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멈춰버린 시계
저는 시계를 풀 수가 없어요.
어머님께서 마련해주신 이 시계.
행여 나쁜 일이라도 있을까 걱정하시며
서대문 형무소로 일 나가는 아들을 배웅하시던
어머님의 흰 저고리 흰 동정을
고운 명주수건으로 싸주시던 도시락을 품에 안고
그 날도 길을 떠났지요
숨이 지던 순간에도 저는
오른 팔로 왼 손의 손목시계를 감쌌어요.
이 시계가 내 길지 않은 날들의 마지막 시간을
증거해주리라 여겼지요.
어머님께서 언젠가 제가 있는 곳으로
저를 향해 버선발로 찾아오시리란
믿음이 있었어요.
제가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지만
저는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요.
대한민국만세
대한민국만세
두 번 뜨겁게 외쳤지요.
마지막 가뿐 숨을 뱉으며 제가 쏟아낸 말이었지요.
혼자 계신 어머니께서 어찌 계실까 걱정이 되었지요.
이미 멎은 심장소리, 이미 멎은 초침이지만
혼이라도 다시 살아나
어머니 얼굴을 뵈러 가겠다고 혼자서 되뇌었지요.
이렇게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나.
어머니와 저의 만남이 이루어질 날은 언제일까요?
이제 어머님 목숨이 다하시는 날.
저희 하늘에서 뵙기로 해요.
그날 저희 둘 기쁜 울음.
한반도에 명랑하게 울려퍼지겠지요.
* 1950년 6월 당시 서대문 형무소 간수부장 김좌호는 형무소 출소자의 밀고로 북한군에 잡혀가 살해당했다. 김좌호의 상황을 그린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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