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노조가 지난 9월 14일 파업에 돌입했다. '수서행 KTX' 운행을 통해 줄어든 좌석을 늘리고 시민편익을 확대하자는 게 핵심 요구다. 9월 1일부로 수서에서 출발하는 SRT가 동해·경전·전라선까지 노선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차량 부족 탓에 경부선 좌석이 대폭 축소됐기 때문이다.
보수언론들은 일제히 사설을 통해 철도노조가 고속철도 경쟁체제를 무너뜨리려 한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도대체 '경쟁체제'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경쟁체제 사수'를 목놓아 부르 짓는 것일까?
정부와 보수언론이 집착하는 '경쟁체제'는 한마디로 낡은 이념이자 실패한 정책이다. 2013년 박근혜 정부는 코레일로부터 수서발 고속철도를 분리시켰다. 코레일과 SR을 경쟁시키면 철도운임을 낮추고 서비스가 향상되며, 고속철도 건설 당시 쌓인 부채도 빠르게 갚을 수 있다는 장밋빛 전망을 제출했다.
그런데 고속철도 분리 운영 8년째인 지금은 무엇이 달라졌을까?
올해 6월 SR은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 SR 투자자들이 자본금을 회수하면서 SR이 2천3백억의 원리금을 갚아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부채비율이 2000%까지 급등했기 때문이다. SR은 부채비율이 150%를 넘으면 고속철도 운행을 지속할 수 없다. 정부는 출자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부랴부랴 국유재산법 시행령을 개정했고, 국토부가 3590억원을 수혈하면서 SR을 수렁에서 건져냈다. 정부 도움 없이 연명하기 어려운 SR은 이미 '밑빠진 독'이 됐다.
만약 국토부가 SR에 출자하지 않았다면 2300억의 원리금을 대신 갚아준 코레일이 SR의 지분 100%를 소유했겠지만, 정부의 눈물겨운 노력 덕분에 경쟁체제도 연명할 수 있게 됐다. '경쟁체제'라는 이념을 지키기 위해 불필요한 수천억원의 재정을 낭비한 셈이다.
수서에서 출발하는 SRT는 KTX보다 10%가량 운임이 낮다. 정부는 시장원리에 따라 경쟁을 통해 가격이 인하된 것처럼 호도하지만, 사실 SRT의 운임은 SRT가 운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국토부가 정책적으로 결정한 가격이다. 경쟁효과와는 상관이 없다.
2017년부터 2022년까지 SR의 총매출액은 3조5300억 원. 만약 운임 10% 인하 정책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SR의 매출액은 약 3531억 가량이 늘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액수는 지난 6월 국토부가 SR에 출자한 규모 3590억과 거의 같다.
다시 말해 지난 8년간 SRT 승객들의 10% 인하된 운임 부담을 정부가 떠안은 셈인데. 강남권에 거주하지 않는 KTX를 주로 이용할 수밖에 없는 승객들에 대한 차별이다.
고속철도 분리 운영 8년, 남은 것은 차별과 비효율, 정부 재정 낭비뿐이다. 이 실패한 이념을 끝까지 부여잡기 위해 펼치는 정부의 노력은 눈물겹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집착하는지는 국민들 입장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철도노조의 이번 파업은 정부의 '경쟁체제'라는 낡은 이념에 맞서 '시민편익 확대'를 위한 싸움이다. 정부가 '홍범도' 이념 전쟁도 모자라 '고속철도 경쟁체제'를 둘러싼 이념 전쟁을 벌이는 동안, 철도노동자들은 일터를 박차고 나와 광장에 서서 '시민편익 확대'를 외치고 있다. 다시 한 번 묻는다. 정부는 어느 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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