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31일 정부가 '사회보장 전략회의'를 통해 사회서비스를 "시장화"하고 "경쟁체제"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짜증이 났다. 누군가의 말처럼 '인생 100세 시대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무턱대고 시장과 경쟁이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은 사람들의 욕구와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조합해 가격을 매개로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한다. 만약 시장이 없었다면 우리는 상점 앞에 기다란 줄을 서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은 만능이 아니다. 시장은 늘 가격을 붙일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돈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의 욕구에 충실하다. 예를 들어 병에 걸려 치료하는 것 보다 예방이 더 비용 효과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보건소는 모자라고 미용목적의 외과는 넘쳐난다. 이런 상태를 시장의 실패라 부른다.
우리사회는 시장실패라 불러도 좋을 만큼 필수적인 사회서비스의 공급부족 상황에 빠져있다. 급격한 고령화나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증가 등으로 돌봄, 보건의료, 교육, 주거분야 등에서 사회서비스의 필요성은 늘어나고 있는데 공급이 충분하지 않다. 증가하는 사회서비스 수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정부의 고민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해결방법이 사회서비스의 시장화를 통해 경쟁을 촉진하고 공급을 늘리겠다고 하는 것인데 결과가 좋지 않다. 정부는 2012년 8월 경쟁촉진을 목표로 사회서비스 제공기관을 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하는 방식에서 일정 요건 충족 후 등록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시행해 왔다. 제도 시행 4년 후 서비스 제공기관 수는 2170개에서 3875개로 늘었지만 전체 기관의 60~80%는 도시 지역에 몰렸고, 군 지역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은 10~30%에 불과했다. 정책 변화 이후 도시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서비스를 받는 대상자 확보에 어려움이 반대로 농어촌지역에서는 공급기관이 부족해 서비스 사각지대가 생겨났다. 한편 사회서비스 시장화 이후 대부분의 지역에서 서비스 품질 저하가 보고되고 있다. 민간의 공급자들은 비용절약을 위한 경쟁을 해왔고, 그 결과 공급 인력의 열악한 일자리로, 열악한 일자리에서 제공되는 낮은 질의 서비스로 이어져왔다.
사회서비스를 시장화 한다는 것은 현재와 같은 사회시스템 하에서는 불가능한 기획일 수도 있다. 물론 사회서비스의 일부는 시장화가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시장은 가격을 붙일 수 있는 것에만, 돈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의 욕구에만 반응한다. 시장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시장의 속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지난 6월 23일 통계청이 발표한 '무급 가사노동 평가액의 세대 간 배분 심층 분석' 결과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유년층(0~14세) 돌봄에 투입된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가 132조 원, 노동연령층(15~64세)의 가사노동 생산량은 410조 원 규모였다. 무급 가사노동이라는 말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듯 이런 일은 국민계정(GDP)에 포함되지 않으며 무시되어 왔다. 사실 이런 생각은 꽤나 전통이 깊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아담 스미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마흔 살이 넘어 완성했다는 그의 책 <국부론>의 어떤 구절에도 어머니의 손에 대한 언급은 없다. 사회서비스의 시장화란 결국 마치 그림자나 부스러기처럼 존재하는 것들에 사회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인데 이를 사회서비스의 시장화라고 개념화해서는 성공할 수 없을 것 이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서비스 분야의 수요에 영리기업을 통한 대응이 효과적이지 않다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 기본적으로 시민들에게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은 이윤이 아니라 서비스의 이용이 목적이어야 하며, 동시에 집합적이고 관계지향적인 활동이어야 한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과 달리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 조직들은 배당할 필요가 없고, 이용자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가 생산되도록 조정이 가능하며, 제도화 이전에라도 영리기업이나 국가가 제공할 수 없는 서비스의 제공이 가능하다. 돌봄을 목적으로 설립 운영 중인 도우누리사회적협동조합, 전국의 의료사회적협동조합, 공동육아사회적협동조합, 협동조합형 아파트 공동체인 위스테이 별내의 사례는 시장과 경쟁 아닌 다른 방식의 사회서비스 공급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책임졌다는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 서비스는 국가가 책임지겠다고 선언하면 무엇이 이상한가? 최소한 이런 선언이 있은 후에 예산의 제약이 있으니 이렇게 저렇게 정책을 조합하여 추진하겠다고 하면 좋지 않을까? 안 그래도 삶이 불안해 결혼을 할 수도 없고, 결혼하면 얘 키우기 어려워 낳지도 못하고, 이제는 오래 사는 것이 마치 재앙이 된 것 같은 사회에서 저출생, 인구감소 걱정이 가당키나 할까? 이와 같은 지금 우리사회에 필요한 메시지는 사회서비스의 시장화가 아니라 돌봄선언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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