피운 연탄불에 고구마를 굽고 있는 장사꾼을 만났다. 빈손에 쥐어지는 한 푼을 털어내 갓 구운 고구마 하나를 사서 식힐 틈도 없이 이 손 저 손으로 옮겨가며 입에 쳐 넣었다. 고구마 하나로 앞뒤가 붙어 홀쭉해진 뱃속이 얼마나 뿌듯하게 뜨거워 오르던지.

종로5가를 돌아 무턱대고 문리대로 들어가 마로니에 주변 위에 앉았다. 어떻든 편안하고 안온하기는 했다. 누구라도 아는 얼굴을 만났으면 싶었다. 한두 명을 만나 전후 사정을 들었다. 내 형편 내 사정도 알렸다. 푼돈 몇 푼도 얻었다. 어느 때는 문리대 예비군 야외 훈련장을 찾아가 내가 만든 복학생 모임인 부문회 정치학과 동문 김건을 만나 주머닛돈을 탈탈 털어 얻기도 했다.

그렇게 정치학과와 학생운동 후배인 안양로와 함께 영등포 양남동 안양천 뚝방동네를 뒤져, 허름하고 작디작은 천막집 한 칸에 잠자리를 잡았다. 맨땅 위에 거적을 깔고 그 위에 빛바랜 비닐 장판을 깐 낡은 천막집이었다. 세간살이는 하나도 없었다. 거적 같은 천막천으로 기워진 문에 손바닥만한 공기구멍이 났을 뿐.

어느 날 문리대 동문 신동수가 노동터에서 일하다 나온 여학생을 내게 소개시켜 줄 터이니 광화문 무교동 독일 빵집 2층으로 가보란다. 약속된 시간에 빵집으로 들어가 2층 계단을 오르며 주위를 살피니 한쪽 의자에 여학생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홀로 책을 펼치고 앉아있었다.

잠시 다른 테이블에서 숨을 돌리고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난 신금호라 합니다. 혹시 제가 만날 사람인가 해서…" 그렇게 초면의 처녀에게 말을 건넸다. 간혹 친구들과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구성지게 눈물 적시는 옛 가요나 결기 실린 혁명가를 부르기도 했지만, 여자 이야기는 한 번도 있은 적이 없었더랬다. 그런 내가 생면부지의 여학생인가에게 말을 걸다니. 아마도 노동터 경험에 대한 동지적 감정 때문이었을까, 쫓기는 신세 탓이었을까.

그녀는 미인형은 아니지만 흠집 하나 없는 둥그레한 얼굴에 티 없는 피부, 조금 둥근 몸매에 보통 키, 검은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삼국지 명의 화타가 독화살을 빼낼 때 관운장처럼 눈섭이 양옆으로 치켜 올라간 모습이 첫인상이었다. 머릿결은 어깨 너머에서 허리께까지 길게 늘여져 있었고, 품 넓은 검푸른 재킷에 허름한 청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살은 그렇게 찌지 않았고, 그렇다고 가늘어 보이지도 않았다.

첫인사를 하고 뜻 모를 겉핥기 이야기를 하다가 "막걸리를 하냐"고 물으니 뜸들이지 않고 단번에 그렇단다. 곧바로 빵집 옆 무교동 모퉁이 막걸리 집에 들어가 앉았다. 가는대로 입을 놀리고 가는대로 막걸리 잔을 들었다. 연신 막걸리를 따랐다. 서로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초면이지만 마음에 지닌 건 다 털어냈다. 도망자로서 기댈 곳 없는 외로움 때문인지 내가 털어낸 모든 걸 그녀는 가감 없이 들어주었다.

내가 듣고 싶은 것도 다 들었다. 그중 한 가지. 그녀는 의대 본과 1학년을 다니던 중 휴학하고 버스차장 노릇도 하고, 조금 전까지는 구로동 전자공장에서 여공생활을 했단다. 이날은 이정도로 끝내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헤어졌다. 나는 지닌 돈이 없었으니 술값은 그녀가 치른 것 같다. 한낮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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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금호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거쳐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안성에 정착해 도예가로 제2의 인생을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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