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블랙핑크의 두 번째 월드투어 '본핑크'(Born Pink)가 지난 9월 15~16일 서울 고척돔 공연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서울에서 출발해 다시 서울로 귀환한 월드투어의 여정은 꼬박 11개월 걸렸다. 총 23개국, 34개 도시, 66회 공연, 180만 명의 관객동원 성적표. 관객 수로는 케이팝 역사상 BTS '러브 유어 셀프' 투어(205만 명)에 이은 두 번째 기록이다. 투어 전체 매출 규모로는 2020년 이후 전 세계 모든 콘서트 투어 중에서 9번째로 많다. 마지막 공연 때 위버스(Weverse)에서 진행한 엄청난 온라인 중계 수익까지 따지면 이보다 훨씬 높은 순위를 기록할 것이다.
내일모레면 60줄을 바라보는 '아재 중의 아재'인 내가 블랙핑크의 월드투어 '막공'을 본다는 것이 주책맞은 노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사실 공연 전날까지 했다. 유튜브나 뉴스로 보면 될 것을, 그냥 따님에게 양도할까? 그래도 약간의 머쓱함을 갖고 막공을 보러 간 것은 순전히 혹시나 4명 완전체로 하는 마지막 라이브 투어일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앵콜 곡의 마지막 세트리스트 "마지막처럼"의 마지막 가사인 "내일 따윈 없는 것처럼"대로 이 공연이 내일이란 여지를 두지 않을 '가장 잔인한 현장'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을 타고 늦지 않게 넉넉하게 고척돔에 갔지만, 이미 주변은 '글로벌 블링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일요일 오후임에도 지하철은 꽉 찼고, 구일역에 내려 고척돔 앞에 도착할 때까지 발 디딜 틈 없이 밀려갔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중국어, 태국어, 일본어, 영어 등등. 글로벌 블링크는 본핑크 월드투어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기 위해 고척돔을 향했다. 특히나 중국과 태국 관객들이 많이 온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 블링크는 아마도 사드 배치 발언 이후 중국 정부가 내린 '혐한령' 때문에 중국에서 공연이 열리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태국 관객이 많았던 것은 아직 재계약 소식이 없는 자국의 슈퍼스타 리사를 응원하며 '블랙핑크 리사'의 마지막 대관식에 참여하기 위함이었을까?
환상 속의 '블랙핑크'
고척돔에 마련된 마지막 스테이지는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초국적인 스펙터클을 보여주었다. 올해 코첼라에서 선보였던 한옥 기와 모형을 다시 제작해서 무대 중앙에 배치했고, 고척돔의 높은 천장과 무대 곳곳을 활용한 레이저 빔이 화려한 퍼포먼스를 배가시켰다. 여기에 4K 대형 LED 스크린과 세트리스트마다 개성 있게 디자인된 화려한 영상, 다양한 특수효과, 후방 카메라를 활용한 '리버스 쇼트'(reverse shot)의 생동감, 탁월한 라이브 세션과 심혈을 기울인 편곡, 그리고 4명의 여전사와 함께 한 20여 댄서의 노련한 퍼포먼스는 마지막 '본핑크' 투어를 역사적 순간으로 산화하기에 충분했다. 다소 아쉬운 건 사운드 시스템. 실내이면서 층고가 매우 높은 고척돔 특유의 와이드 오픈 공간(wide open space)의 한계를 극복하기에는 사운드의 고저, 좌우의 밸런스나 'PA'(Public Address)의 프론트 지향성이 다소 아쉬웠다.
블랙핑크의 '본핑크' 월드투어는 제작 규모, 퍼포먼스의 고유성, 세트리스트, 스테이지 디자인, 라이브 퀄리티, 멤버의 지명도 등등을 고려할 때 아이돌 그룹, 특히 걸그룹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을 구현했다. 이제 구체적으로 라이브콘서트로서 '본핑크' 막공의 관전 포인트를 몇 가지로 정리해보자.
역시 히트곡 퍼레이드
첫째, 가장 긴요한 포인트는 세트리스트에 수록된 곡 모두 메가 히트곡들이라는 점이다. 확실하게 세어보진 않았지만, 세트리스트에 실린 총 21곡과 앵콜로 부른 4곡 총 25곡은 모두 유튜브에서 수억의 조회 수를 넘긴 글로벌 히트곡들이다.
솔로 무대가 이어지기 전, 첫 번째 스테이지에서 선보인 '핑크 베놈(Pink Venom)', '하우 유 라이크 댓(How You Like That)', '프리티 세비지(Pretty Savage)', '킥 잇(Kick It)', '휘파람'은 노래만 듣고 따라 해도 라이브콘서트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4명의 솔로 무대가 끝나고 부른 '킬 디스 러브(Kill This Love)', '러브 식 걸즈(Lovesick Girls)', '불장난', '타이파 걸(Typa Girl)', '돈 노 왓 투두(Don’t Know What To Do)', '톨리(Tally)', '뚜두뚜두(DDU-DU-DDU-DU)', '포에버 영(Forever Young)'도 전 세계에서 온 블링크 대부분이 따라 부를 수 있는 히트곡들이다.
라이브콘서트의 가장 큰 매력은 평소에 내가 음원이나 뮤직비디오로 듣고 본 곡들을 현장에서 접하고 따라 부르는 것에 있다. 그것은 일종의 "욕망의 생산"이자, "신화의 현현"이다. 예컨대 조용필, 이문세, 콜드플레이, 퀸, 아바 등등 슈퍼스타의 라이브콘서트가 좋은 것은 현장에서 영접하게 되는 좋은 곡 때문이다.
제니, 로제, 지수, 리사, 서로 다른 계열과 감각들
두 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멤버 4인의 아티스트로서의 음악적, 감성적 스타일 차이이다. 각각 2곡씩 부른 솔로 무대를 현장에서 보면서, 평소에 생각하지 못한 4명의 서로 다른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솔로 무대의 순서도 스타일의 유사성과 차이를 고려한 것 같다. 4명의 음악적, 감성적 스타일은 이중 분절된다. 결론적으로 4명 모두 자기 성격대로 부른다.
먼저 각각 2명이 하나의 계열로 묶일 수 있는데, 말하자면 제니-로제의 '내재적 계열'과 지수-리사의 '외재적 계열'이다. 제니-로제의 계열은 음악적 퍼포먼스의 강도가 매우 내향적이고 응축되어 있다. 노래를 소화하는 스타일이나 퍼포먼스의 방식이 내면화하고 에너지를 '견인하는 강도'(attractive intensity)가 매우 높다. 반면에 지수-리사의 계열은 외향적이고 폭발적이다. 이 둘의 퍼포먼스는 발산하는 혹은 '밀어내는 강도'(repulsive intensity)가 매우 높다.
그런데 제니-로제의 내재적 계열 안에서도 둘은 서로 다른 감각을 생산한다. 제니의 감각이 관능적이라면, 로제의 감각은 심미적이다. 제니가 '솔로'를 부를 때 가슴 속 욕망을 비밀스럽게 드러내려 한다면, '온 더 그라운드'(On the Ground)를 부르는 로제에게는 마음속 어지러운 감정을 절제하면서 비틀어버리려는 애절함이 배어 있다.
반면 지수와 리사는 둘 다 외향적 계열에 속한다. 그러나 리사의 감각이 쾌활하고 고혹적이라면, 지수의 감각은 솔직하고 담백하다. 리사의 '라리사' 혹은 '머니'의 퍼포먼스는 고혹의 윙크로 유혹하는 '바디 퍼포먼스'라면, 지수의 '꽃'은 순박한 미소로 유혹하는 '낭만 퍼포먼스'이다.
젠더지향적 퍼포먼스의 특이성
세 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본핑크'의 젠더지향적 퍼포먼스이다. 블랙핑크를 '마마무'나 '아이들'처럼 일종의 여전사 이미지가 강한 걸그룹으로 보긴 어렵다. 그러나 이들이 지향하는 곡의 스타일, 예컨대 '킬 디스 러브', '핑크 베놈', '프리티 세비지', '킥 잇' 등의 노래는 가사의 의미처럼 자신만만한 여성, 주도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의미화한다.
투어 퍼포먼스에서 가장 압권 중 하나였던 '타이파 걸'은 하얀 깃털로 4명을 감싸는 댄서들의 관능적인 퍼포먼스와 고대 로마의 조각상 영상미지 투사를 통해서 모성 사회화하는 여제 판타지를 극대화했다. 간혹 이러한 퍼포먼스를 여성의 성을 상품화한 것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반대로 여성의 '자기애'와 '자매애'를 강조하는 성적 판타지의 분출로 긍정적인 해석을 남기고 싶다. 한편으로 '블랙핑크'와 '블링크' 사이의 정서적 공감대와 젠더적 연대감 역시 콘서트 내내 발견할 수 있었다.
우울한 알레고리
멋진 공연을 보고 집으로 오면서 그래도 여전히 허전한 것은, 블랙핑크가 이날 4명의 완전체로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약속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리사의 재계약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한편으로 모든 팝스타나 팝 아이돌의 화려한 유산과 연대기가 그렇듯이 멋지고 화려했던 시간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우울한 알레고리를 생산한다.
'블랙핑크'가 고대의 건축물이나 무형문화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대 가장 화려하고 멋진 팝 아이돌 프로젝트가 그 시간의 역사를 오래 버텨내지 못한다는 것은 마치 발터 벤야민이 파리의 아케이드 공간 분석에서 간파했듯이 화려한 만큼 매우 우울하다. 그래도 이 파이널 스테이지가 해체의 만찬은 아니길 바란다. 그리고 블랙핑크의 본핑크 월드투어가 먼 미래 케이팝 레거시를 회고하는 후일담에서 역사적 퍼포먼스로 기록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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