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어느 날 어쩌다 시인 김지하 형과 김민기 후배, 그리고 같이 온 지하 형의 여자 친구와 나까지 넷이서 연건동 뒷골목 작은 막걸리집 좁은 방에 앉아 막걸리를 마실 때 좌중에서 나는 내가 지은 '붉은 꽃'을 나직이 불렀다. 노래를 다 듣고 난 지하 형이 한참동안 말이 없더니 물끄러미 나를 보며 말했다.
"금호야, 너 노래를 할래, 노동을 할래?" 묻기에 당황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나직이 대답하였다. "노동자요!" 그랬다. 내가 어찌 생판 모르는 전문가의 세계, 감히 김민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민중 속 노동자의 자리로 들어가려니 준비가 필요했다. 기술 습득! 용접 기술이 제일 대중적이라 생각되어, 종로네거리 신신백화점 뒷길에 있는 중소기업기술지원센터에서 전기용접과 가스용접 기술을 익히려 했다. 그렇지만 수강인원이 넘쳐나는 데다 배정된 실습시간이 너무나 짧아 결국은 왕초보 정도의 기술을 갖고 센터를 나서야 했다.
이러한 상태로 노동부 산하 한국직업훈련원의 용접사 2급 기능공 시험에 응시했으니, 필기시험에만 합격했을 뿐 고난도의 실기시험에는 불합격됨이 당연한 일이었다. 한동안 마음이 스산했으나 내딛은 걸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한동안 영등포와 구로동 일대 공단과 공장지대를 두루두루 돌아다녔으나 용접공을 모집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겨울방학에 들어서서야 영등포 문래동 공장지대 한가운데 있는 봉신주물제작소의 용접공 조수가 되었다. 뜻을 같이 해온 정치학과 3년 선배인 손정박 형님의 도움 덕분이었다. 손 선배님도 나와 똑같은 이상을 품고 있었다. 일하는 사람의 세상, 공평한 세상.
겨울철 공장지대 주변은 연기와 먼지로 늘 희뿌옜다. 내가 얻은 안양천변 문래동 뚝방의 비좁은 셋방을 벗어나 둑을 따라 버스를 타러 가는 데도 그러했으니 공장지대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겨울철이라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니 어둑어둑한 출퇴근 시간에는 더욱 그러했다.
공장 한 켠 주물 작업장에서는 여성 노동자들과 남성 노동자들이 섞여 옷이건 손이건 얼굴이건 모두가 뽀얀 주물가루 먼지 속에서 용광로에서 갓 나온 주물기물들의 검정 흙가루를 털고 문질러 갈고 두드리며 다듬고 있었다. 공장 기계실에는 대형 선반기계와 밀링기계도 가동되고 있었다.
내가 배치된 용접 작업장은 마당 한 가운데 녹슨 양철을 이어붙인 작달막한 앉은뱅이 양철집이었다. 안에는 앉은뱅이 나무의자와 쓰다 남은 전기 용접봉이 흩어져 있었고, 산소와 아세틸렌 가스통 두 개가 문가에 누워 있었다.
젊은 사수는 용접기술이 뛰어난 데다 설계도면도 면밀히 보았고, 나를 항상 편안하게 대해 주었다. 키는 작지만 다부졌고 하는 일도 하나하나가 꼼꼼하고 정확했다. 성격도 차분하고 책임감도 강했다. 내가 석 달 가까이 있으면서 말을 나눈 사람은 오직 사수 하나 뿐이었다. 나는 이름도 없고 경험도 부족한 초자 용접공일 뿐이었다.
퇴근 무렵이면 용접작업과 주물 작업장에서 나온 먼지가루로 인해 나의 몸과 옷이 뽀얘졌다. 작업복에는 튀긴 용접불로 좁쌀만한 구멍이 송송이 뚫어져 있었다. 전기용접이든 가스용접이든 보호막을 쓰지 않고 불꽃을 보지 않으려 조심했지만 눈도 조금씩 벌겋게 충혈되고 있었다. 하루종일 사수가 시키는대로 일했다. 철판을 나르거나 자르거나 두드렸고, 철근을 옮기거나 잘랐다.
점심 때가 되면 양철지붕과 양철벽으로 된 허술한 식당에서 여러 노동자들과 등을 붙이고 선채로 말없이 두부가 섞인 콩나물국과 김치 반찬으로 점심을 때웠다. 소리 내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식사를 마치면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고, 나도 다시 양철 용접장으로 돌아와 가치 담배를 물었다.
공장에 다니는 동안 철구조물로 된 큰 작업장을 짓는 작업도 거들었다. 전적으로 용접반만의 일이었다. 나는 반장을 도와 일했다. 반장은 설계도에 맞추어 기둥을 세웠고, 세워진 기둥들 위로 올라가 벽과 지붕을 이어 붙이며 위쪽에서 작업했다. 나는 사수가 시키는대로 철근을 나르고 세우거나 아래서 위로 철대를 들어 옮겼다. 나로서는 너끈히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하루 온종일 해야 하는 일이었다. 간혹 '스텐카 라진' 노래가 절로 읊조려졌다.
회색빛 주물공장에서 겪었던 일들
공장과 일대 비포장 길은 늘 칙칙했고. 눈이 녹으면 검은색 흙탕물로 질퍽였다. 시내버스를 타고 서너 정거장 거리의 공장을 오고 갔다. 안양천변 인근 자그마한 벽돌집 한 켠 연탄아궁이만 붙어있는 단칸방에 사글세를 내고 지냈다. 집에서 아침저녁으로 펌프질하여 퍼 올린 물통 바닥에는 적갈색 철분가루가 가라앉아 있었다. 이 물로 아침저녁 라면 하나로 끼니를 때웠다.
살림살이라고는 달랑 이불 한 채와 냄비 하나. 아침저녁으로 탄불을 갈아 넣었다. 탄불에 끓인 물로 세수했고 방을 닦았고 라면을 끓였다. 이런 지경에서도 어느 일요일 쉬는 날, 영등포역 로터리 근처의 합기도장에 등록해 공장 일이 끝나면 합기도로 몸을 단련하기도 했다. 새벽과 저녁 출퇴근 때 시내버스에서 내려 안양천 다리 위를 걸을 땐 찬 겨울바람이 쌩쌩거리며 먼지를 휘몰고 갔다.
어느 날 알음알음으로 서울대 학생운동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상대 동년배 심재권(그는 유학 후 국회의원이 됐다)이 찾아 왔다. 그는 나에게 공장 일을 그만두고 같이 시민청년학생 운동을 하자고 설득하려 했지만,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오래 전부터 나는 노동자가 되어 노동자로 사는 것이 꿈이었고, 때가 되면 노동자 운동을 하자는 것이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모처럼 이런저런 이야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밤이 늦어서야 눈을 붙였다.
새벽에 일어나 씻는 둥 마는 둥, 라면도 거른 채 늦지 않으려 서둘러 집을 나섰다. 간신히 공장에 닿아 수위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다급히 출입문을 지나려 했다. 손목시계는 차지 않았지만 조금 늦은 것 같아 마음이 미안하고도 다급했다.
아뿔싸! 이때였다. 느닷없이 수위가 뱉어내는 욕지거리. 나에게는 난데없이 터진 아닌 밤중의 벼락이요 호통으로 들렸다. "야 이 새끼야, 초자 놈이 멋대로 지각이야! 이 개새끼야!" 평소에 얼마나 나를 고깝게 보았기에 점잖게 나무라도 됐을 것을 막말로 욕을 퍼부어 대는 것이 아닌가.
그 뒤의 일은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나도 맞대 욕설을 해댔을 것이 분명하다. 나로서는 난생 처음 듣는 욕설이었고,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수치요 수모였다. 나는 늦어서 숨차게 뛰어오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래서 그 날로 공장을 그만두었다.
지금 생각하면 벗겨내지 못한 지식인으로서의 못된 자존심 탓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말없이 4개월 동안 내 일처럼 일했고, 그동안 도통 친구도 하나 만들어지지 않은 데다, 그럴 만한 기회나 가능성도 전무해 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오로지 용접 노동만 했을 뿐 근처에는 공장 말고는 막걸리집 하나조차 없었던 터라 공동 활동도, 공동 운동도, 공동의 모임도 없었고, 나의 꿈 노동자로서의 미래 운동도 암울해 보였던 때이기도 했다. 출근해 말없이 일하다 점심 먹고, 다시 일하다 퇴근해 집에서 라면 끓여 먹는 반복되는 공장 생활. 나가자! 지금 곧 나가자! 이것이 수위실과 다툰 결과였다.
이제 내가 몸 둘 데가 어디란 말인가. 내 용접기술로는 대공장은 엄두도 못 내겠고, 인맥과 연고지마저 없다. 서울에 있자니 노동시장 정보도 없고. 모아 둔 돈 한 푼 없고, 국립도서관은 더 이상 다닐 곳이 못 되고…. 북한산 말고는, 졸업을 했어도 후배와 친구와 후배들이 많은 동숭동 문리대 말고는 갈 데가 없었다.
용접공 생활을 하던 때인 2월 몇일이던가. 나는 숭숭 뚫린 작업복을 입은 채로 문리대로 갔다. 졸업식 날이기에 어머니와 누이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작업복 위에 졸업생 가운을 걸치고 졸업모를 쓰고 졸업장을 받았다. 우리는 가까운 중국집으로 들어가 중국음식을 먹었다. 졸업하던 날이 이러했다.
문래동 공장생활을 그만둔 몸, 이젠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오래 생각할 틈도 없었고, 오래 생각할 처지도 못되었다. 그래, 탄광으로 가자! 이젠 탄광으로 들어가자. 몸뚱이 하나만으로 노동을 때우는 것이다! 실낱 같이 가냘픈 희망이지만 나에게 연고는 있다. 지하 형님이 피해 계시던 곳, 친우 셋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나온 곳. 내가 갈 곳은 그곳 뿐 아닌가. 옳다 그래, 지금 거기로 가자.
문리대를 졸업하기 전 가을의 어느 날 볕들고 한적한 강당 옆 돌계단에 앉아 지하 형이 나에게 탄광촌 탄부들의 기막히도록 슬픈 이야기를 들려줬다. 무너져 내린 갱 속에서 시신을 찾아내어 끄집어냈더니, 죽은 몸이 찢겨 너덜너덜 했다던 곳. 세상모르는 아이가 웃으며 시체를 따라가고 시신을 드럼통 불에 넣어 태우니 검은 연기가 하늘 위로 솟아났다던 곳.
가자, 가자, 이번엔 내가 그곳에 가자. 그래, 게바라, 카스트로가 따로 있나. 호치민과 구만리 장정의 모택동이 정해놓은 길이 따로 있었나. 그들에게 미리 승전과 승리가 예정되어 있었던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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