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내가 도서관에서 재수공부를 하는 동안 대학가에서는 한일협정비준 반대 데모가 그칠 날이 없었던 것 같다. 특히 3월 24일 광화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가판대에서 본 동숭동 문리과 대학생들의 한일협정 반대 화형식 행렬의 모습은 수많은 학생들의 밀착된 힘과 곡성으로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해 보였고, 동숭동 대학로는 물론 고려대와 연세대 시위대의 모습에서는 곳곳에서 터지는 희뿌연 최루탄 가스와 돌멩이들이 신문지 안에서도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최루탄 가스 연기와 아스팔트 위에 뒹구는 돌덩이 속에 팔이 꺾이고 비틀려 끌려가는 대학생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처절하고 가열차 보였다. 이때 붙잡혀 재판에 등장한 시위대 주동자들의 이름은 지금도 내 머리에 남아 있다. 김중태, 현승일, 송철원, 김도현 등. 모두가 내가 뜻을 두고 있는 문리대학 정치학과 4학년 선배들이었다.
한동안 소강상태로 점점이 이어져 가던 대학가의 시위운동은 급기야는 연합 시위대로 바뀌어 광화문 세종로 거리를 두들겨댔나 보다. 1964년 6월 3일, 시위대는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중앙청 앞 가두에 올랐고, 그 기세로 효자동을 돌파해 청와대를 향하여 돌진했다.
그러나 박정희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자 거리를 뒤흔들던 울분의 소리가 단번에 잦아들었다. 탱크와 기관포를 앞세우고 완전무장한 군인들의 총검이 성난 데모대를 한순간에 잠재웠던 것이다. 무소불위 박정희 군사독재의 진면목이 다시금 천하에 드러났구나 싶었다.
거리 요소요소마다 탱크가 진을 쳤고, 중무장 군인들이 짝을 지어 거리의 동상이나 된 듯 경계를 서며 젊은이들을 불신검문 해 시민들 마음을 옭좼다. 시위 주동자에 대한 검거령과 함께 이들이 셋방살이하던 하숙방이 낱낱이 수색 되었고, 이들이 읽던 상당수의 책들도 압수되었다.
을지로입구 국립도서관에서 서대문밖 우리집을 향해 걸어가던 나는 가판대에 멈춰서 큼직한 사진을 보고 이를 알았다. 나는 가판 신문대에 붙은 사진을 통해 재판정에 선 그들 시위 주동 학생들의 모습을 보았다. 주모자 모두가 문리대 학생 서클인 '민비(민족주의 비교연구회)' 소속 정치학과 4학년 재학생 일색이었다. 신문에는 압수해 놓은 책들도 눈에 띄었다. 그 안에는 <모택동 사상>이란 책이 있었고, <들어라 양키들아>란 책도 눈에 뜨였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혁명사도 있었던 듯하다.
나는 즉시 이 책들을 도서관에서 대출받아 꼼꼼히 읽어 보았다. 대륙 공산 사회주의 국가 중국, 쿠바와 유고, 베트남 현대사를 접하는 첫 번째 책들이었다. 책 안에는 내가 처음 대하는 또 다른 세계의 모습이 소리치고 있었다.
이 나라에선 절대금기 지대인 사회주의 세계 중국과 쿠바의 살아 숨 쉬는 모습들! 이제껏 나는 그런대로 많은 역사책을 보았다고 자부했는데, 이 책 안에는 내 곁에 엄연히 존재하면서도 내가 생판 모르고 지내왔던 혁명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역사도 사상도 삶과 죽음도 동지애도 혁명도 승리도 패배도.
인민은, 또한 병사는 노동자요 농민이었고, 학생이었고, 지식인이었고, 도시의 서민들이요 빈민들이었다. '인민에게 바늘 하나 실 하나 빼앗지 말라'는 철통같은 규율도 기술되어 있었다. 길고 긴 혁명의 기간, 이들을 지도하고 인도한 모택동의 생각을 소개한 것이 이 책 <모택동 사상>이었다.
합격, 그러나 또 다른 고난의 시작
1965년 2월 어느 날 아침, 라디오 방송에서 서울대학교 합격자 이름이 한 사람 한 사람 호명되어 나왔다. 정치학과 합격자 20명 명단이 호명되기 시작했다. 나는 담담하고 냉담하려 했지만, 열 번째로 내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 어떻게 형언해야 할지 지금도 막연하다. 곁에서 나를 지켜봤던 누나 얘기로는 내 얼굴이 순간적으로 확 변하더란다. 이때 아버님 어머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입학식이 있기 전 나는 수유리 '4.19혁명 기념탑'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숙였다. 무덤 하나하나를 둘러보고 나서 한동안 그 주변 자그마한 둔덕의 비문 곁에 앉아 있었다. 둔덕 주변에는 분홍색 진달래꽃이 몽우리지어 피어오르고 있었다. 때로는 먼저 고려대학교 정외과에 들어간 초등학교 동창 박영길의 소개로 이곳에서 열린 학생운동 소모임에도 참석했다. 거기에는 고려대와 성균관대 총학생 회장도 끼어있었다.
입학한 해인 1965년 4월 19일, 문리대 마로니에 광장 4.19탑 밑에서 열린 4.19 기념행사에 참가한 후, 이어진 거리 행진 대열에도 참가하여 문리대 학생회장인 외교학과 조순 선배의 곁에 붙어 정치학과 동기 이방환과 함께 앞줄에서 걸었다. 대학로와 이화동 로터리를 지나 전차가 다니는 종로5가 네거리를 돌았다. 보슬비가 내려 주변이 어둡고 칙칙했다.
4.19 학생혁명을 기념하는 무언의 평화행진이었으나, 행진 대열의 양 옆으로는 백골단이 가득 찬 경찰 트럭들이 우리를 호위하듯 따라붙고 있었다. 전차가 오가는 종로5가를 돌아 평화극장 앞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경찰의 호각소리가 나더니 트력에서 뛰어내린 백골단들이 대열을 포위하여 무너뜨리며 학생들 한 명 한 명을 낚아채 평화극장과 동대문 경찰서로 밀어 넣었다.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모두가 풀려 나왔다. 내가 처음으로 유치장에서 밤을 보낸 하루였다.
연이어 4.19 기념탑 앞과 마로니에 밑에서, 또 빈 강의실에서 굴욕적인 한일협약 조인 반대 데모와 연좌농성이 이어졌다. 한일협약 반대 데모 때 나는 선배 동학들보다 한 발 앞서 걸었다. 백골단들의 곤봉과 최루탄에 맞서 맨주먹 불끈 쥐고 선배들이 치달리던 대로를 달렸고, 돌덩이도 던졌다.
최루탄을 쏘아댄 후 방패에 숨어 곤봉을 휘두르며 뛰어드는 백골단들을 보니 절로 핏발이 튀었다. "야, 이 강도놈들아!" 열이 오를 대로 오른 나는 나뒹구는 돌을 집어 백골단들에게 던졌다. 왜 그 자리엔 박정희는 없고 졸개인 병졸들만 있더란 말인가.
마로니에 농성 때는 나보다 1년 앞서 고려대 정외과에 입학한 숙명여고 출신 조정후가 응원 차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찐계란 한 묶음을 들고 왔다. 나중에 그는 쌍문동 자기 집 앞에서 휴가차 서울에 나온 나를 사회주의자라고 낙인찍은 여학생이었고, 학비를 벌려고 집집마다 물건을 팔고 다니던, 마음 새 곱고 부지런하고 막힘없는 처음이자 잠깐 동안의 여자 친구였다.
지금도 그 옛날 그 우정의 옛 마음이 숨 쉬고 있으나 지금은 이 세상 어디에 있는지 막막하기만 하다. 고려대 정외과 출신 국회 정책연구위원 동료인 전순은에게 알아보게 하니 졸업생 명단에는 있으나 사는 곳은 없단다. 그래도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보고 싶은 유일한 옛 친구이다.
최루탄과 곤봉으로 대열이 무너지자 나는 대형 태극기와 함께 하천 구정물에 뛰어내려야 했고, 복개된 캄캄한 개천굴 안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그게 다였다. 잡히지는 않았다. 때로는 데모 중 서울대 미술대학 뒤 동숭동 주택가 막다른 골목 안까지 쫓겨 가게 되자, 백골단을 피해 남의 집 높은 쇠창살 담장을 단숨에 넘고 또 넘어 반대쪽 골목길로 숨가쁘게 빠져 나갔다. 그리고 나는 문리대 핵심 서클인 '민비'에 가입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 서클 회장은 정치학과 3학년인 박지동 선배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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