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이가 기적적으로 이태원에서 살아왔을 때, 살아온 것만 기뻐했지 너의 마음을 몰랐어. 지금 재현이가 없으니 이제야 재현이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거지."
고 이재현 씨의 아버지는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에 적힌 편지를 읽어나갔다. 이 씨의 아버지는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마음이 아파서 쓰고 있지 못했다"라며 아들을 떠나보낸 지 한 달 만에 적어온 편지를 이태원 참사 유족들 앞에서 읽었다.
"우리 재현이는 혼자서 그 고통을 안고 있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사랑하는 친구들을 두 명이나 한 번에 잃었는데 얼마나 외롭고 그리웠을까. 재현이가 죽기 전 일주일동안 밝은 모습으로 밥도 잘 먹고, 노래도 많이 부르고, 게임도 재미있게 해서 이제 조금씩 예전으로 돌아오나 하고 안심했어. 그런데 그것이 친구한테 갈 결심을 하고 마음이 편안해져서 그랬다는걸 알고 나서 너무 가슴이 아프더라..."
고 이재현 씨는 이태원 참사 159번째 희생자다. 참사 당일 이태원을 찾았다 구조된 이 씨는 악성댓글 등 2차 가해로 인한 참사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지난달 극단적 선택을 내렸다. 정부는 참사 트라우마로 사망한 고 이재현 씨를 이태원 참사 159번째 희생자로 인정했다. 울먹이며 편지를 읽고 내려온 고 이재현 씨의 아버지를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이종철 대표와 이정민 부대표가 나서서 안아주었다.
14일 비가 잠시 그친 오후, 참사 유족들 30~40명이 참여한 '10.29 이태원 참사 시민추모제'가 대통령 집무실 인근인 전쟁기념관 앞에서 잰행됐다. 유족들은 빨간색 목도리 위로 우비를 입고 '우리를 기억해주세요'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추모제가 진행되는 공간 바로 옆으로는 보수단체의 집회도 진행되고 있었다.
유족들은 저마다 적어온 편지를 읽으며 참사 희생자를 추모했다. 참사 당일 이태원에 있었던 생존자도 직접 낭독한 편지영상을 보내오기도 했다.
"상담사분이 이제 내 마음은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하더라. 이 암흑이 길어지지 않게 조금씩 줄여가는 게 최선의 목표라고 하더라. 이모는 받아들이면서도 새삼 또 가슴이 미어진다. 그래도 이 슬픔과 이 고통들이 우리의 행복한 기억들을 압도하지 않게 스스로 잘 다독여볼게. 그리고 너의 소원들, 이모가 다 지켜줄게. 너 취직해서 돈 많이 벌어 멋진 데 같이 놀러가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같이 여행가자 한 것들. 걱정하지마. 이모가 너 대신 엄마, 아빠랑 다 해주도록 할게." -참사 희생자 고 이상은 씨 이모 강민하 씨
"내 품에서 떠난지 78일이 되었구나. 사진들을 보고 또 봐도 너무 보고싶고, 너의 방에서 지내도 너의 빈자리가 좁혀지지 않아. 좁혀지지는커녕 더욱 너의 빈자리를 크게 느낄 만큼 빈자리가 커." -참사 희생자 고 조경철 씨 어머니 박미화 씨(누나 조경미 씨 대독)
"유가족분들, 저는 제 일행 이외에 다른 분들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되면 같이 힘을 합쳐 목소리를 내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혹여나 외롭고 힘들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유가족분들 뒤에는 저처럼 유가족분들과 함께하고 싶어하는 생존자들이 있음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생존자 여러분들, 저와 같거나 비슷한 생각이 있지만 마음이 아파 나설 용기가 나지 않는 생존자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표현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듯이 우리도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국민이 무서운지 모르는 윗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제2의 10.29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지 않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참사 생존자 A씨
유족들 의문 풀어주지 못한채 끝난 국정조사, 윗선 수사 못한 특수본
이번 3차 추모제는 국회 국정조사가 공식적인 활동을 마무리 짓고, 참사를 수사해온 경찰청 특별수사본부(특수본)가 수사를 종결한 이후 처음으로 진행된 추모제다.
유족들과 시민단체는 국정조사와 특수본 수사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많다며 울분을 토했다. 유족들의 참여가 제한된 채 진행된 국정조사 이후에도 유족들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으며, 특수본 수사는 "꼬리 자르기"식 수사가 되었다는 지적이다.
참사 시민대책회의 진상규명시민참여위원회 소속 조인영 변호사는 국회에서 진행된 국정조사가 "유가족 기대 철저히 저버렸다. 답도 제대로 못 내놨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조 변호사는 유족의 능동적인 참여를 보장하지 못한채 진행된 국정조사는 "명백히 한계"가 있는 결과만을 내놓았다고 비판했다.
국정조사를 통해 "한가지 명백한 점은 참사 직전까지 참사 막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는 점이라며 특수본의 '윗선' 수사 없는 수사 종결은 "국민 생명 안전에 책임 있는 기관들이 책임 회피하는 것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 조경철 씨의 누나 조경미 씨 또한 국정조사에 참여한 정부 관계자들의 발언을 비판하며 "겁쟁이마냥 남 탓하고, 발을 뒤로 빠져도 되냐"라고 말했다.
"솔직히 저는 어른들의 말, 국정조사 그 어른들의 말을 귀로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못 알아들어도 조금이나마 알아듣습니다. 지금의 정부는 저의 하나뿐인 오빠가 억울하게 방치되었던 것과 마지막 오빠를 눈 앞에 두고 붙잡지 못해 후회하고 슬퍼하는 기분을 모르는 무책임한 정부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특수본 수사 결과에 대해서도 유족들은 분노를 표시했다. 13일 74일간 이어온 수사를 마무리하며 경찰,지자체 등 관계기관 23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송치했다고 밝혔다. 유족들과 시민사회가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행정안전부, 서울시, 경찰청장 등에 대한 수사는 무혐의로 종결했다.
이종철 유가족협의회 대표는 수사 결과를 듣고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라고 울분을 토했다. "꼬리 자르기식 수사, 목표 정해 놓고 적당한 수사"라며 "검찰의 윗선 수사가 불가피하다"라고 재차 촉구했다.
이종철 대표는 전날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이태원 사태 등의 이유로 (경제)지표가 좀 나쁘다"라고 발언 한 것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창용 총재는 13일 기준금리 인상 후 기자회견에서 작년 4분기 경제지표가 좋지 않았다며 그 이유로 "이태원 '사태'"등을 언급했다. 이 대표는 이 총재가 경제 지표 악화의 이유를 "이태원에서 희생된 아이들에 떠넘긴다"라고 비판하는 한편 이태원 참사를 이태원 '사태'로 언급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국정조사와 특수본 수사가 마무리 된 상황에서 유족들은 진상규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유가족협의회는 잠시 숨고르기 하고 진상규명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추모제 종료 후 유족들은 우비를 입고 녹사평역 인근 시민분향소로 향했다. 시민들도 유족들과 함께 분향소로 걸음을 옮겼다.
유족과 시민사회가 함께 마련한 분향소에는 현재 97명의 영정사진이 올려져있다. 14일 97번째 영정사진으로 올려진 일본인 토미카와 메이 씨의 아버지는 시민대책회의에 "꿈을 찾아가다 이런 일이 생겨 참 안타깝다"라는 짧은 메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참사 시민대책회의는 분향소 인근 보수단체 시위를 막아달라며 법원에 낸 접근 금지 가처분 신청에 13일까지 3만7000명이 탄원서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참사 이후 49일부터 추모제를 시작한 유족들은 시민 추모제를 이어오고 있기도 하다. 유족들은 참사 100일째인 2월 4일 다시 추모제를 진행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오는 30일부터 집중 추모 기간으로 하고 다음달 4일에는 서울 도심에서 추모제를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이종철 대표는 "아이들이 세상을 떠난지 100일이 되는 날 국민 여러분 100만명과 함께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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