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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혜가 아닌 연대"…우리는 한 배를 타고 있나?

[장성관의 202Z] ⑪ 마틴 루터 킹 목사 탄생일 94주년을 맞아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미국 정치권과 시민활동가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인물로 꼽힌다. 비록 39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미국 내 차별철폐와 민권증진에 있어 그가 남긴 족적은 오늘날에도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매년 1월 세 번째 월요일은 미국에서 "마틴 루터 킹 데이"로 기념한다. 미국 정부가 1983년 지정한 국경일로, 새해 첫날을 제외하고 매해 첫 번째 연방 공휴일이다. 

지금 우리는 한 배를 타고 있나?

"우리는 모두 다른 배를 타고 왔을지 몰라도, 지금은 우리는 한 배를 탔습니다. (We may have all come on different ships, but we are in the same boat now.)"라는 그의 말은 지난 10여 년간 인종갈등과 사회 양극화가 심화된 미국 사회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다.

이 말은 중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우선 흑인과 백인들이 미국에 이주한 배경의 대조다. 미국의 흑인들은 대부분 아프리카 지역에서 강제로 포획되어 미국 땅에서 노예로 여러 세대를 살아온 반면, 백인들은 유럽 지역에서 대다수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이주했다. 또 백인들의 미주 이민 역사는 "개척"과 "도전" 같은 말로 미화되었다. 문자 그대로 노예선과 메이플라워호 같이 성격이 다른 배를 뜻한다.

동시에 은유적으로는 다문화 사회이자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을 빗댄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표어인 "여럿으로 이루어진 하나 (E Pluribus Unum)"와 마찬가지로 모두 다른 배경을 가졌지만 하나의 공동체로서 더불어 산다는 의식의 표현이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며 소득불균형과 사회적 갈등은 심화되었다. 전문직 종사자는 고용위기에서 안전했고, 재택근무가 가능한 직업에는 오히려 사람들이 몰리며 경쟁이 과열되었다. 반면 현장근무가 불가피하거나 소위 3D 직종에는 노동자들이 더욱 위험한 환경에 내몰렸고, 기피현상으로 일손이 부족해져 더 높은 강도의 업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때문에 사회·경제적으로 특정 분야, 산업, 또는 계층은 회복된 반면 취약층은 더 힘들어진 일명 "K자 회복" 양상을 보였다.

최근 진보 성향의 활동가들은 킹 목사의 이 명언을 차용하여 시대상에 맞게 업데이트했다. "우리는 모두 같은 폭풍 안에 있을지 몰라도, 각자 다른 배를 타고 있습니다. (We may all be in the same storm, but not on the same boat.)" 언뜻 비아냥대는 듯 보이는 이 문구는 사실 평등 (equality)와 공평(equity)의 차이를 파고든다.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공정한 결과를 위해서는 개개인이 필요한 지원과 그 수준 또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동등한 것이 항상 공정한 것은 아니다.

1964년 민권법, 그리고 1965년 투표권법

킹 목사 활동의 키워드는 평등 (equality)이다. 그가 활동했던 1950년대와 60대에는 기본적인 시민의 권리가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보장되지 않았기에, 민권의 평등 그리고 기회의 평등을 추구했다. 오늘날 평등을 넘어, 공평(equity)한 과정과 공정(fair)한 구조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제고된 것은 그만큼 시민의식과 정의에 대한 고찰이 성숙해졌다는 방증이다.

당시 민권운동의 가장 큰 성취는 1964년 민권법 (Civil Rights Act of 1964) 제정이다. 같은 이름의 연방법은 1866년부터 존재했지만, 민권의 범위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효력은 미미했다. 1964년 법은 인종, 피부색, 종교, 성별, 그리고 출신국가를 이유로 하는 모든 차별을 포괄적으로 불법화하는 동시에 유권자 등록 요건의 비평등 적용, 학교 및 공공시설에서의 인종 분리 정책, 고용 차별을 금지해,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법으로 꼽힌다.

당시 킹 목사는 이 법안에 투표권 행사에 관한 인종차별금지 조항의 포함을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보수 진영으로부터의 반발이 부담스러웠던 린든 존슨 대통령은 반대 입장을 밝혔다. 대신 추후에 별도의 법안으로 통과되도록 힘쓰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듬해 1965년 투표권법 (Voting Rights Act of 1965)이 제정되었다.

평생 이념과 운동 방식에 대한 의견 차이로 킹 목사와 충돌했던 말콤 엑스도 이 두 법안에 대해서는 동의를 표했고 1964년 의회에서의 민권법 논의를 방청하러 온 자리에서 킹 목사와 만나기도 했다. 그 둘이 직접 이야기를 나눈 것뿐만 아니라 한 자리에 함께 한 일은 이때가 유일하다.

킹 목사에게 향했던 여러 비판 중 하나는 법안, 법원으로부터의 판결과 명령, 그리고 행정명령에 과도하게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연방정부의 이런 움직임이 사람들의 마음과 도덕적인 잣대를 바꾸지는 못하기 때문에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하지만 행동은 규제될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답하곤 했다. 마음속 태도가 바뀌려면 오랜 시간과 교육이 필요하겠지만, 일상의 행동과 습관은 공공정책을 통해 바꿀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미국학 및 역사학자 코넬 장 (Kornel Chang) 교수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공공정책과 문화적 인식은 상호작용을 통해 강화된다"고 동의하며, 특히 소수자 권익에 있어서는 그 역사적인 예시가 두드러진다.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은 제정 이후로 여러 차례 개정되며 그 보호 대상이 꾸준히 확대되어 왔다. 또 연방대법원은 헌법에 명시된 평등 보호 조항 (수정 헌법 제 14조) 등에 근거해 차별금지 조건을 민권법에 명시된 내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2020년 민권법에 명시된 차별금지 조건 중 "성별"에 성적 지향 및 성정체성 또한 포함된다고 판결했다(Bostock v. Clayton County).

1964년 이후 일부 주·지방 정부는 자체적인 민권법, 차별금지조례, 투표권법 등을 시행 중이다. 워싱턴DC는 "DC 인권법"에 따라 관내 거주자, 방문자, 그리고 노동자를 대상으로 총 23개의 속성에 기반한 차별을 불법으로 규정한다. 주택, 고용, 공공시설, 그리고 교육시설에서의 차별 행위가 법의 적용 범위이며, 연방 민권법에 명시된 속성에 추가로 외모와 수입원, 가족관계 등을 포함한다.

1975년 연방의회는 투표권법에 언어 구사 능력을 별도의 지원이 필요한 요건으로 추가해, 수차례 연장을 통해 현재는 2032년까지 재승인되어 있다. 이를 통해 미국 시민들은 투표 참여에 있어 영어 외의 언어로 정보를 포함한 추가 지원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민권법과 투표권법은 개인의 선택권에서 벗어난 속성에 대해 제도적인 보호를 제공한다. 흑인의 평등한 권리를 위해 시작한 민권운동의 결실은 인종을 넘어 다양한 소수자들의 권익으로 수십 년째 돌아오고 있다.

소수자에게 가혹한 사회는 모두가 불안에 시달려야 하는 디스토피아

킹 목사의 설교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내용은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그의 해설일 것이다. 이는 수년 동안 그의 연설의 단골소재이며, 그의 1968년 연설 "나는 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I've Been to the Mountaintop)"에도 언급된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에서, 강도를 만나 길에 반쯤 죽은 채 버려진 한 유대인을 보고 지나가던 한 제사장과 레위인은 못 본 척 다른 편으로 회피한다. 반면에 여행 중이던 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망설임 없이 상처를 돌보고 자비를 들여 숙소를 찾아 맡겨주기까지 한다. 킹 목사는 첫 두 사람은 가엾은 이를 보고 "내가 이 사람을 도와주면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었지만, 사마리아인은 "내가 이 자를 돕지 않는다면,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 행동의 차이라고 설교했다. 심지어 당시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적대적관계에 있었다. 킹 목사의 설교는 우리도 공동체 안에서 약자를 보고 자신의 손익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형제이자 이웃으로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

신명기 10장 19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타국인들을 사랑하라. 이는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타국인들이었음이니라"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언제나 어디서나 천대받는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잠언 31장 9절 또한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위하여 변호하라"라고 전한다. 성서에서는 약자의 편에서 사랑을 행하라는 교훈이 주를 이룬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연설을 통해 성서 구절을 자주 인용했던 것은 비단 그가 목사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 우리는 모두 언제든 다치거나 병들거나 늙는다. 지난해 보건의료 정책 전문지 <더메티컬>에 실린 한 기고문의 명문(名文)을 빌리자면 "소수자에 대한 처우가 가혹한 사회는 '현실주의가 지배하는 효율적인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디스토피아'일 뿐"이다. 스스로가 약자의 입장이 될 때 기댈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인류학자 마가릿 미드는 문명의 시작점을 "부러진 대퇴골"로 봤다. 1만 5천여 년 전으로 추정되는 한 사람의 허벅지 뼈에 부러졌다가 치유된 흔적이 있는데, 누군가가 그 사람이 완쾌할 때까지 옆에서 돌봐준 덕분이라고 했다. 생산성이나 다른 경제적 득실을 떠나 공동체 의식에 기반해 약자를 도운 첫 증표인 것이다. 이는 우리 인간을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 안에서만 작동하는 짐승 집단과 구별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시혜가 아닌 연대" (solidarity, not charity). 2020년 이후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 아래 모인 집회에서 여러 차례 강조한 문구다. 우리는 제도의 결함과 구조적 문제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고 있지 않은지, 오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탄생일 94주년을 맞아 다시 한번 돌아본다.

▲시민 참여 형태로 그려지고 있는 미국 보스턴의 마틴 루터 킹 목사 벽화.ⓒ AP=연합뉴스

(필자 주: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킹 제임스 성경을 사용했기에, 인용한 성경 구절 및 관련 용어 또한 한글 KJV의 번역과 표기를 따랐습니다.)

* 필자 장성관은 보스턴대학 반인종연구센터 펠로우, 미주한인유권자연대 사무차장, 미국 민주당 청년전당대회 대의원을 지내며 VICE News와 The Star-Ledger 등에 기고했습니다. 연설문 작성, 정책개발, 커뮤니티 연대 협력 등에 관해 자문을 제공하고 소수자 정치력 신장을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2020년대 정치와 Z세대 정치를 다룬 '202Z' 연재는 이 글을 마지막으로 종료됩니다. 그간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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